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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Jul 05. 2023

중학교 1학년, 일생일대의 선택

절교와 손절

갓 중학교를 입학한 아이들은 저마다 설레임과 걱정을 안고 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하면 어쩌지?’, 혹 ‘따돌림이라도 당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 가장 클 것이다. 나또한 그런 걱정을 안 해본 게 아니다.


같은 초등학교 출신 친구는 몇 명 없는데다 유일한 친구들은 모두 다른 반에 배정되며 정말 ‘새 친구’를 사귀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느 학기 초가 그렇듯, 자연스레 가까운 자리에 앉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지영(가명)외 몇 명과 어울려 함께 만화이야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며 즐겁게 지내던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 만다. 지영이 다른 반 친구와 싸우고 절교를 했는데 그 친구가 하필 나의 초등학교 친구 혜지(가명)였던 것이다.


지영은 아직 분이 안 풀린 듯 새침하게 말했다.


“얘들아 나 혜지랑 절교했어. 너희도 앞으로 걔랑 놀지마.”


당시 아이들에게 있어 친구라는 존재는 큰 것이어서, 서로에게 쉽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기동일시를 하게 된다. 그렇다보니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자신의 일인 듯 절교선언을 시작했다.


“당연하지! 너랑 절교면 우리랑도 절교지, 안 그래?”


“….”


그런데 문제는 아까 말했듯 내가 그 혜지라는 아이와 친구라는 것이었다. 선뜻 말을 못하고 있자 친구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렸던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미안하지만 나는 혜지랑도 친구여서 안 될 것 같아….”


우물쭈물 겨우 말을 끝내고 나니 친구들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어떻게 친구가 절교했다는데 절교를 안 할 수 있냐며 모두가 내게 면박 주었다. 그러고는 내일까지 절교안하면 자신들과 절교라며 못 박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고민했다. 아버지에게 이 고민을 이야기하자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해주셨다. 하나는 내가 절교하지 못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약 지영이네와 절교하는 상황이 내게 너무 힘들 것 같다면 그냥 혜지와 절교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나서서 해결해줄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두 가지 중 한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을 선택하고 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날 방과후, 빈 교실에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너희와 친구인 것처럼 혜지와도 친구여서 절교 하기는 어려워…. 그리고 너희와도 절교하고 싶지도 않아. 이해해줄 수 없을까?”


“xx!”


아무리 설득해보려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육두문자뿐이었다. 친구들, 친구였었던 아이들은 내게 때리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괜찮았다.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홀가분했다. 맘고생 하던 게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속이 시원해진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무리에서 낙오되어 혼자 다녀야 했다. 점심시간에도 혼자 급식실에 가서 밥을 먹었다. 주변에는 여러 명이서 밥을 먹는데 나는 혼자인 것이 조금 쓸쓸하기는 했지만, 눈치가 보인다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가끔은 다른 반에 있는 친구들과 밥을 먹기도 했다.


그러면 혜지랑은 어떻게 됐느냐? 그 일 이후, 왜인지 모르겠지만 혜지가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은 아직도 모르겠다. 결국 난 지영이네와도 혜지와도 절교를 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반 친구들과 절교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놀기도 했고, 혼자서도 잘 노는 편이었던지라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새 1학년이 금방 지나갔다.


요즘 관계의 단절을 뜻하는 ‘손절’의 등장과 함께 인간관계에도 트렌드가 생긴 듯하다. 손절이란 어릴 적부터 있던 절교의 뜻과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참다 참다 너무 힘들어서 관계를 끊는다는 점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손절도 점점 절교와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조금이라도 안 맞거나 불편하다 생각되어도 손절이라는 말로 쉽게 끊어낸다. 물론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그편이 편할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각종 SNS와 포털사이트에서 손절과 관련된 콘텐츠들을 쏟아내고 있다. ‘손절하는 방법’, ‘이런 사람과 손절하세요.’, ‘손절 체크리스트’등등 마치 손절을 장려하는 분위기다. 혹시 나도 손절 대상에 들어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본 적도 있다. 독이 되는 관계라는 것도 분명 존재하고, 그걸 끊어내는 방법이 필요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손절이라는 걸 안 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이 손절 하지 않아도 될 관계까지도 손절해 겪게 될 후폭풍은 모두 자신의 몫이다. 관계를 쉽게 끊는 사람은 언제든 자신도 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관계가 끊어질 때의 피로라는 것도 있기에 자신을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적당이가 중요하다.


은희경 작가님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좋아하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감정을 교류하다보면 마음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이해와 존중이 없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절교 사건은 단지 그 기한을 앞당긴 것일 뿐이다. 지금은 텍스트만으로도 혹시 무슨 고민이 있지는 않은지 기분을 묻고, 작은 일에도 마치 큰일을 해낸냥 함께 기뻐해주는 다정한 이들이 곁에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몇 번인가 사이가 안 좋아질 뻔 했던 적도 있지만, 서로를 끔찍이도 생각하는 좋은 친구들이다. 좋은 친구의 존재는 언제나 나를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만든다.


글을 쓰며 새삼 다정함이 얼마나 강한 에너지인지 느낀다. 상대방의 다정에 치유받기도 하지만, 스스로 다정함으로써 치유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정에는 마음을 데우는 온기가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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