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나를 만든 시간, 흙이 되어준 사람들

제2장 도시의 숲 속에서, 홀로 서는 법을 배우다

by 조영빈

서울 마장동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던 소년 시절의 기억은, 버스의 흔들거림과 함께 심장을 짓누르던 무거운 책임감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 가족의 기대를 모두 짊어지고 떠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선 도시의 생존법은 그보다 더 혹독하고 치열한 분투를 요구했다. 스무 살을 넘긴 청년 시절, 나는 ‘고졸’이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과 싸우며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먼지 자욱한 일터의 낮과 스탠드 불빛 아래의 밤이 뒤섞였던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시간들.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차례로 밟아 나가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뒤처지거나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거대한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골의 소년이 낯선 도시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뿌리내리기까지, 나의 청춘은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결국 성실한 노력만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구원임을 배워가는 고독한 과정이었다.


1. 도시의 문을 두드리다


가족의 희망을 싣고 떠난 서울행 버스

어린 시절의 끝자락에서, 서울 마장동으로 향하던 시외버스의 흔들림은 내 마음속 깊은 무게감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단지 한 소년의 홀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아들의 앞날을 위해 모든 것을 건 가족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진 삶의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나의 학업을 위해 자신들이 누려야 할 많은 것들을 기꺼이 포기했다. 고향에서 묵묵히 땀 흘려 번 돈은 고스란히 나의 학비가 되었고, 나는 그 헌신 위에 쌓인 길을 걸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서울행이었다.


가족들이 보여준 그 맹목적인 사랑과 지지는 나에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단단한 족쇄이자, 동시에 낯선 도시에서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땀이 닦아준 길이다.”


서울 전학 과정은 쉽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전학 절차를 밟았지만, 서울의 학교는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결원이 생겨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 속에서 기다림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주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으로 교무실 문을 열었을 때, 차가운 질문 하나가 내 가슴을 찔렀다.

“너희 집 부자냐? 서울 가려면 아버지 논 다 팔아야 한다. 괜찮겠냐?”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우리 집은 결코 부자가 아니었다. 내 전학은 아버지의 논을 팔아서가 아니라, 온 가족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만들어준 기회였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린 나이에 그 복잡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아버지의 논을 팔지 않아도,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 기다림은 무려 두 해를 넘겼다. 1974년 봄, 마침내 서울 한양중학교로 전학이 허가되었다. 시골 버스의 딱딱한 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고향의 논과 산이 빠르게 스쳐갔다. 멀어질수록 가슴이 조여왔고,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였다.


서울에 첫발을 디딘 날, 내 코를 찔렀던 것은 매캐한 매연 냄새였다. 눈앞에는 하늘 끝까지 솟은 빌딩들, 귀에는 낯선 소음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나는 그 속에서 완전히 이방인이었다.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은 잊었지만, 지금도 결코 잊지 못하는 숫자가 있다. 바로 청평중학교에서 한양중학교로 전학온 일자와 연합고사 수험번호.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가족들의 희생과 나의 책임이 새겨진 첫 번째 생의 이정표였다.


2. 서울에서의 학교생활


서울에서의 학교생활은 새로움에 대한 희미한 설렘과 그보다 훨씬 깊은 외로움의 감정으로 시작되었다. 시골 말투를 쓰는 ‘촌놈’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왕십리 자취방에서 동대문운동장 앞 학교까지 매일 가방 하나를 메고 혼자 걸었다.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였지만 그 속의 나는 섬처럼 고립된 존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도 눈을 마주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도시는 인파로 넘쳐났지만, 나는 오히려 숨 막히는 고독 속에 갇혀 있었다.


첫 실패와 각성 ― “38등”의 자극


첫 시험 결과는 참담했다.

성적표에 적힌 ‘38등’이라는 숫자는 차가운 낙인처럼 가슴에 새겨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 현실은 충격이었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한꺼번에 솟구쳤다. 그날 이후 나는 결심했다.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나 혼자 이겨내겠다.”


남들은 부모의 지원을 받아 과외나 학원에 다녔지만 나는 오직 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버텨야 했다. 밤늦게 자취방에 돌아와 낡은 책상 앞에 앉아 깜박거리는 형광등 아래에서 공식과 단어를 수십 번씩 써내려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2학기 기말고사였다. 시험 결과 발표 날,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다.

“10등.”

완벽하진 않았지만, 처음으로 스스로 얻은 성취의 순간이었다. 담임선생님의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잘했어, 수고했다.”

그 따뜻한 말 한마디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을 녹여준 첫 격려의 불빛이었다.


짐을 덜기 위한 선택 ― 상업고등학교로 가다

중학교 3학년말 담임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너는 인문계로 가야지.”

하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상고(상업고등학교)로 갈 겁니다.”

그것은 공부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빨리 졸업해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가족들의 지친 어깨를 덜어주는 길이라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세상을 너무 좁게 보았던 선택이지만, 그때의 나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가족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자.”


덕수상고에 입학하자마자 결핵성 늑막염 진단을 받았다. 한창 희망이 움트던 시절,병은 내 몸뿐 아니라 마음의 빛마저 갉아먹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1년은 긴 병상에서 흘러갔다.


