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마지막 ( )이 아니라고
여느 때와 같은 아주 피곤한 저녁이었다. 다만 그날은 퇴근 후에 좋아하는 소설 작가 R의 북토크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만이 달랐다. 퇴근 후 일정이 있으므로 최선을 다해 대충 일하려고 했으나 어쩌다 보니 또 열심히 일해버려서 남은 에너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최애로 꼽을 수 있는 소설 작가 R님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자리였기에 최선을 다한 발걸음으로 교보문고로 향했다. 그날의 북토크는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토크의 소재인 R작가의 신작은 소설이 아니라 핀란드 여행을 주제로 한 에세이집이었다. R작가의 에세이 뒷면에 있는 추천사를 써 준 다른 작가가 그날 북토크의 진행을 맡아준다고 했다. 북토크의 경우 다른 작가가 진행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별로 특이할 것이 없었다. 추천사를 써 준 작가의 이름은 남자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었는데, 소개를 받고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사람은 여자였다. 1차 조금 놀람. 예명인가, 초록창에 검색을 해 보았는데 아니었다. 2차 조금 놀람.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던 작가의 책에 있는 몇 개의 문장으로 나는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R작가의 신작 에세이는 핀란드 여행을 주제로 하고 있었는데, 토크를 진행하던 에세이 작가는 본인은 파리 이야기를 담은 책을 냈다고 한 마디 정도 언급했다. 북토크는 모두 신작 에세이를 낸 R작가의 이야기로 채워졌는데, 나는 이 북토크를 들으면서 문득 진행자였던 작가의 에세이 책이 궁금해졌다. 그것은 내가 핀란드 여행에 로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내 인생 제일의 로망 도시가 파리이기 때문이었다. 마침 핀란드 여행기를 담은 최애 소설 작가의 에세이를 다 읽고 난 참이라 새로 읽을 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이었기도 했기에, 그날 현장에서 바로드림으로 책을 신청해서 북토크와 사인회가 끝나자마자 책을 찾았다. 교보문고에 딱 한 권 남아있었던 그 책은, 표지가 아주 예쁜 사진으로 되어있는 양장본이었다.
김민철 작가의 <무정형의 삶>이었다.
한눈에 혹할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이 책을 들고 미용실에 갔더니 머리 해주던 디자이너 쌤이 여자들이 좋아할 표지라고 했다), 독서를 출퇴근길에 하고 있는 나로서는 솔직히 책을 처음 보고 '음… 이걸 들고 다니면서 읽으려면 무겁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제목에 약간의 철학적인 느낌이 가미된 것 같았다. 여행기 또는 에세이 제목 치고는 아주 묵직했다.
제목 때문에 행여 무거운 문체로 쓰였으려나 싶었던 책은, 놀랍도록 아주 편안하게 읽혔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문장의 흐름이 나와 호흡을 같이 한다고 느꼈다. 책의 내용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20여 년 간 다닌 회사를 그만둔 직장인이 본인이 사랑하는 도시 파리에서 두 달을 살면서 지낸 이야기. 어쩌면 누군가의 로망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그러던 중 오래지 않아 나는 나의 가치관을 바꾼 문장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문득, 한 가게 앞에서 오래전의 나를 만난다. 그때도 이 길에 왔었다. 이곳에 오면 노르망디 카망베르 치즈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모든 곳에서 파는 치즈인 줄 그땐 몰랐다) 일부러 찾아온 치즈 가게가 아직도 있었다. 그때에도 아주 오래된 시장 길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마음이 바빴다. 가야 할 곳이,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어디부터 가야 할지, 뭐부터 봐야 할지 몰라서. 파리를 너무 좋아했던 나는 파리에서 늘 그 마음에 걸려 넘어졌다.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 다 보고 싶은데 어쩌지. 이 도시 곳곳에 그때의 내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서있다. 초조하고 조금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나를 데려와서 괜찮다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이번이 마지막 파리가 아니라고. 지금의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미래의 너는 파리에 와서 두 달의 시간을 보내게 된단다. 그러니 그렇게 애달프지 않아도 된단다.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 김민철, <무정형의 삶> 32p
