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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촉 Oct 15. 2024

어느 날 종로: 인왕산 등산60분

등산은 싫지만 인왕산 정상에 올라버린 사연

등산은 싫지만 인왕산 정상에 올라버린 사연

   점심을 먹고 구청사 정문으로 돌아올 때면 미국 대사관과 구청 건물 사이에 있는 종로1길 너머로 바위산이 하나 보인다. 평소 이 산이 구청에서 얼마나 깨끗하게 보이는지를 통해 미세먼지의 정도를 체감하곤 했는데 그게 바로 인왕산이다. 인왕산은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이나 광화문의 사진을 찍다 보면 정확하게 프레임에 걸려드는, ‘어진 임금’이라는 뜻을 가진 그야말로 종로에 딱 어울리는 산이다. 중고등학교 미술, 한국사 시간에 나오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그 ‘인왕’이며,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할 때 한양을 수도로 삼고 경복궁의 자리를 정하면서 ‘우백호’로 삼은 산이기도 하다. 산 자체가 겉보기에도 바위가 많이 드러나있어 호랑이 줄무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평소 숨이 차는 과격한(?) 운동을 굳이 하지 않으며, 따라서 당연히 등산을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도 산에 대해 별로 관심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참, 이게 매일 보다 보니 산이 나름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급기야 저기를 한번 가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로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곳에 산이 있으니까 산을 오른다’는 등산 애호가들의 이야기를 '산은 보라고 있는 것'이라고 일축하던 등산 헤이터(hater) 외길 인생 최대의 일탈이었다.

   “아빠, 나 일하는 데에 점심시간에 보면 되게 예쁜 산이 있어.”

   나는 등산 헤이터로 자라났지만, 부모님의 경우는 다르다. 내 부모님은 매일 아침 등산을 ‘연습’한다며 동네 산을 오르고, 슬쩍슬쩍 옆동네 산들까지 하나둘 제패하더니 어느 날 훌쩍 한라산 정상 등반을 다녀오는 분들이다.  그런 부모님에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있다니! 그렇게 가족 주말 등산이 시작되었다.


   검색창에 ‘인왕산’을 검색하면 블로그에 등린이도 정상에 갈 수 있는 접근성 좋은 산이라는 후기가 우수수 있었기에 나는 나이키 운동화에 조거팬츠를 입고 소위 원마일 웨어라고 하는 정말 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등산 헤이터에게는 당연히 등산화나 등산복이 있을 리가 없…) 종로는 주말에 차를 타고 방문하면 주차할 곳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지하철을 타고 종로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오후 3시가 넘은 시각 사직단 정류장에서 내렸다. 정류장 왼쪽으로 나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인왕산 산책로 입구다. 인왕산은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 입구 골목도 늘 갓 정비한 것처럼 깨끗하고 넓은 편이며, 인도가 잘 만들어져 있다. 오른쪽으로 사직단을 두고 오르면 인왕산 안내판이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인왕산 둘레길,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 산길로 들어갈 수 있다. 오른쪽으로 황학정을 두고 인왕산 산길로 들어가는 우레탄 길을 걸어 올라가면 곧 삼거리에 놓여있는 인왕산 호랑이 동상을 볼 수 있다. 경인년을 맞이하여 구청에서 제작했던 이 호랑이 동상은 처음에 영 자리를 잡지 못해 담당 부서에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었는데, 요즘 등린이들의 인왕산행 후기를 담은 블로그들에 거의 등장하는 것을 보니 훌륭한 이정표로 성장(?) 한 것 같다.


   호랑이의 왼쪽 길로 접어들면 나오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인왕산행의 시작이다.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은 좁고 가파른 계단 데크로 되어있다. 그 때문에 내가 산을 오르는지 계단을 오르는지 모른다는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계단으로 되어있는 덕분에 굳이 등산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고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 하겠다. 완만한 뒷동산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산 위를 수놓은 한양도성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왕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산을 오르며 내려다보이는 종로의 풍경을 보고 있자면 생각보다 경복궁이 넓다는 것도 알 수 있고, 왜 인왕산이 경복궁의 우백호인지도 알 수 있다. 산 아래 보이는 기와집들은 북촌 한옥마을이 아니라 경복궁이고, 복층으로 되어있는 기와 건물은 경복궁 옆 국립민속박물관에 속해있는 건물이다.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다 정상즈음에는 바위로 가득해 어쩐지 클라이밍 수준이 되는데, 이것만 조금 버텨내며 평소에 쓰지 않던 앞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을 쓰고 나면 곧 정상이다. 그럴싸한 정상석이 있는 것은 아니고 소박한 정상표지만 있을 뿐이라 조금 허망할 수는 있지만 그 덕분에 정상석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위험하게 줄을 서는 경우는 없어서 정상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편이다. 나무로 된 정상표지판 외에도 정상에는 바위들이 있으니 활용하여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산을 기점으로 종로구와 서대문구가 나뉘는 것을 표시한 경계점 동판도 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닌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종로의 풍경은 아늑하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이 인왕산에 올라 한양의 풍경을 내려다봤을 때 이 풍경이 퍽 갖고 싶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서 산을 올라온 길의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자하문이 있는 부암동이나 수성동계곡이 있는 옥인동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다. 역시나 대부분 데크와 계단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무릎관절만 조금 조심하면 내려가는 것은 훨씬 완만하고 수월하다. 산에서 내려오니 이른 저녁인 5시가 되어 함께 산행을 마친 부모님과 따끈따끈한 주전부리를 먹으려고 수성동 계곡도 구경할 겸 옥인동 방향으로 내려와서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옥인동에서 마을버스를 타도 되기는 하지만, 서촌의 아기자기한 저녁 풍경을 함께 보고 싶어 옥인동에서 통인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자리 잡고 있는 예쁘고 힙한 가게들을 천천히 구경하며 걸어서 내려갔다. 고로케를 좋아하는 아빠와 함께 서촌 금상고로케 한 박스를 사고 광화문 쪽으로 걸어 나오니 밤 조명이 예쁜 경복궁 담장과 광화문을 볼 수 있었고, 새로 개장한 광화문광장도 거닐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니는 어른이 되고 나서 일상의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쉽지 않은데, 등산은 비교적 쉽게 성취감을 가져다준다는 장점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등산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특히 인왕산의 경우 1~2시간 정도면 충분히 등산부터 하산까지 마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울의 대표적인 등린이 친화적인 산이라 하겠다. 결코 완만한 산은 아니지만,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쉽게 접근하기 좋고 오르는 시간 자체가 길지 않은 데다 오르고 내려오는 길까지 둘러본다면 반나절짜리 서울구경 코스로도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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