종이위에서 먹물 시가 춤춘다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廣頭釘)을 박고 술취한 넥타이와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 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 < 만년필 / 송찬호 >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은 <남자의 물건; 2012년 발간>에서 자기의 만년필 사랑도 이야기한다.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종이 질이 아주 좋은 수첩에 만년필로 끼적거릴 때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다. (---) 요즘도 약간의 여윳돈이 생기면 바로 만년필 가게를 기웃거린다.”라고 털어놓는다. 사진도 곁들였다. 이름도 어려운 비싼 만년필들이 즐비하다.
남의 물건 이야기 듣다가, ‘나의 물건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함께 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는 물건’, 나에게도 있다. 만년필처럼 생긴 휴대용 붓펜이다. 십수 년 전 서예 선생님이 문구점에서 사주신 붓펜이다. 책상 위 펜꽂이에는 볼펜, 연필, 만년필, 붓펜 등 필기구 열댓 개가 꽂혀 있다. 그중 이 ‘만년필 붓펜’이 나에게 가장 많은 행복을 안겨준다.
붓펜으로 시를 필사하는 시간, 하루중 가장 고요하고 충만한 시간이다. A4 이면지나 지나간 달력뒷면에 생각나는 대로 시 구절을 그려본다. 복잡한 획수를 가진 한자어는 더 아름답다. 카트리지 잉크 대신 갈아놓은 먹물을 듬뿍 찍어 마음속 응어리를 종이 위에 풀어놓는다. 먹물을 먹은 시들이 춤을 춘다. “ (---)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 만년필 / 송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