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지속적인 일상의 즐거움
12월 21일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했는데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임했다.
작업일지#3에서 강조했던 두 가지.
매일 작은 과정 하나라도 멈추지 않을 것.
판매 여부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작업의 지속성만을 생각할 것.
몸이 조금 아프더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바인더 보드 뒷면에 오염 방지용 마스킹 테이프를 붙인다던가, 캐릭터 바인더용 스티커를 미리 잘라놓는다던가 하는 단순 작업들 말이다. 바닥이나 작업대에 먼지를 닦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오늘까지 보낸 9일 동안 21개의 바인더를 제작했고, 그중 17개가 판매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기존에 만들었던 작품을 다시 만드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었는데, 비교적 재미있게 만든 작품들을 위주로 재제작을 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토토로의 '비 오는 밤 버스 정류장' 바인더는 늘 사랑받는 제품이고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 터라, 다시 제작하고 판매하는 데에 부담이 없었다. 게다가 메인 캐릭터 이외에 데코 스티커를 붙이거나 글리터로 장식하는 일들은 워낙 재미있는 작업이라, 마치 새로운 디자인을 하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사놓았던 스티커 중 쓸모 있는 것들을 골라내는 작업까지 덤으로 할 수 있었고, 판매를 위한 작업임과 동시에 재미를 위한 작업임을 새삼 깨달아갔다. 실수가 있어 B급 작품이 되면 그에 걸맞은 가격으로 판매했다.
중간중간 좀 더 생동감 있는 채색이나 느낌 표현이 필요할 때에는 넷플릭스를 틀어 애니메이션을 다시 감상했다. 특히 지브리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예상치 못한 큰 위안을 받았는데, 최근 한 달간의 내가 감정적으로 꽤 지쳐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애니메이션 안의 메시지들 즉,
사람과 동물과 사물에 대한 애정, 공동선의 가치, 작은 것들의 소중함 등은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되어 가슴 안쪽이 건드렸다. 그들을 보면서 웃거나 울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낼 때마다 작업은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잡념이나 망상이 사라진다고나 할까.. 온전히 지금하고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난주에 이전 직장의 대표님이 찾아오셔서 점심식사를 했다.
근황도 물어보시고 바인더도 하나 구입해 가셨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넌지시 현재 수입을 물어보셨는데, 내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 정도 벌 거면 그냥 알바를 하는 게 낫지 않나? "
'아뇨, 제 나이와 경력으로는 알바를 한다고 해도 지금을 이 정도밖에 벌지 못한답니다'
라고 대답하고 웃으며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의 산책으로, 그 순간 느낀 약간의 불쾌함에 대한 이해가 끝났다.
나 역시 했었던 고민을 남의 잣대와 남의 입으로 전해 들은 게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예,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하고, 그에 대해 스스로 사유해 보고 잘 지나치면 된다.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우면 그 또한 그대로 느끼고, 내가 원하는 작업은 계속해 나간다.
점과 선으로 길을 만들어 가며 매일을 그저 평온한 행복으로 이어가는 것.
이것이 현재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