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일까요? 아닐까요? 내키는 대로 쓰겠읍니다>
새벽 2시가 지나면 괜히 속이 쓰릴만큼 배고파진다. 선반 위에 누워있는 삼양라면이 있다. 이 자식은 분명 인덕션으로 달군 뜨끈한 냄비물로 목욕할 생각에 신나 몸을 바스락거리지만, 그런 거 없다. 오늘 네가 봉사할 모습은 스프를 간단히 뿌린 생라면이다. 뿌셔뿌셔처럼 먹다간 여자친구에게 야단맞기 일쑤지만, 이 일순의 희열을 감히 참을 수 없는 그런 마법의 시간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냉장고에 있는 사이다로 입가심을 마치고 맥 앞에 앉아 로직을 킨다. 곡을 안 쓴 지 너무 오래되었다. 벌써 두 달째.
그런 의욕이 없는 내게 여자친구가 자기가 직접 접은 종이비행기에 가사를 적어서 건네주었다. 파이로트 이로시즈쿠 잉크로 적은 예쁜 보라색 글씨다. 그렇다면 나는 답례로 '개쩌는 곡을 써줘야지'라는 생각보다, 이번 달 안에 밀린 월세를 합쳐 70만 원을 네 계좌에 꽂아주겠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진다. 나를 돕는 이에 대한 예술적인 아웃풋으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 아닌, 금전적인 채무를 상환하는 것이 더 사람 된 도리라 우선시하는 것이다. 의뢰인에게 공감을 거부하는 이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 얼마나 파렴치한지.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사회를 모르는 학창 시절, 어른들이 지나가듯 얘기한 것들은 구라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사람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간단하지만 복잡하고, 힘들다. 물론 멋진 곡은 만들고 싶지만.
밀린 월세와 이 번치 월세까지 입금을 마치고 다시 홀쭉해진 내 계좌를 보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은, 세상 앞에 쫄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는 것이다. 처음에는 일렉기타 관련 장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초심자의 입장에 맞추어 정보성 글을 쓰려했다. 물론 생각나면 더 쓰고 싶다. 왜냐면 나는 장비를 정말 정말 좋아한다. 누가 내게 이펙터를 하나 쥐여주고 리뷰글을 써 주는 조건으로 7만 원을 부른다면, 나는 찢어진 입꼬리를 꿰맬 틈도 없이 히죽거리며 반나절만에 전공 교수처럼 멋들어지게 작성할 자신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내 신세를 한탄하는 게 사실 더 재밌다. 글을 투고하고, 1~2주가 지나고 생활고로 인한 현자타임이 내 전두엽을 울리면, 그냥 이런 찌질대는 글을 쓰는 것이다. 자존심 높은 한량이 가질 수 있는 순간의 재미.
가난의 고통은 파블로프의 개가 흘리는 침과 같다. 그렇게 나는 굉장히 반사적이고 능동적으로 내 가난과 하잘것없는 감상을 '에세이'라는 멋진 포장지로 꾸며낸다. 사실 요새 무능력하다고 느끼는 스스로를 가난한 뮤지션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맞는 것인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애초에 스스로 그렇게 능력 있는 뮤지션이라고 자신하지 않는다. 갑자기 이렇게 찌질거림의 기운이 가득한 에세이를 무언가에 휘둘려 쓰는 것처럼, 본능적인 촉이 노래를 만들 때도 다가온다면 참 좋을 텐데. 실리콘 코킹이 들뜬 장판을 바라보니 춘곤증이 몰려온다. 짐승이 따로 없다.
아, 오늘은 Oxford Inflator가 75% 할인하는 날이란다. 옛날 플러그인이지만, 현대에도 취급이 좋은 믹싱 꿀템이다. 샘플을 들어보면 사고는 싶은데... 식대를 아끼려고 아르바이트하는 곳까지 웬만하면 버스를 타지 않는 내게 사치처럼 느껴진다. 진라면 50 봉지와 맞바꿀 가치가 있는 것인가. 생각을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