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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성인 Sep 24. 2023

우울한 행복

교차되는 감정 - 6

 코피노와 관련된 이야기는 뉴스 기사가 전부였다. 필리핀에 여행을 간 남성들이 현지 여성과 콘돔 없는 섹스를 한다. 여성이 임신을 하면 한국 남자는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다시 살아간다. 버려진 필리핀 여자는 한국 남자를 기다리며 아이를 출산한다. 태어난 혼혈 아이는 친아빠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인생을 산다. 그런 혼혈아를 코피노라고 부른다.


뉴스에선 코피노가 주로 하층민에 속한다고 했는데 스테파니는 한국으로 대학까지 오는 코피노였다. 최소 중산층 이상이라는 말이었다. 예민할 수 있는 호기심이었지만 술기운을 빌려 집안에 돈이 많은지 물어봤다.


"나 틴에이지일 때 할아버지 죽었어. 삼촌들 마닐라에 있고 엄마가 골프샵 했고 한국어 잘해서 사람 많이 왔지. 그래서 중간보다 잘살았어"

"한국엔 왜 온 거야"

"엄마가 말했는데 공부 한국에서 하라고"


 무엇인가 모를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얼굴도 모르는 친부의 국가에서 공부를 하는 그녀를 동정했다. 오후 9시가 넘어가는 가을밤의 어두움은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덕분에 내가 상상한 대로 스테파니의 표정을 그릴 수 있었다. 어두움 속 내 눈에 그려진 그녀의 표정은 매력적이었다.


"엄마 한국말 잘해서 나에게 한국말 교육했어. 엘리멘트리 스쿨 때에서부터"

 스테파니가 말을 이어갔다.

"골프샵 한국인들이랑도 한국말로 친해지고 사람들한테 그 사람 많이 물어봤어. 근데 다 모른다 했어. 엄마 물어보지 말라했는데 그래도 계속 물어봤지. 궁금하잖아"

"아빠를 보고 싶었던 거야?"

 책상 앞으로 몸을 좀 숙이며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진 내가 물었다. 스테파니의 얼굴 굴곡이 어렴풋이 보였다.

"으으음 보고 싶었던 거... 그건 잘 몰라. 그냥 궁금만 했어"

 스테파니는 머리를 긁었다.

"엄마는 좋아했어. 한국에서 공부하면 돈 더 가질 수 있어서. 삼촌들은 싫어했지만"


 말을 마친 스테파니는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다. 자취방 문을 열면 보이는 왼편의 문은 화장실문이다. 화장실은 불을 켜야지 환풍기가 돌아갔다. 샤워를 자주 하는 나로선 화장실 불을 자주 켜놓을 수밖에 없었다. 닫힌 화장실 문이 열렸고 백색의 형광등 빛이 문 앞의 스테파니에게 쏟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었던 스테파니였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당황했는지 두 눈을 찡그려 감았다. 나 역시 눈이 부셨다. 그녀는 화장실 문을 닫았고 볼일을 보았다. 또르르 소변이 떨어지는 소리가 웅웅 거리는 환풍기 소리에 얹혔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시티팝이 나오는 스테파니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잠금화면에선 음악이 재생되고 있었고 피카소 스타일로 그려진 보라색 나비가 칼날 위에 앉아있는 앨범 재킷이 보였다. 연락이 두 군데서 와있었다. '근로장학생 과장님'과 '서원이'의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아이폰이 아닌 갤럭시를 쓰는 스테파니였기에 가장 최근에 온 메시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상태바를 내려보니 근로장학생 과장님에겐 '내일 학생취업지원처에서 받아오는 서류 기억해요'라고 메시지가 와있었고, 서원이에겐 '??'라고 연락이 와있었다. 비밀번호는 따로 설정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잠금화면을 풀고 배경화면만 보았다. 모르는 여자 두 명과 찍은 셀카였다. 한국인 친구 두 명인 것 같았다. 둘 다 피부가 하얀 편이었고 상대적으로 스테파니가 더 까매 보였다. 자기가 외국인이란 것을 잘 드러내는 그런 사진이었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핸드폰을 원래 위치에 내려놨다. 백색 빛이 다시 쏟아졌다. 화장실 문을 열고 스테파니가 나왔다. 문을 살짝 열어두고 나와서 아까와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어둠이었다.


"사무실에서 일은 왜 해?"

 근장 과장님을 생각하며 내가 질문했다.

"스콜러쉽 나오잖아"

 화장실을 갈 때와 같이 휘청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는 그녀가 대답했다.

"안 힘드나 그거"

"처음엔 어려웠는데 친구들 생겨서 괜찮아"

"장학금은 얼마나 나오길래. 스콜러쉽 말이야"

"오십만원? 한 달에"

 천장 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잠깐 생각하던 그녀가 대답했다. "나 딱 알맞아. 그 정도면"


 반의 반 병 정도 남은 와인병을 들었다. 그녀가 와인잔을 내밀었다. 와인잔에는 내가 아까 따른 와인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엥 아직 있다"

 그녀가 다시 와인잔을 가져가 와인을 마셨다. 나는 내 머그잔에 와인을 따랐다.

"찬준 얼굴 빨개"

 그녀가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취했나 봐"

 나는 오른손으로 오른쪽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만 마셔?"

"그럴까?"

 남은 와인이 아까웠다.

"아직 남았어 근데"

 그녀가 와인병을 들고 흔들었다.

"그럼 그거 다 마시자"

 내가 말했다.


"등 기대서 앉을래"

 내가 앉은 쪽은 벽과 가까웠다. 그녀가 앉은 채로 엉덩이를 끄시면서 내가 앉은 쪽으로 왔다. 등을 벽에 기댄 뒤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앉았다.

"찬준은 학교 어때?"

 그녀가 질문했다.

"그냥 그래"

 내 머그잔에 와인을 살짝 많이 따르며 내가 대답했다.

"그런 게 어딨어. 좋다랑 나쁜 거 두 개지"

 내 등을 찰싹 때리는 그녀였다.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음이 나왔다.

"진짜야. 별 거 없어"

 스테파니 쪽으로 돌아앉았다. 흰 양말을 신은 스테파니의 두 발이 내 왼쪽 허벅지와 가까웠다. 사뼈가 보였다.


"난 좋아"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검은색 니트와 대비되었다. "친구들, 사람들 아는 거 재밌어"

"친구 많아?"

 내가 물어봤다.

"응 많아"

"남자친구는?"

 머그잔을 입에 가져가며 내가 물었다.

"나 남자친구 없는데"

 스테파니는 허리를 숙여 스트레칭을 했다. 발끝에 손이 닿았다. 왼손이 내 왼쪽 허벅지를 스쳤다. "한국인 남자친구 싫어"


 그녀가 다시 허리를 피며 벽에 등을 기댔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구나"

 씁쓸했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아니,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마 티 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내가 다시 질문했다.


 그녀는 날 빤히 쳐다봤다. 미소를 짓곤 있었지만 나를 꿰뚫어 보는 눈빛이었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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