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회고
어릴 적에 사직공원 옆 작은 한옥에서 살았다. 뒷간이 대문 밖 왼쪽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마주 보이는 곳이 부엌이다. 부엌 위쪽에 다락방이 있다. 부엌에 딸린 작은 문을 열면 안방이 나온다. 이 문은 주로 밥상을 차릴 때 음식을 전달하는 통로이다. 장판이 타서 시꺼먼 아랫목에는 항상 아버지 저녁 밥 한 사발이 담요에 덮혀있었다. 안방을 나오면 서까래와 상량문이 보이는 거실이 이어지고 바로 문간방이 나온다. 마당은 여름에는 물을 가둬 물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이백 여 포기 김장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때는 푸세식 화장실이 대부분이라 똥 푸는 사람을 자주 마주쳤다. 좁은 골목길에서 양동이 가득 배설물을 가득 담고 양쪽 어깨에 지고 가는 아저씨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코를 막고 지나가기 일쑤인데 아저씨의 얼굴은 평온했다.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았다. 그래서 똥 푸는 날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오 남매 막내인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학교 들어가는 전쯤인 것 같다. 한 번은 화장실이 급한 데 아버지도 볼일을 보셔야 했다.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랑 함께 뒷간에 들어갔다. 화장지도 없던 시절이라 신문지를 A4 크기로 잘라서 휴지 대용으로 썼다. 신문지를 손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든 다음에 뒤를 닦았다. 두루마리 화장지로 어느 순간 바뀌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잠깐이긴 했지만 아버지와 나란히 앞뒤로 앉아서 똥을 누는 상황이 재미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이라 냄새가 심했을 텐데 그때의 기억이 좋게 남는 것을 보면 분명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육십 초반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계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만의 은밀한 추억이 되었다.
어릴 때는 사직공원이 내 놀이터였고 인왕산 자락이 내 보금자리였다. 아카시아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꽃을 따먹기도 하고 산길을 가로질러 학교에 가기도 했다. 습관적으로 돌멩이를 차면서 집에 오곤 해서 운동화 앞코가 성할 날이 없었다.
엄마가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시면 냅다 사직공원으로 뛰기 바빠서였을까 난 달리기를 잘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내내 육상선수로 뽑혔다. 덕분에 운동보다 공부가 더 쉽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열심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무난히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갔고 마음껏 활동하고 공부하면서 평생의 짝도 만났다. 친구 같은 남편에 덤으로 이해심 깊은 시댁 식구들도 얻었다. 또한 제 할 일 알아서 잘하는 훈남 아들도 두었다.
난 꽤 괜찮은 사람이다. 잘생긴 아버지를 닮았다면 예뻤을 테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봐 줄만 하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사람을 대할 때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 한다. 귀가 얇아서 잘 속기도 하지만 함부로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안다. 많이 가지려 욕심내지 않고 위보다는 아래를 보려고 언제나 마음을 다스린다.
반면에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못한다. 동시에 여러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지만 나 나름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나만 알기에 순정파가 될 수 있었고 하나만 알기에 비교하지 않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너무도 현실적이었기에 꿈을 크게 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 꿈이 좀 더 컸더라면 그만큼 더 노력했을 텐데... 내 나이 쉰 하고도 다섯 해이다. 평균 기대수명이 팔십은 넘으니까 앞으로 최소한 30년은 더 살지 싶다. 인생 이모작이라고 한다, 아직 내 인생의 후반기가 남아있다. 다시 한번 꿈을 꾸기에 늦지 않았다. 마음속에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무엇인지 차차 알아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