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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 김종남 May 13. 2023

재미는 어디서 생겨납니까?

새옹지마, 전화위복이 감동을 부른다 

책 읽다 좋은 문장이 나올 때, 일기쓰다 글이 막힐 때, 

붓으로 A4 이면지나 헌신문지에 낙서를 한다.

문구사에서 사온 25호 짜리 죽필, 갈아놓은 먹물을 듬뿍 찍어 큼직큼직 쓴다. 

전화위복, 한자도 뜻을 새겨 써본다. 구를 전, 재앙 화, 할 위, 복 복.

크고 까만 글씨가 마음을 시원하게 씼어내린다. 재미도 있다.



 ‘두 시간짜리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주제는 ‘안전과 소통’. 강의를 부탁한 사람은 한 가지 덧붙였다. “주제와는 좀 멀어지더라도 강의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합니다.” ‘재미’라? 당연한 주문이다. 강의든 이야기든 재미있어야지 재미가 없으면 누가 듣겠는가? 더군다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수강 후 보고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닐 터이니--.      


 그러나 막상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라고 단도직입으로 요구하니 조금 막막해진다. 사실 어떤 강의든 준비할 때마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본 적이 없지만 ‘재미’를 주제보다 먼저 챙겨본 일은 없었다. ‘재미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부터 고민해야 했다. 백발의 긴 수염을 자랑하는 어르신이 ‘긴 수염을 이불 안에 넣고 주무시는지? 밖에 꺼내놓고 주무시는지?’ 묻는 말에 답을 못해 쩔쩔맸다는 옛 얘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재미’는 ‘긴 수염’ 같은 것일까.    

  

 ‘배추머리’ 김병조씨의 ‘명심보감 강의’가 떠올랐다. 왕년에 한국 최고의 개그맨이었던 그의 강의는 정말 재미있었다. 서른 살부터 우리나라 개그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는 서른여덟 살 어느 날 하루아침, 모든 인기를 잃었다. 그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에 빗대 자신의 전화위복 스토리를 멋지게 그려냈다. “인생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욕탕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그렇게 추락(?)시킨 기자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다 지금은 그 기자를 구세주이자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소설 같은 반전 스토리이다.      

 그 얘기가 오래도록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이유는 우스갯소리나 말장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앙을 오히려 복으로 바꿔 이뤄낸 그의 반전 체험담이 가슴속 깊이 감동과 함께 재미를 솟아나게 한 때문이다. 말장난이 빚어낸 웃음은 비눗방울처럼 순간 반짝하다 꺼지는데 감동이 빚어낸 재미는 샘이 깊은 물처럼 오래도록 솟아오른다.      


 극적인 반전 스토리, 나에게도 그러한 감동 체험이 있었던가? 있었다. 5년 전 꿈이다. 끔찍한 교통사고였다.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나도 많이 다쳤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나’ 절망에 빠졌다. 꿈속에서 엉엉 울었다. ‘이게 꿈이었으면’ 하고 기도도 드렸다. 그런데 정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식은땀을 흠뻑 흘리고 깨어보니 꿈이었다. 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이었다.     


  꿈 이야기라니--. 실제가 아닌 그 꿈이 나에게는 극적이었지만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나? 아무래도 허황하다. 그러나 나에게 그 꿈은 실제 있었던 일처럼 너무도 생생하다. 일기에 써놓아 날짜도 잊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나자 망가진 몸이 단박에 고쳐진 기적이었다. 새로운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실제 살아가는데도 큰 울림을 주었다. 차를 운전할 때마다 그 꿈 사건을 잊은 적이 없다. 온전한 몸을 하늘에 감사하며 조심스러워진다.      


 그러고 보니 ‘온전한 몸’은 강의 주제 ‘안전’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또 온전한 몸이 없는 재미가 있을 수 있나? 강의 제목을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정했다. ‘안전은 편안함이다. 그 편안함을 오래 지속하려면 재앙과 위기를 복과 기회로 뒤집는 발상과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1997년 IMF 경제위기로 1년 강제 휴직을 당했을 때 낮에는 무등도서관으로 출근하고 밤에는 중국어학원에 다녔었던 나의 위기, 또 김병조씨의 전화위복 스토리도 곁들였다. 내 꿈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아무리 큰 사건도 기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생생하게 기억하는 꿈은 기억나지 않은 현실보다 훨씬 더 값지다. 날마다 일기에 기록하라, 그 일기를 되풀이 읽고 기억해야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다. 기록하지 않는 인간은 안전한 미래를 가질 수 없다.” 강의를 마쳤다. 강의를 어떻게 기억하여 어떤 재미로 바꿀지는 이제 듣는 사람 몫이다.  201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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