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주스 끼고 세마나 산타
고지대에 위치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마드리드에서 경량패딩과 함께하는 이틀을 보내고, 세비야 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그제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스페인의 날씨'를 만났다. 하늘은 파랗고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살까, 어떤 생각을 하고 살까 궁금한 기분이 들었다. 탑승객들을 에스코트까지 해주는 마드리드에서와는 달리 세비야 역에서는 택시도 우버도 잡히지 않았다.
'세비야에는 택시가 별로 없군.' 세비야의 첫인상이었다.
세비야 여행 중에는 구글맵에 검색해 보면 걸어서 10분인 거리가 택시를 타면 30분인 경우가 허다했다. 차량이 외곽도로로만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엘꼬르떼 백화점 앞에서 30분째 택시도 우버도 잡히지 않아 2리터짜리 오렌지주스를 들고 유리병에 담긴 저녁 찬거리들을 가득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거리에 유독 사람이 많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스페인 남부의 따뜻한 색감의 건물들과, 그 사이로 나있는 좁은 골목을 평화롭게 걸었다면 좋았겠지만, 손에 든 오렌지주스와 손목에 건 묵직한 비닐봉지 덕분에 나는 좀처럼 여유가 없었다. 오직 아침에 나섰던 숙소만을 향해 가장 최적의 루트로 빠르게 이동할 생각뿐이었다. 들고 있는 오렌지주스와 비닐봉지에게서 어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얼른 숙소에 도착하고 싶었던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게 거리에는 점점 사람들이 늘어났다. 좁은 골목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면 재촉할수록 인파 안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급기야 골목에 사람들이 서 있기도 하고, 앉아있기도 했다. 모두 스페인 사람들 같았다. 아마도 토요일이라 집 앞 동네에 놀러 나왔으리라. 그들의 평화로운 주말 일상을 오렌지주스와 비닐 봉다리를 든 동양인 관광객들이 무지막지한 모습으로 헤쳐나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근데 이거 꼭 에버랜드에서 퍼레이드 기다리는 사람들 같다.”
우리 중 유일하게 자녀가 있는 A가 인파를 헤치다 지쳐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런 듯도 했다. 좁은 골목에 양쪽으로 밀착해 서 있거나 앉아있는 사람들은 마치 골목으로 지나갈 무언가를 기다리기 위함인 것 같기도 했다. 인파가 몰려 인도에는 사람이 가득 찬 반면 찻길에는 지나가는 차 한 대가 없었다. 그리고 아까 30분 동안 택시가 안 잡히지 않았는가. 세비야 시내는 '차 없는 거리'가 된 것 같았다. 아 모르겠고, 오렌지주스나 숙소 냉장고에 빨리 넣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옆으로 기다란 여의봉 같은 것을 든 어린이 30명 정도가 지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하얀 고깔두건 같은 것을 쓴 사람들이 몇 명 지나갔다.
"뭐야, 이거 퍼레이드 맞는-"
“뿌우-”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인파로 꽉 찬 골목에 관악기 소리가 가득 찼다. 오렌지주스를 들고 골목에 갇혀버린 나는 거대 오렌지주스와 비닐봉지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맞은편 동네 사람(으로 추정)에게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저 멀리에 나무로 된 예수 상이 올라 있는 거대한 가마 같은 것이 보였다. 세비야의 성스러운 주간이자, 스페인에서 가장 성대한 부활절 축제라고 불리는 '세마나 산타(semana santa)' 였다.
이럴 수가, 내가 세마나 산타를 거대 오렌지주스를 들고(비닐봉지를 손목에 끼고) 보게 되다니… 부활절이 되려면 한참 남은 상황이어서 설마 보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의 나(슈퍼파워 J인간)였다면 아마도 세비야를 방문하기 전에 미리 모든 축제 정보를 찾아보고 아마도 경건한 복장으로 미리 세비야의 길거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정형을 표방해 보기로 했으므로, 일정에 너무 지극하게 연연하지 않고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과 사건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여보기로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한 손에 오렌지주스를 끼고 세마나 산타의 행렬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거대한 가마를 든 행렬, 파소(paso) 뒤에는 꽤 멋지게 정복을 차려입은 음악대의 행렬이 뒤따랐다.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 장식에 세비야 시의 문장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각자의 악기 위에 조그만 악보들을 저마다의 방법으로 꽂아놓고 부활절 축제에 참여하는 세비야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세비야에 오기 전에 들렀던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았던 벨라스케스의 <불카누스의 대장간> 속 '전형적인 세비야 남자'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잘생김…).
그날 오후에 오렌지주스를 한 팔에 끼고 세비야 사람들의 축제를 만난 경험은, 열리고 트인 마음으로 여행을 하는 것의 기쁨을 알게 해 주었다. 삶에서 이런 경험과 우연이 쉽게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우당탕탕 마주친 세마나 산타 덕분에 나는 앞으로 언제 어디를 여행하더라도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또 한 번 내면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