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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사는 건 쉬울 줄 알았어

by 두움큼

제주에 있을 때부터 강원도 엄마 집에 자주 왔었다.

명절 때, 아빠 제사 때, 엄마 생신 때, 휴가 때마다 엄마와 삼촌을 챙겨주고 가야 마음이 편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렇게 따로 살다가 한 번씩 만나는 게 더 애틋하고 다정했던 것 같다.


열일곱 살에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일찍이 타지로 나오게 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산 건 16년이고, 자그마치 23년의 세월을 떨어져서 살았다.

이따금씩 엄마집에 와서 '만나는 것'과 '같이 사는 것'이 이렇게나 다른 문제였는지 그땐 몰랐다.

하긴 그걸 따질 여유도 없었다. 엄마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데...




엄마는 우리를 키우실 때 잔소리도 거의 안 하시고, 매를 드신 적 또한 한 번도 없었다.

고단하고 팍팍했을 엄마 삶의 설움을 자식들에게 화풀이하거나 하소연하지 않으셨다.

언니랑 하도 싸워서 싸우지 말라는 야단 외엔 착하다, 예쁘다 칭찬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우리에게 용돈을 넉넉히 안 주셨던 아빠를 늘 못마땅해하셨다. 그래서 가을철에는 아빠 몰래 검은콩이나 참깨를 만물상에 팔아 용돈에 보태 쓰라고 주시면서 정성으로 키워주셨다.


엄마는 정겹고 다정한 성품 그대로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말씀을 참 곱게 하신다.

"거기 서있는 김에 물 좀 떠다 줄래?"

"엄마 커피 한 잔 타줄 수 있어?"

누가 들으면 딸이 아니라 남한테 할법한 청유형 화법으로 말씀하시니 그 말씨가 너무 예쁘고 귀엽다.

어느 날 새벽운동이라도 다녀오면 ‘어떻게 그렇게 부지런하니?’ 하시고,

바늘에 실만 꿰어 드려도 ‘아이고 신통하게 눈도 밝다’며 하는 것 없이 아직도 엄마에게 칭찬을 받고 있다.




엄마랑 사는 건 아무렴 쉬운 줄 알았다.

그런데 떨어져 산 지 23년, 나는 마흔 살 어른이 되었고 엄마는 팔순의 할머니가 되었다.

그 세월의 간극을 좁히기가 쉽지 않았다. 순간 순간고비가 있었다.


엄마가 쓰고 나서 아무 데나 던져 놓은 물건들을 쫓아다니며 정리하다가,

반찬 뚜껑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냉장고에 넣은 걸 다시 꺼내서 닫다가,

화장실에 있는 데 할 말 있다고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벌컥 열어서 문 열지 말라고 하다가,

그러다가 엄마한테 짜증을 냈다.

힘에 부치던 그날, 사소한 것들이 쌓여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 번 짜증을 낸 후로 참으려고 하지 않고 몇 차례 더 짜증... 아니 화도 냈다.


엄마는 쟁쟁거리는 딸이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이러면 이러지 마라, 저러면 저러지 마라 아주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해대는 새까맣게 어린 막내딸이 많이 힘드셨을 것 같다.

하루는 이웃집 할머니가 '엄마가 부침개가 먹고 싶은데 막내딸이 기름내 난다고 싫어해서 못 해 먹는다.'라고 했다면서 슬며시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아... 저런! 여긴 엄마집인데 집주인이 굴러들어 온 막내딸 눈치를 보고 계셨구나 싶어서 얼마나 죄송하던지.


그날 이후로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짜증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를 모시러 와놓고 오히려 엄마를 힘들게 한 건 아닌지, ‘엄마’를 부르는 억양부터 변해 있었던걸 반성했다.

엄마도 막내딸과 함께 산다고 하고 싶은 것도 참고 맞추려고 노력하시는데, 내가 감히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엄마한테 짜증을 내다니 그러면 안 된다 싶었다.

비록 내가 스트레스로 신경성 방광염이라는 진단을 받아서 고통받을지 언정!


서로가 괜찮은 범위가 다른 것뿐이다! 엄마를 이해하자. 엄마가 하는 대로 지켜봐 드리자! 되내어 보기로 한다.




나도 내가 듣고 자란 대로 이제는 엄마한테 자주 이야기해 드린다.

"엄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여?"

"파마하고 오니까 십 년은 젊어 보이네"

하면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신다. 그 웃은 얼굴이 너무 좋아서 같이 사는 지금이, 이따금씩 엄마와 만나는 것보다 힘들 때도 많지만 후회 없이 좋다.

엄마 웃는 얼굴은... 자꾸만 보고 싶고 꿈에서도 보고 싶은 얼굴인데 나는 매일 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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