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7년 차가 되어버린 MZ 공무원이 살아가는 종로에 대하여
‘서울’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세대나 경험에 따라 각자 다르겠지만, 10대를 보내면서 한 번도 ‘서울특별시’에 주소를 두지 않았던 나에게 서울이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는 광화문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강렬하게 생각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시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했을 때 나는 고민 없이 나에게 ‘서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종로구에 지원했다. 종로는 지금도 구중궁궐의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층 빌딩이라는 기이한 조합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묘하게 신비롭기까지 한 곳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합격하고 처음 임용될 당시에는 솔직히 공무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일하고 싶었던 곳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어 그저 기쁘기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에서 일할 수 있다니! 그동안 관광하러나 오던 종로에 직장인으로서 처음 발을 들였을 때의 설렘은 아마도 평생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듯, 임용 후 나는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업무를 직접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학에서 기어코 복수전공까지 했건만, 관련 부서에 배치받는 일은 없었다. 원래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면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오히려 업무와 관련이 없었던 덕분에 7년 동안 직장을 다니는 내내 애정을 가진 시선으로 많은 것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완전 럭키비키잖아~) 그리고 그 작은 애정들이 모여 순간순간의 원동력이 되어준 덕분에 많은 MZ 공무원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요즘에도 나는 계속 회사에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관광을 위해, 혹은 역사현장 탐방과 같은 공부를 위해 종로를 방문한 경험들과 더불어 그런 종로를 종로로 만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나름대로 종로를 다양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인사동과 삼청동은 구청에서 정말 가까운 동네다. 점심시간에 그곳을 쉽게 오가며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인사동과 삼청동의 가장 큰 특징은 차가 다니는 것보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풍경을 가졌다는 것이다. 10년 전쯤 인사동과 삼청동이 한창 힙하던 시절, 대학생 신분으로 방문했을 때 인사동은 고즈넉했고, 삼청동은 더없이 세련되고 예쁜 곳이었다. 이후 젠트리피케이션이니 뭐니 하며 지금은 그 시절만큼 힙한 동네는 아니지만, 아직도 골목골목에는 예쁜 카페들이 많고, 최근에는 풍문여고 자리에 공예박물관이 개장해서 방문객이 많이 늘었다. 거기에 ‘저긴 뭐 하는 데지?’라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오랫동안 높은 펜스가 쳐져 있던 송현동 부지가 드디어 개방되어 탁 트인 공원까지 생겼다. 여기는 ‘열린 송현’이라는 이름으로 개방되었는데, 때에 따라 예쁜 꽃을 심고 건축 전시를 하는 등 지속적으로 공간이 활용되고 있어 점심시간이 되면 산책하는 직장인들로 붐비고 저녁에는 조명이 있는 감성적인 곳이 되었다. 인사동과 삼청동 일대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여유로운 느낌은 골목마다 차보다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다닐 수 있도록 해놓은 것에서 온다. 이곳을 걷는 사람들은 차에 쫓길 필요 없이 아기자기한 가게 안쪽을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생긴다.
삼청동 정독도서관 너머로 걸어 내려가거나 인사동에서 길을 건너면 가회동 주민센터 관할인 계동, 재동이다. 이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런던 베이글 뮤지엄(갈수록 사람이 많아진다는 그곳), 아티스트 베이커리(소금빵 버전), 노티드, 랜디스 도넛, 다운타우너 같은 핫하디 핫한 가게들이 많이 생겼다. 검색창에 ‘북촌’이라고 검색하면 북촌 한옥마을 외에도 이 일대가 북촌이라고 표기되는데, 힙하고 핫하고 선구적인 가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자면 북촌을 기반으로 했던 개화파의 사랑방이 얼핏 생각나기도 한다. 줄 서서 먹는 가게들 이외에도 넓고 풍광이 좋은 카페들이 많고 오밀조밀 풍경이 예쁜 상권이라 천천히 둘러보기 좋다. 여기는 볕이 좋은 점심시간에 방문하여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지만, 해질 무렵의 노을이 지는 시간에 방문하면 따뜻한 느낌이 드는 저녁을 맞이할 수 있다.
차보다는 사람이 다니도록 한 거리라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익선동이다. 익선동은 처음 입사하고 신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방문했었는데, 이때 이곳의 인기가 정점을 찍은 줄 알았건만 아직까지 식을 줄을 모른다. 좁은 골목을 사람만이 다닐 수 있도록 되어있는 익선동 거리는 복잡하고 재미있고 자유롭다. 이 ‘재미있고 자유로움’이 아직도 주말이면 앉을 곳이 없는 익선동만의 비법이리라. 가게들이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말에는 웨이팅 애플리케이션에 이름을 올리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평일 저녁 퇴근 후에 방문하면 조명이 예쁜 식당들에 어렵지 않게 입장할 수 있지만 사실 가장 방문하기 좋았던 시간은 익선동이 잠을 깨기 시작하는 평일 오전 11시쯤이었다. 그 시간에는 골목이 조금은 여유로워 비교적 사진을 찍기 좋고, 마수걸이 손님이 되어 사장님들의 기분 좋은 얼굴도 볼 수 있다.
