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만 하소서
자다가 신물이 올라와서 깼다. 새벽엔 화장실을 가거나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매일 깬다. 통잠을 자 본 지가 10년이 넘은 것 같다.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누우면 토할 것 같고 앉아있으면 피곤해서 눕고 싶고.
진짜 이러다가 나 위장병으로 죽는 거 아니야? 문득 옆에서 곤히 자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두렵다. 그때 큰아들이 쿨럭쿨럭 기침을 한다. 반에 몇 명의 아이들이 열이 나 조퇴했다는데, 아들도 잠복기가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회사에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혹시 열이라도 나면 일하러 못 갈 텐데, 제발 아프지 마'
아이들의 건강마저도 나의 편의에 따라 판단하는 내 이기심에 흠칫했다.
미안해, 엄마가.
오늘은 회사소유 물건의 아랫집에서 누수로 민원을 제기해서 현장을 방문해야 한다. 쥐 나 바퀴벌레가 득실거리겠지? 뭘 가지고 가야 하나, 스프레이를 준비해 갈까? 새벽에 잠도 못 잤는데 고속도로를 달려야 할 오늘 출장이 걱정이다.
어제는 또 다른 민원으로 보고서를 써야 했는데 퇴근시간이 다가오도록 한 자도 적지 못하는 나를 보고 팀장이 화를 냈다. 내가 잘못했으니 꾸지람 듣는 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많이 지쳤는지 마음이 괴로웠다.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매일 일이 쌓이고 진척이 없다. 발만 동동 굴리고 성과는 없으니 관리자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할까.
박완서 선생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 책이 떠올랐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데려갔느냐, 신에게 질책하는 작가님 글을 회상하며,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을 수 있고 감내할 수 없는 어려움도 닥치기 마련이다,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힐난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뭐 이까짓 일로 그러느냐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박완서 작가님처럼 열심히 산 적이 있느냐,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느냐,
작가님이 감내해야 했던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깊이를 감히 짐작해 보며
나의 현실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