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고 노래 들으면 좋아. 더 센시티브해지고 더 강해져”
핸드폰 불빛 때문에 웅크려 앉은 실루엣 정도만 보이는 스테파니가 말했다.
“이 노래 좋아해?”
나는 질문한 뒤 오른손으로 머그잔을 들고 와인을 크게 들이켰다.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못 알아듣는 노래 좋아. 가사 없는 거보다 있는데 내가 못 알아듣는 거”
“왜?”
“무슨 말하는지 모르는데 노래는 계속 말하고 있잖아. 나는 그냥 듣고 있으니까 무시하고 포기하게 돼 마음을. 일할 때랑 공부할 때는 그러면 안 되는데 술 하고 노래 들으면 그래도 되는 것처럼 느낀다 나”
눈이 어둠에 서서히 적응해 갔고 스테파니는 와인잔의 와인을 전부 들이켰다. “불도 꺼서 좋아. 안 보이면 더 노래 듣게 되고 더 못 알아들으니까, 무시하니까”
“그냥 가사 없는 노래 들어도 되잖아”
영화 음악 같은 것을 생각하며 물어봤다.
“그건 목소리가 없어서 비어있어. 무시가 안 되는 노래야 그런 거”
취해서 약간 어눌한 발음으로 느릿느릿 말하는 스테파니가 귀여웠다. 하지만 불이 꺼져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순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고 어두운 자취방에 남녀 둘이 앉아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자 언제부터 퍼져 있었는지 모를 야릇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해석되지 않는 가사와 듣기 좋은 멜로디가 동시에 들린다는 것은 가사 또한 또 다른 멜로디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뒤 노래에 집중하니 두 개의 노래를 동시에 재생한 느낌이 들었고 이전까지 음악을 들으며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들었다.
“한국 노래는 전부 알아들어?”
“다는 아니야”
Plastic Love가 끝났고 비슷한 분위기의 시티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난 한국어 말고는 그나마 영어를 좀 아는데 그렇다고 팝송을 다 알아듣진 않아”
와인병을 들어 보니 아직 절반 정도 남아있었다. 내 잔에 와인을 조금 따랐다.
“나도 줘”
웅크린 자세를 풀고 스테파니는 나에게 가까이 왔다. 먹다 남아 식은 파스타 한 그릇과 다 먹은 접시 하나, 2개의 포크, 2개의 스푼이 올려져 있는 앉은뱅이책상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그녀의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찬준 사실 나..”
와인잔을 조금씩 흔들며 스테파니는 머뭇거렸다. 암순응이 됐긴 했어도 얼굴 표정까지 세세히 보이진 않았다.
“어 말해”
“나 아빠가 한국인이야”
“오”
약간 놀랐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딱히 놀랄 일은 아니란 생각이 뒤따랐다. “그래서 한국말 잘하는 건가? 아버지가 잘 알려주셨나 봐”
“아니야”
스테파니는 핸드폰의 음량을 낮췄다. 음악의 소리가 작아졌다.
“나 할아버지랑 엄마가 골프샵 하나 해. 그래서 골프 여행하는 한국인들 많이 봤어. 다 돈 많은 사람이었고 돈도 많이 냈지. 그래서 그 사람들 할아버지랑 친해졌었대”
스테파니는 취했는지 접시를 한쪽으로 밀고 책상에 팔꿈치를 올려 왼손을 받쳐 턱을 괴었다.
“엄마도 할아버지랑 같이 일하면서 돈 벌었는데 엄마 어렸어서 할아버지가 한국말 많이 교육했어. 오는 사람들도 한국인이고 틴에이저가 한국말하면서 인사하는 거 골프샵에도 보기 좋으니깐... 이 노래 말고 다른 거”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다른 노래를 틀었다. 여전히 일본 시티팝이었고 핸드폰 불빛에 비친 금빛의 머리카락이 윤슬처럼 반짝였다. 얼굴은 붉었지만 눈은 눈꺼풀이 살짝 내려왔을 뿐 똑같았다.
“그래서 한국말 배우는 엄마가 점점 샵에 오래 있었어. 방학 때는 할아버지랑 계속 같이 있는 시간 많고 한국인들이랑 같이 있는 시간 많았어. 한국인들 다 잘해줬대. 엄마는 이쁘거든. 할아버지 나이 들어서 힘들었대. 그래서 엄마가 어른 되고 일했어 골프샵에서. 하지만 삼촌들이만 대학 가고 엄마는 일해서 엄마가 싫었대. 공부하는 거 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그래도 골프샵 일 잘하고 한국어 잘해서 한국인들이가 많이 왔지. 오는 한국인 중에 엄마한테 말 많이 하는 사람 있었다. 물건은 많이 안 사고 엄마랑 대화하는 거 많이 했대. 키 작은데 눈이 동그랬대 골프공처럼."