연이은 좌절, 그리고 친구들의 위로

겨울의 끝자락, 인생의 첫 큰 시험이 다가왔다. 한국은행 입행 면접 날, 긴장한 나머지 수험표를 두고 나오는 실수를 했다. 면접관이 가족 관계와 집안 형편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족들이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뒷바라지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끝내 당당하게 꺼내지 못했다.

가난한 배경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 가족들의 숭고한 헌신을 감추고 싶어 했던 그 순간의 비겁함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이후 응시한 산업은행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덕수상고 전교 석차 5위였던 내가 연이어 탈락했다는 소식은 개인적 실패를 넘어 학교 안의 ‘사건’처럼 회자됐다. 공식적 이유는 건강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실력이 부족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던 날, 교실 창가에 앉아 명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이 내 앞에 단단한 문을 닫아버린 듯한 절망감. 그때 내 어깨를 두드려준 것은 다름 아닌 친구들의 손이었다.

“괜찮아, 다시 하면 돼.”

그 짧은 위로의 말이 모든 것이 무너진 마음속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씨앗이 되어 주었다.


상처의 순간 ― 무대 아래 굳어버린 부모님의 얼굴

설상가상으로, 졸업식 날 나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겪어야 했다. 전날 담임선생님께 "전교 5등으로 우수 졸업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기에, 시골에서 한 걸음에 올라오신 부모님도 식장에 함께하셨다. 부모님은 행사장 객석에 앉아, 곧 무대 위에서 호명될 아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기대하며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그러나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식이 끝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일부 교사들이 “취업이 되지 않은 학생에게 상을 주는 것은 학교의 명예에 좋지 않다” 는 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상장을 받지 못한 일보다 더 아팠던 것은, 무대 아래에서 부모님의 표정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기대와 자부심으로 빛나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가며 당혹과 실망으로 변해가는 모습.

그 장면은 내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혔다. 졸업식장을 나서며 올려다본 겨울 하늘은 잔인할 만큼 맑고 푸르렀다. 그 눈부신 색이 오히려 내 마음의 회색빛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성찰의 시간 ― 따뜻한 격려의 가능성을 떠올리며

세월이 흘러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쓴맛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 당시 학교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졸업생의 취업률이 중요한 시대였고, 교사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그때 학교가 현실의 냉정한 기준 대신, 좌절한 학생에게 따뜻한 격려의 상 하나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 소년의 회색빛 마음은 조금 덜 무너졌을 것이다. 푸른 하늘을 원망하기보다, 세상을 다시 믿을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지금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한 사람의 따뜻한 말, 한 번의 포용이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3. 치열한 경쟁과 주경야독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맞닥뜨린 일련의 실패들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다른 길로 밀어 넣는 힘이 되었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국제화재해상보험에 입사했다. 비록 꿈꾸던 ‘멋진 은행원’의 길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생은 미리 설계된 노선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돌이켜보면, 그때 은행에 떨어진 일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만약 그때 그 자리에 안주했다면, 나는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기치 못한 실패는 끊임없이 나를 다그쳤고, 그 실패들이야말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주경야독의 시간 ― 이름으로 당당히 서기 위한 싸움

그러나 '고졸'이라는 꼬리표와 대졸 동료들 사이에서 느끼는 보이지 않는 열등감은, 늘 나를 가로막는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해 나는 다시 책을 들었다. 낮에는 잿빛 사무실에서 서류와 씨름했고, 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남대문에서 전농동의 서울시립대까지, 매일 밤 야간 강의실로 향했다.


그 시절의 나는 ‘하루하루를 버텼다’는 말이 딱 맞았다. 쏟아지는 졸음 속에서도, “내 이름과 실력으로 당당히 살고 싶다.”는 단 한 가지 열망으로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특히 군 문제로 인한 1년간의 휴학은 내 인생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앞서가는 모습을 보며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렸지만, 그 외로움을 버티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3주간의 군사훈련은 내게 처음으로 책에서만 배웠던 ‘사회’라는 거대한 개념을 직접 체험하게 했다.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조직, 질서, 책임, 협력의 의미를 몸으로 배웠고, 그때부터 “이 거대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내 삶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병역의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 나는 다시 멈춰 있던 주경야독의 길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졸업식 날, 지금의 아내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문득 창밖의 도시 불빛을 바라보다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의 슬픔, 외로움, 그리고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 나는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조용히 울었다.”

그해 가을, 나는 아내와 결혼했고, 안정된 사회생활의 토대를 쌓았다. 하지만 내 안의 배움에 대한 갈증은 멈추지 않았다. 그 열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4년 후, 나는 다시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석사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학생. 또다시 주경야독의 치열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상처 위에 피어난 치유의 씨앗 ― 도시의 시간이 남긴 유산

이제 돌아보면, 그 치열했던 도시의 시간들이야말로 내 치유농장으로 이어진 가장 깊은 뿌리였다.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받고 보이지 않는 낙인에 시달렸던 경험은, 역설적으로 '경쟁'보다 '협력'의 가치를, '성과'보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

그 외롭고 고단했던 시간의 상처 위에서, 나는 "누구나 자신의 상처와 배경을 안고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공간"을 간절히 꿈꾸었다.

도시는 내게 냉혹하고 척박한 땅이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절망 대신 뿌리내리는 법을 배웠다. 그랬기에 나의 농장은, 상처받고 지친 이들이 각자의 속도로 새싹을 틔울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는 곳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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