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관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다정 Nov 23. 2022

어른의 연애라는 게 있습니까?

엄마의 연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늦은 밤, 지운과 함께 저녁을 먹고 늘어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뭐야, 이 시간에 무섭게. 누구야?"


 지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발끝으로 타다닥 현관으로 달려가 외시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엄만데?"


 빠르게 문을 열자 엄마가 아휴 아휴 지운이도 있었니? 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이 시각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엄마에게서 저녁의 한기가 느껴졌다. 


 "엥? 무슨 일이야 이 시각에?"

 "아휴, 아저씨가 회식하고 왔다고 문을 안 열어주잖아.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나와 눈이 마주친 지운은 큭큭 웃었다. 엄마는 우리 앞에 툭 앉았고, 엄마를 보는 네 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 무슨 재밌는 일이에요. 이야기를 해보세요. 하고 눈으로 말하는 우리 둘을 보는 엄마가 입을 연다.


 "아니, 내가 오늘 분명 회식이라고 말했거든. 근데 너네도 알다시피 엄마 일하는 데는 남자 직원들이 대부분이잖아. 근데 본인이 생각한 거보다 늦었다 이거지.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문도 죄다 걸어 잠가서 열리지도 않는데 어떡해. 밖에 서 있을 수도 없고 온 거지."

 "푸하하 뭐야 엄마 우리나 할 법한 연애를 하고 있어!"


 우리는 계속 깔깔대고 웃었고, 엄마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 얼마나 잘 삐치는 줄 알아? 엄마도 집착이 좀 있잖아, 근데 아저씨는 말도 마 맨날 삐쳐서 뭐만 하면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진짜 열받아서!"


 화를 삭이며 씩씩 거리는 엄마의 전화가 울렸다. 아저씨였다. 집 앞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엄마가 몇 번 문고리를 돌려보더니 사라졌으니 아저씨도 초조했으리라. 다정이 집이라고, 당신이 문을 안 열여 줬으니까 안 들어갈 거라고 이야기하는 엄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기 너머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어오기만 해 봐! 내가 어? 내가! 다정이 집 문 앞에서 목매달아 죽을 거야!]

 "아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우리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아저씨는 엄마를 너무 잘 아는구나. 엄마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딸, 하필이면 딸네 집 문 앞에서 목을 맬거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 아저씨가 패기 넘치는 청년처럼 느껴졌다. 아저씨, 왜 엄마를 쫓아내고 그러세요, 하고 웃으며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내 목소리에 엄마는 힘을 더 얻었는지,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쳤고 머쓱해진 아저씨는 어서 집으로 들어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지운과 나는 그게 재밌어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고 엄마는 그제야 딸과 딸의 친구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는지 차 키를 집어 들며 집에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늘 그렇듯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갔다. 엄마는 ‘아저씨가 또 문 안 열어주거든 다시 오세요!’ 하고 외치는 지운과 ‘야! 우리 집 문 앞에서 아저씨 목매달면 어떡해!’ 하며 웃는 나를 보며 '지지배들…' 하고 눈을 흘기며 돌아갔다.


 우리는 집으로 올라와서도 한참을 웃었다. 아니 이십 대도 아니고 아직도 저럴 열정이 있다는 거야? 나는 정말 그게 신기해. 그러니까 말야. 아저씨는 어떻게 너네 집 문 앞에서 목 매달 거란 소리를 하시냐, 진짜 재밌어. 그날의 가장 재밌는 이야기는 단연코 엄마의 연애 이야기였다.






 엄마는 이혼 후, 내게 사람에게는 평생 쏟아부을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막내며느리였지만 시부모님을 모셨고, 편찮으신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었다. 너무 열심히 시댁에 헌신해서 이제는 다른 누구와 재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남편의 부모에게 그렇게 잘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연애는 다른 모양이었다. 어디서 에너지가 샘솟는지 더는 젊지 않은 엄마지만 완전한 소녀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다투고, 또 화해하며 우리 또래가 할 법한 귀여운 연애를 했다. 거기에 더해진 것이 있다면, 엄마에겐 자신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자식이 둘 있었고, 결혼을 해 본적도, 자식을 낳아본 적도 없는 아저씨는 당당히 네가 나를 힘들게 한다면 나는 네 딸에게 아주 무서운 짓을 하겠다! 하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나는 사실 아저씨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말이 무시무시한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필요 없는 말이라고는 잘하지 않는 과묵한 아저씨를 알아서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어도 애인 앞에서 보이는 아이 같은 모습이 있구나 싶어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아저씨가 괴롭히거든 나한테 이르라고, 내가 아주 혼을 내주겠다고 이야기하고, 엄마는 내 편이 이렇게 있는데! 하는 마음으로 아저씨에게 가서 큰 소리를 치고, 모녀가 아주 편을 먹어서 무섭다고 투덜대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른들도 사랑 앞에선 별 수 없구나. 그냥 똑같은 사람들이구나. 


 사랑, 얼마나 좋은가. 나는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역경의 연속인 인생에서 사람을 단단히 잡아 줄 뿌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가, 혼자 있는 친구들이,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사랑을 하며 살면 좋겠다.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둘에게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며, 힘들 때 기대기도 하고, 넘어지고 주저앉을 때 일으켜 주고 이끌어주며 그렇게 잘, 살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장 난 어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