스테파니는 말을 하며 점점 더 취하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진 않았으나 말투는 아까보다 더 어눌했고 턱을 괴던 왼손은 말에 실감 나는 효과를 주기 위한 도구로 변신하여 오른손과 함께 허공에서 휘적이고 있었다. 와인을 더 이상 마시진 않았다.
“그 사람이 엄마 좋아한다고 말했어. 엄마 처음엔 싫었대.”
노래가 바뀌었다, 박자가 빠른 시티팝이 들렸다.
“왜 싫었대? 키가 작아선가”
머그잔의 와인을 들이키며 내가 물었다.
“우음 그거 기억 안 나. 그냥 싫었나 봐. 근데 엄청 싫은 건 아니어서 그 한국인 그다음번에 올 때 좋다고 했을 땐 자기도 좋다고 말했대”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바라봤을 때 스테파니는 어깨를 크게 으쓱하면서 입고 있던 검은색 니트의 소매를 걷었다.
“다음번?”
“그 사람 골프하러 많이 오는 사람이야. 그래서 골프샵 많이 알고 우리 골프샵에도 많이 왔어.”
포크와 스푼을 집어 파스타 접시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내게 자꾸 기다리라 하며 3분 가까이를 두 식기의 평행을 맞추는데 열중했다. 취했을 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다 됐다. 찬준 나 이거 잘했지?”
“응 잘 맞게 됐어”
머그잔을 완전히 비우며 내가 말했다. 나도 취한 것이 확실하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내가 말했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취한 상태에서 이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3분간 포크만 쳐다보던 스테파니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빠 이야기했어”
하지만 그녀는 기억해 냈다. 또한 취해서인지 스테파니가 말하는 아빠라는 단어에 냉소적 원망과 그리움이 묻어있진 않았다. “내 아빠 다시 필리핀 와서 엄마랑 만났어. 골프샵 아니고 마닐라 가서 데이트 많이 했어. 돈 많아서 엄마 바라는 거 많이 사줬대”
“한국을 갔다가 다시 필리핀으로 왔다고?
내가 되물었다.
“응응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사업하는 사람이네”
내 혼잣말이었다.
“사업?”
그녀가 되물었다.
“비즈니스”
“으음 맞아. 자기 CEO라고 엄마한테 말했어. 찬준 잘 안다!”
한 손을 쭉 뻗어 내 눈앞에 엄지를 올려 보였다. 손을 뻗으며 가지런히 정리한 포크와 스푼이 다시 흐트러졌지만 스테파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면 인지하지 못했던 거였을 수도 있다.
“엄마는 한국 가서 살고 싶었나 봐. 그 사람이랑 섹스하면서 결혼은 언제냐고 많이 물어보고 한국 가자고 하면서. 그 사람도 알겠다고 계속 많이 말했어. 그래서 엄마는 좋았다? 삼촌들 공부해도 자기는 사랑 만나서 다른 나라에서 사는 거여서.”
노래가 또 바뀌었다. 아까와 같은 목소리의 가수에다 박자가 조금 느려진 시티팝이었다.
“할아버지한테는 말 안 했대. 그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해서. 엄마 그 사람한테 왜 그걸 물어봤는진 나도 몰라. 엄마 바보야”
바보를 말하며 그녀는 키득거렸다. 아마 보조개가 보이는 웃음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 필리핀 두 번 왔어 일 년에. 그래서 그다음에 왔을 때 엄마 임신했었어 나를. 그래서 그 사람한테 말했는데 놀랐고 잘됐다고 했대. 할아버지 그때까지 여전히 몰랐어. 근데 그 사람 그다음부터 안 왔고 아예 사라졌대. 그동안 골프샵 오면 그 사람이 먼저 보이는 거만 했어서 연결도 없고 폰넘버도 없었지.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예 몰라”
한숨을 쉬는 그녀였다.
“할아버지 엄마 때리고 삼촌들 화났대. 한국이랑 달라서 필리핀은 뱃속 아기 못 죽이거든. 그래서 할아버지 다시 골프샵 일하고 엄마 쉬었어. 그렇게 나 탄생했어. 스테파니 리베라 산토스.”
자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어색한 한국어 문법으로 이야기한 그녀였다. 그녀의 과거를 들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녀의 이름이었다.
“스테파니 리베라 산토스, 그게 풀네임이지?"
스테파니의 말속도에 맞춰 말했고 질문했다.
“응 엄마 패밀리네임 받아서 산토스야”
스테파니 리베라 산토스는 핸드폰을 들어 다른 노래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