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몇 점인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하여
브런치에서 알림이 두 번이나 울리는 동안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몰아치는 일명 ‘갓생’에 휩싸여 정신없는 3월 말과 4월의 시간들을 보냈다. 첫 시험을 마치고도 아직 수업이 두 번이나 남았으므로 마지막까지 꼬박꼬박 학원에 갔고, 첫 시험 바로 다음 주에 있던 두 번째 시험에도 성실하게 응시했다. 물론 매우 매우 가기 귀찮았지만… 당시에는 아직 첫 번째 시험의 성적 발표 전이었으므로 '혹시나'를 핑계로 하여 꾸역꾸역 시험을 봤다. 두 번째 시험이 조금 더 시간이 모자랐던 것 같고, 청해 영역에서도 독해 영역에서도 ‘아… 엥?’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첫 번째 시험과는 다르게 어휘 영역에 문법 영역 답을 마킹한다거나 하는 실수는 없었다.
나는 결과를 좋아하는 사람이므로, 결과부터 말하자면 2개월짜리 수업이 모두 끝나고 두 번째 시험을 치르고 나서 3일인가 뒤에 첫 번째 시험의 성적이 발표되었는데, 필요한 점수보다 현저히 높은 점수가 나왔다. 말하자면 ‘이게.. 나…?’ 같은 점수였다. 초심자의 행운인지 모르겠지만, 문자로 통보된 점수를 보고 스팸인가 싶어 텝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점수를 확인했다. 같은 숫자였다. 아주 최상의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2+등급(387~452점)의 점수였다. 아아 파고다의 기적이여! 아마도 다시 만나기는 힘들 인연이겠지만, 처음 수업시간에 느꼈던 혼란을 생각하니 제일 먼저 텝스 선생님에게 고마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선생님이 이 소식을 알면 얼마나 기쁠까 싶어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선생님은 최선의 진심을 담아 축하해주었다. 학원의 치밀한 캐시백 시스템 설계 덕분에 접수료를 환급받는 덤은 없었지만(특정일에 치른 시험 성적만 인정되는데 여행이 예정되어 있어 그날 시험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단순히 성적표를 받아보고 기뻤다. 성적표를 받고 기뻤던 적이 언제였을까. 어디든 갈 수 있는 깜찍한 날개가 생긴 기분이었다. 사방이 막힌 사무실 내 자리에서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후 두 번째 시험의 성적 또한 비슷한 수준이었다. 영끌 영어의 저력이었다. 조금 자랑같이 느껴지겠지만 자랑 맞다. 2개월간 매일 2~3시간씩 공부를 해본 것도, 성적표를 가지고 뿌듯해본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어쩔 수 없으니 부디 양해를 부탁드린다.
첫 번째 시험 성적 발표 이후 이틀 뒤 나는 스페인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감에 차서 기분 좋은 여행을 했다. 스페인어는 할 줄 모르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영어를 잘한다. 나는 최근까지 ‘이게 뭔 소리지’ 하는 장문의 청해 문제도 풀다가 왔으니 웬만한 말은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길을 잘 모르더라도 물어보면 그만이었으며, 무슨 요리인지 모를 메뉴들도 어떤 맛인지 물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알람브라를 사랑하는 택시운전사 헤르만이 이야기해 주는 그라나다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할 수 있었다. 스피킹 시험도 아니었건만, 아무렴 어떤가. 나는 여행 내내 intermediate 또는 advanced가 빼곡히 적혀있는 나의 기분 좋은 성적표를 믿었다. 그 덕분에 나는 동양인이 흔치 않아 눈에 너무 띌 수밖에 없는 거리 한복판에서 쭈구리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 그래서 소매치기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어도 아닌 그저 영어일 뿐임에도 가장 최근의 노력에 대한 나의 예쁜 결과는 당장 나를 좀 더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전에는 영어공부를 아주 뚜렷한 목적을 가진 채로 했다. 10대 때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20대 때는 취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의 영어공부는 최근이 가장 재미있었다. 영어공부가 재미있었던 건 초등학교 때 미세스키 영어공부방에서 처음 원어민과 대화에 성공했을 때 정도였건만, 나는 확실히 최근의 영어공부가 '재미있다'고 느꼈다. 점수를 잘 받아봤자 친구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자랑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나이가 되어버렸고, 성적이 좋아도 그만 나쁘면 다시 하면 그만인 나의 영어공부는 조금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사치스러운 영어공부가 나의 삶을 조금 더 재미있고, 뿌듯하게 채워주었다.
얼마 전 성시경 팬미팅에 다녀왔다. 팬미팅을 진행하는 성시경이 현장에서 대만에서 온 팬의 사연을 읽고 대만 팬과 이야기하며 “중국어를 잘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며 아쉬워했다. 수준급의 일본어를 구사하기로 유명한 성시경조차도 더 많은 외국어를 공부하지 못함에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 한 시간의 외국어 공부를 하면 언젠가 반드시 벽을 허물 수 있다고 한다. 내 팬들이 외국어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그를 핑계 삼아 나도 올해는 좀 더 외국어 공부를 계속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