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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성인 Sep 09. 2023

우울한 행복

교차되는 감정 - 4

 그녀는 치즈와 파스타를 섞지 않고 먹었다. 자취방에 있던 말벡 와인을 땄다. 와인잔이 하나밖에 없어 그녀에게 잔을 건네고 난 500ml 머그잔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 두 번째로 잔을 비울 때까지 그녀는 말없이 파스타를 먹었고 와인을 마셨다.


“거의 다 마셨어”

 면이 씹히는 소리를 제외하곤 들리는 소리가 없었던 시간이 종료됐다. 서로 3잔씩 와인을 마셨을 때였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파스타는 아직 남았잖아. 콜라 하나 줄까?”
“싫어 다른 와인 마시자”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옆에 뒀던 아까 전 편의점에서 사 온 와인을 들고 오는 그녀였다. “내가 열거야” 와인병을 한 손에 든 채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프너 여기 있어”

 와인오프너를 그녀에게 건넸다. 건네면서 본 그녀의 귓볼은 잘 익은 자두처럼 아주 붉었다.


“찬준 요리 잘해”

 코르크 마개에 오프너를 쑤셔 넣으며 그녀는 말했다.
“고마워”
“다음엔 내가 요리해줄래”
“요리 잘하는 거 있어?”

 포크에 파스타를 말면서 물어봤다.
“나 고기, 스크램블 에그, 토스트”

 그녀는 힘을 주며 오프너를 위로 당겼다.
“토스트 좋지. 다음에 그거 해주면 되겠네”
“응 나 해줄게. 근데 찬준 이거 열어줘”

 코르크 마개에 오프너가 박혀있는 싸구려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내게 건넸다.



 난 한 번에 와인을 땄다. 그녀가 웃었다. 내 자취방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웃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그녀의 귓불을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응 이렇게만 마실게”

 오른손 검지로 와인병을 가리켰다. 보조개가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 마신 말벡 와인을 책상 아래에 내려놓았다. 각각 3잔, 총 6잔에 한 병을 비운 것을 보니 한 번 따를 때 내가 좀 많이 따랐던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내가 할래

 그녀가 와인병을 기울여 내 머그잔에 와인을 따랐다.
“내가 따라줄게”

 나는 그녀의 잔을 채워주려 했다.
“아니 내가 해”

 본인 잔이 가득 찰 정도로 와인을 따랐다.

“건배!”

그녀가 와인병을 내려놓고 아까보단 큰 목소리로 말했다.
“건배”

 나는 웃었고 내 머그잔과 그녀의 와인잔이 식어가는 알리오올리오 위에서 부딪혔다.

“아까 꺼가 더 맛있다”

 가득 찼던 와인잔을 한 순간에 비우며 그녀가 말했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열고 바로 마셔서 그럴걸”

 나는 한 모금 정도 마시고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맛없어?”
“어”
“왜?”

 그녀는 정말 궁금해 보였다.
“와인을 열고 조금 기다렸다 먹어야 더 맛있어져. 브레싱이라고 하는 건데 공기랑 와인이랑 만나면서 맛이 점점 좋아져”
“좀 일찍 말해주지. 원샷했어 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남은 파스타를 포크에다 말아 스푼으로 받치며 한 입에 해치웠다. 삼키기 직전 머그잔 속의 와인을 함께 마셔 목이 막히지 않게끔 했다.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보니 그녀는 파스타를 3분의 1 정도 먹지 않았고 빈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배불러?”

 내가 물었다.
“응”
“남겨도 돼”

 포크와 스푼을 다 먹은 파스타 접시 위에 내려놨다.
“근데 찬준”

 그녀가 고개를 앞으로 빼며 질문했다. “나 잘못한 거 있어”
“뭘?”
“책 안 읽었어”
“그게 왜 잘못한 거야”
“다시 준다고 했는데 안 줬어 나”

 그녀가 다시 와인병을 들어 잔에 와인을 따랐다. 아까와 비슷하게 잔을 가득 채웠다. 내 머그잔에는 아직 와인이 조금 남아있었다.
“읽을 거지?”

 나는 남아있는 와인을 입에 털어 넣으며 와인병을 집어 머그잔을 다시 채웠다.
“모르겠어. 읽기 싫어 지금은”

 홍조 띤 그녀의 구릿빛 얼굴은 금발의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다.

"주고 싶을 때 줘"
“찬준 나 또 할 말 있어”

 양반다리로 앉아있던 그녀가 무릎을 들어 양다리를 겹친 모양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겹쳐진 발목 부근에서 양손을 뻗어 깍지 꼈다.

“여기 살아 나도”

“이 건물?

 놀란 척을 하며 나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리를 뻗고 허벅지 사이에 양손을 두었다.
“여기 4층”

 그녀는 고개를 천정 쪽으로 까딱했다.
“신기하다. 언제부터?”
“한국 왔을 때부터”
“그게 언제야?”
“한국 나이 21살, 2년 됐다. 이제까지”
“어쩌다가 여기서 살게 된 건데?”
“필리핀 학생들 쓰는 건물 여기로 했어. 그래서 같이 살아”

 지난번에 몰래 훔쳐본 4층의 소란에서 들은 내용들을 생각했다. 음식 때문에 집주인 남편과 싸우던 다른 유학생들과 402호의 문을 열고 나온 스테파니가 생각났다.

“그런 거구나. 같은 건물에서 사는 줄 몰랐어. 신기해 진짜”

 나름 신기하긴 했지만 내 대답은 전체적으로 거짓말이었다.
“아까 여기로 걸어올 때 나 놀랐어 찬준. 같은 건물 산다는 거”

 큭큭대며 웃는 스테파니는 취한 것인지 발음이 살짝 어눌해졌다.
“기분 안 좋은 줄 알았어”

 나도 술기운이 슬슬 올라왔다. 맨 정신이었으면 굳이 하지 않았을 말들을 했다.
“왜?”

 그녀는 고개를 한쪽으로 툭 떨어뜨렸다. 금빛 머리카락이 붉은빛 뺨 위에 불규칙적으로 흐트러졌다.
“방 들어온 뒤에 웃지도 않고 밥 먹을 때도 대화가 아예 없었잖아”

 머그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냥 놀랐어 나”

 깍지 낀 손을 풀어 뺨 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많이 배고팠어”
“기운이 없던 거구나”

 난 머그잔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른손 바로 옆에 두어서 편하게 집을 수 있었다. “나도 할 말 있어”
“뭘까?”

 스테파니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 온 지 2년밖에 안된 건데 스테파니 한국말을 되게 잘해서, 혹시 필리핀에서 배워 온 거야?”
“아 음..”

 자취방에 막 들어왔을 때의 무표정의 표정이었다. 나른한 미소는 얼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응 배운 거야” 내 눈을 쳐다보며 다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한국 대학에 오고 싶었어?”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잔을 들어 와인을 마셨다. 잔을 가득 채웠던 와인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찬준 말 맞아. 기다리니까 맛 좋아”

 말을 돌리는 게 티가 났다.
“잘됐네”
“찬준 안 취했어?”

 누가 봐도 취한 얼굴로 내게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물어보는 그녀가 웃겼다.
“조금?”
“나는 취했어”
“어 그래 보여. 얼굴 엄청 빨개”
“찬준 나 노래 들을래”

 스테파니는 핸드폰을 들어 자기가 듣고 싶은 노래를 틀었다.

 일본 음악이었다.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 감성 있는 시티팝이 흘러나오자 스테파니는 자취방 불을 껐다. 가을의 저녁은 어두웠고 시간은 8시 42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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