나는 서른이 넘은 나이임에도 한 번도 유럽여행을 가보지 못한 것에 모종의 위축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럽을 가기에는 좀처럼 돈도 시간도 여유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대로는 정말로 못 갈 것 같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올해 급작스럽게 스페인 여행을 준비했고, 곧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MBTI 검사를 하면 J(계획형) 성향이 80% 이상 나오는 사람이다. 결코 패셔니스타가 아니건만, 자기 전에 다음 날 출근할 때 입을 옷을 모두 생각해 놓고 그것에 맞는 신발과 가방까지 생각해 놓으면 그제야 잠이 왔다. 내일 입을 옷에 맞추어 갈아입을 속옷 색깔까지 생각하며 사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편안함을 주는 일상이었다. 지정 기한 하루 전에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업무의 경중이나 처리양에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사는 데 있어 계획의 수립과 시행착오의 최소화는 나에게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내가 처음 떠나는 유럽여행이었다. 몬테소리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부터 동화책을 읽을 때마다 삽화 속 거리가 궁금했건만, 내 생에 좀처럼 유럽에 갈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기에 스스로 꾸역꾸역 만들어 낸 여행이었다. 무려 ‘첫’ 유럽이니까. 그리고 다음에는 기회가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15시간의 비행도 처음이었으므로, 그렇게 긴 시간과 공을 들여 간 곳이니 나의 여행은 완벽해야만 한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애를 만나러 간 어느 날 만난 생면부지의 작가가 쓴 에세이 속의 몇 구절 덕분에, 나의 좁은 생각은 탁 트인 평안을 맞이했다. 비단 위의 구절 때문만은 아니었고, 책의 이야기나 흐름 자체가 조급함으로 가득한 나의 마음을 위로하는 듯 흘러갔다. 파리를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하나라도 더 보지 못할까 봐 종종거리던 20대에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20년 뒤 회사를 그만두고 두 달 살기를 하러 올 것을 예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삶은 그렇게도 흘러가기 마련이며, 뜻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리고 모르는 나라에서의 첫 여행은 수많은 변수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 모든 변수들 앞에서 결코 나의 계획만을 고집해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아주 단순하고도 당연한 여행의 진리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미 오랜 반복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계획으로 채워진 일상을 살고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쉽게 체감할 수 없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20년 뒤 같은 여행지에 또 올지도 모른다. 혹은 2년 뒤일 수도, 2개월 뒤일 수도 있다. 삶에 또 어떤 기회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어렵게 만들어 낸 여행의 기회는,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 실행하기는 조금 수월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너무 여행지에서의 한정된 시간과 더욱 한정된 체력을 다그칠 필요는 없었다. 혹시 못 보게 되면, 혹시 못 가게 되더라도,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흘러가게 두면 그만이다. 언젠가 이 곳에 돌아올 지도 모른다. 나는 탁 트인 마음을 가지고 10일간의 스페인 여행을 그 어떤 여행보다 풍성하게 채울 수 있었다. 종종거리며 계획과 일정표를 들여다보는 대신, 동화 속 삽화에 나오던 거리의 풍경들을 한번 더 눈에 담았다. 그러자 여행 중 생기는 다양한 변수들(비행기가 안 뜨거나, 짐이 안 나오거나, 우버를 잘 못 부르거나, 버스 기사가 출근을 늦게 하거나 등) 탓에 세웠던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제법 너그러워졌다. 물론 J인간답게 아주 무계획은 아니었지만, 여행에 대해 마음속의 평안을 찾은 나는 더 이상 종종거리지 않았고, 내가 지나친 것들과 나를 지나간 것들에 대해 지나치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혹시 지금 놓친 것들,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들 때문에 종종거리고 있다면 잠시 멈춰 서보기를.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고, 지금 못 본 것들이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책 한 권이 내게 선사한 것은 단순한 여행의 지혜가 아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통제할 수 없어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삶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준비해두고 있다는 믿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