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닿기를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by 김촉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마흔 카제하야' 영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고 있다. 이 청량함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첫 만남은 너무 어렵다는 소년들 이후 오랜만에 보는 청량함이다. 노래가 어쩐지 익숙해서 조금 검색해 보니 15년 전 방영된 동명의 애니메이션 오프닝 곡으로, 일본어로 된 원곡이 있고, 그다지 알려지지 않던 시절의 십센치(10cm)가 원곡보다 더 청량한 목소리로 불러서 사랑받아온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원으로 정식 발매해 주기를 바란 팬들의 10여 년 간의 염원이 절절하기도 했지만, 50만 원 상당의 악기를 사기 위해 알바로 부른 노래였다는 사실이 곡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당시 받은 돈으로 구매한 악기가 젬베(djembe)였고, 이후 십센치는 점차 젬베와 함께 ‘아메리카노’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는 사연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누구나가 아는 뮤지션이 되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고 드디어 발매한 노래라는 것이다. 나는 이 노래에 얽힌 드라마틱한 서사로 인해 묘한 위로를 받았다.


돌아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중첩되고 이어져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유럽을 가본 적이 없었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미디어 화면을 통해 접한 수많은 유럽의 풍경들을 늘 동경해 왔지만 좀처럼 유럽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혼자서 가기에는 너무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교환학생이나 배낭여행을 통해 훌쩍 떠나는 수많은 주변 사람들을 몰래 부러워했다. 그러던 중 올해 회사에서 저연차 직원 해외연수 프로그램 참여자를 모집하는 걸 보게 됐다. 나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직원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고, 네 명으로 한 팀을 만들어 아무도 지원하지 않은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연수를 떠났다.


정원이 스무 명이었던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단 네 명만이 지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저연차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연수로 자리를 일주일 이상 비울 수 있을 정도로 팀장이나 부서장을 포함한 팀 내 팀원들과 친밀한 관계여야 했고, 가정 내 허락이 필요했으며, 승진을 앞두고 있지 않아야 했다. 승진을 앞두고 있다면 근무성적을 위해서라도 주변에 최선을 다해 맡은 업무에 집중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고, 2주가량 자리를 비우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나의 경우 심사승진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니 사실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승진서열이 1년 정도 밀리면서 근속승진 밖에는 답이 없는 상태다.


승진이 밀리는 건 정말 열받는 일이다. 공무원 업무 자체가 서열을 매기기 어려운 업무들 뿐이라 보통 승진 심사는 연공서열에 따라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고 근무 경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건만 한참 뒤에 들어온 후배들에게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밀리면 할 말이 없어지고 의욕 또한 없어진다. 나의 경우에는 파견근무로 인해 밀렸다는 것이 공식인데, 솔직히 내가 파견 간다고 손 든 것도 아니고(아오!!!), 폭격 맞은 것과 다름없는 허허벌판과 같은 부서에 정기발령도 아니고 갑자기 냅다 파견 발령을 내서 다 쓰려져 가는 부서를 재건해놨더니만, 너는 파견 상태이니 본청에서 근무하는 후배들에게 앞 번호를 주겠다는 인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린다. 나는 근 1년간 근무성적평정 밀림, 서열 밀림, 승진 밀림으로 밀림의 왕 라이온킹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이미 밀린 것을 어쩌겠는가. 그저 여기에 억울함을 적을 뿐. 나는 주어진 대로 상황에 맞게 또 살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올 4월에 다녀온 해외연수였다. 승진을 앞둔 후배들은 아무도 가지 못하는, 결혼한 동기들은 아무도 가지 못하는 사내 젊은 직원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심사승진은 애초에 포기한 미혼 직원인 나는 아주 당당하게 무혈입성했다. 폭격 맞은 부서에 어느 날 냅다 파견을 와서 함께 일한 덕분에 부서원들과는 전우애(?) 같은 것이 있는 관계였고, 나의 유럽행은 국장님부터 시작해 과장님, 팀장님, 주임님들과 부모님 모두가 응원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나는 유럽을 다녀온 이들이 꼭 한 번씩 언급하는 나라, 스페인으로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떠났다.


곧 상반기 근평 결과가 발표될 거고, 그에 맞춰 '아직도 이 숫자라고?' 하는 묵직한 승진 서열이 나올 것이다.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덕분에 나는 온 우주의 응원을 받으며 잊지 못할 첫 유럽을 만났다. 나는 삶을 크고 작은 계획들로 채우고 있지만, 삶은 늘 나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나에게 닿는 행운이 있음을 기억하려 한다. 또 이런 아쉬운 날들이 모여 언젠가는 무엇인가에 닿을 날이 오지 않겠는가. 오늘의 아쉬움이 내일의 나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만 닿을 또 다른 기회가 되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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