예전에 ‘더킹 투하츠’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많은 팬을 양산했던 소위 ‘서브커플’의 중요한 배경이 된 도성 성곽의 야경이 너무 예뻐서 언젠가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한양도성 야경을 함께 보러 가야지 했었더랬다. 그런데 웬걸, 당직이니 출장이니 뭐니 해서 오르락내리락할 일이 자주 생겼다. 한 번은 민원 처리 때문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민원 내용에 위치가 제대로 나와있지 않아 성곽마을의 온갖 카페들과 식당들을 들쑤시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이때 이곳을 자세히 경험하게 되었는데,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에 서사를 품은 것이 아주 인상적인 동네였다. 성곽마을은 이화사거리를 지나고 대학로를 살짝 비껴 난 골목들을 통해 올라간다. 처음에는 오르막에 호기롭게 발을 내딛지만 곧 번뇌가 사라질 것 같은 끝없는 계단의 행렬이 나타난다. 초등학생 때 한창 하던 가위바위보 계단 오르기를 하다 보면 조금은 덜 지루할까 싶다. 이 끝없는 계단 덕분에 오르막길은 서사를 품게 된다. 여기를 오르면 뭐가 나타날까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올라간 곳에는 성곽마을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슈퍼가 있고, 작은 가게들이 있으며, 이곳의 여러 건물을 가지고 있는 갓물주 사장님이 만들어 놓은 예쁜 이정표와 조명들, 그림 같은 얼굴을 한 그림 그리는 미남 연예인이 커피를 마시던 카페도 있다.
성곽마을은 차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 워낙 경사가 가파른 데다 주차하기가 어렵고, 무엇보다 이곳의 장점은 오르막을 오르고 내리막을 내려가며 생기는 서사에 있기 때문에 걷는 것을 추천한다. 해가 지기 전에 방문해서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카페의 창가에 앉으면 조용하게 서울의 야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조명이 켜진 성곽을 따라 흥인지문 공원 방향으로 내려오면 흥인지문의 야경이 피날레를 장식한다. 성곽마을은 늦가을과 초겨울 즈음에 방문했을 때 높은 지대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찬 공기가 마음을 비우고 여유를 갖게 했다. 평소 등산을 즐기지 않는 나도 오르막의 서사를 통해 생각을 비우고 내려올 수 있었던 곳이라 생각이 많을 때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 경복궁역이 있는 자하문로로 들어서서 통인시장을 지나고 청운효자동 주민센터를 지나 고개를 넘고 자하문 터널(기생충 계단 거기 맞다.)을 지나면 높은 지대에 위치한 종로구 부암동이 나온다. 부암동은 행정동으로 치면 청운효자동과 평창동 사이에 있는데, 평창동이야 워낙 유명한 이름이지만 부암동을 쉽게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아마도 잘 없을 것이다. 부암동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없는 동네로 조용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근처의 인왕산, 북악산을 등산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자주 거치게 되는 동네인데 청와대가 개방되고 등산길이 확장되면서 좀 더 방문객이 늘었다. 원래도 둘레길이라고 해서 곳곳에 귀여운 표지판이 있었는데, 나는 산이나 둘레길을 일부러 찾아다닐 만큼 좋아하지는 않으므로 아마 평생에 웬만하면 갈 일이 없었겠지만 역시나 출장 때문에 부암동에 여러 번 방문할 일이 있었다.(출장 덕분에 성곽길도 오르고 부암동도 오르고 아주 건강해지고 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동네이고 지하철 역은 없다지만 그래도 꽤 편리하게 광화문에서 버스를 이용해서 부암동까지 갈 수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버스를 타고 부암동으로 향하면 도심 속 자연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매번 업무 때문에 방문하므로 최대한 낭만을 자제한다 해도 부암동은 특유의 자연환경이 주는 아늑함이 있다. 게다가 이곳에 자리 잡은 석파정 서울미술관은 그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미술관이 있고 유명한 산이 두 개나 있으므로 방문객들의 입소문을 탄 유명한 맛집이나 지역 특성을 이용한 예쁜 카페들이 많아 둘레길이나 산을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일부러 버스를 타고 찾아갈 만하다. 물론 편한 신발을 신고 걷기에도 좋은 곳이다. 부암동 주민센터를 기점으로 주민센터 맞은편에 오래된 가게들이나 새로 생긴 가게들이 각자 아기자기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 사장님들은 동네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들이기도 하다. 출장으로 방문했을 때 주민들과 소상공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 때문에 그야말로 맨몸으로 부암동을 만났었는데, 얼뜬 모습을 여유롭게 받아주시던 사장님들의 친절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종로에서 근무하면서 느낀 것은, 종로는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것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품는다. 당장 단순하게 생각해 보더라도 광화문광장에는 그 누가 서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춘식이도 라이언도 해치도, 그 누가 되었든 금방 잘 어울린다. 이번에 다 소개하지 못했지만 종로는 지리적으로 지역 자체가 크고, 예부터 3가, 4가, 5가, 6가와 같이 큰길별로 나누어 각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산과 가까운 동네가 있는가 하면 도로나 청계천과 가까운 동네도 있다. 오래된 한옥들이 즐비한 한옥마을이 있는가 하면 아침저녁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일하는 고층 빌딩숲도 있다. 서울의 오래된 도심 같지만 알고 보면 녹지의 비율이 꽤 높은 곳이기도 하다.
당신의 성별과 연령, 인종과 국적, 직업과 소득 수준이 무엇이든 당신이 종로에 스며드는 것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종로는 서울에서 투어나 관광이 가능한 관광지이자, 사는 곳을 자랑스러워하며 오래 살아온 다정한 주민들이 있는 거주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쏟아지는 곳이기도 하다. 혹시 당신이 아직 종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되돌아보지 못했다면, 한 번쯤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교통이 편리해 쉽게 접하기 좋은 삼청동이나 인사동, 또는 굽이굽이 숨어있는 성곽마을이나 부암동 어디든 각각 다른 매력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