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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BUMA 요부마 Feb 02. 2024

한국에 사는 조카, 미국에 사는 아들 2

노키즈 존은 꼭 필요한가


 2016년 9월, 로드아일랜드 우먼 앤 인펀트 호스피털에서 나단이를 낳았다. 

처음으로 아이를 낳는 것도 긴장되는 일인데, 미국에서 하려니 막막했다. 일단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을 하나 사서 꼼꼼하게 읽으며 공부했다. 

<로드아일랜드 맘스 그룹>이라는 오프라인 모임에도 가입했다. 매주 한 번씩, 처음 엄마가 되는 열 명의 동지들과 모였다. 

모임의 주최자는 '둘라'로 일하는 케이트였다. 미국인 중에서도 '둘라'라는 직업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나도 맘스 그룹에 가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거다. '둘라'란 임산부와 임신 과정에서부터 친밀하게 정보를 공유한다. 출산할 때 병원에 함께 간다. 의료진과 산모 사이에서 소통 창구 역할을 해준다. 이미 산모와 태아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분만을 주도하는 의사와 무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 애를 낳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안 그래도 산통과 모유 수유 등으로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이 사람, 저 사람이 와서 수시로 질문을 해대면 피곤하다. 둘라는 산모가 좀 더 편안하게 아기를 낳고, 돌보고, 쉴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소아과 주치의를 정한다. 어떤 주치의에게 갈지는 내 마음대로지만, 주치의가 내 아이를 받아줄지는 그/그녀의 선택이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어느 정도 환자를 받으면 더 이상 새 환자를 받지 않는다. 

아기가 태어나고 48시간이 되기 전에 소아과 주치의가 병원으로 찾아온다. 아기가 건강한지, 병원에서 추가적인 치료나 보살핌을 받을 필요가 없는지를 확인하고 퇴원(Discharge) 서류에 사인을 해주면, 병원 측에서 아기가 탈 차에 카시트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는지까지 확인하고 집에 가게 해 준다. 

 친정 엄마가 와서 산후조리를 도와주었다. 한국에서는 아기도, 산모도 3개월이 지나야 외출을 한다고 (엄마가) 했다. 그래서 우리도 병원에 갈 때만 빼고는 최대한 집에서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한 달 후에, <맘스 그룹> 회원 중 한 명이 핼러윈 파티에 초대했다. 그때 나단이는 8주였다. 엄마 중 한 명은 5일 된 갓난아이를 데리고 왔다. 

친정 엄마는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아니... 저 엄마는 막 태어난 애기를 데리고 왔네..."

당시에는 나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십 년을 살아보니, 여기서는 갓난아기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카페나 식당에서도 자주 본다. 그런데 그걸 보며 우리처럼 걱정하는 사람은 못 봤다. 

"어머! 소 러블리!(너무 귀엽다.)"라고 감탄한다. 

나단이를 데리고 다닐 때도, 나는 가을부터 봄까지 꼭 양말 신기고, 모자까지 씌우고 다녔다. 그런데 다른 아기들은 맨다리에, 맨발에 발가락을 꼼지락 거린다. 

한 번은 나단이 얼굴과 몸에 빨간 발진이 생겨 소아과에 갔다. 

의사가 말했다. "애가 너무 더웠네요." 

친정 엄마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나단이를 꼭 싸놨었다. 엄마가 한국에 가고 나서는 그냥 대충 입혀서 밖에 나갔다. 

가끔 나단이 사진을 찍어서 엄마와 시어머니께 보내드렸는데, 신기하게도 양쪽에서 같은 반응이 나왔다.

"어머, 양말은 어디 갔니?"

"목도리랑 장갑을 끼워서 나가지... 애가 춥겠네...."

이후로는 사진을 자주 보내지 않았다. 나는 애가 즐겁게 노는 모습,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돌아오는 건 걱정과 염려였기 때문이다. 나이 드신 분들 괜히 맘고생 시켜드리는 것 같아, 차라리 안 보내는 게 효도하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보모님 세대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 개발 도상국의 경제성장기를 거쳐, 지금은 경기후퇴기를 건너고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어'라는 마음을 '내가 너를 걱정하고 있어'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이 하는 표현의 숨은 의미를 해석하지 못하고, '네가 나를 걱정시키고 있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대화가 즐거울 때보다, 매번 안심을 시켜줘야 할 것 같은 부담이 느껴질 때가 많다.




나는 집에 있으면 답답했다. 밖에서 돌아다녀야 시간이 빨리 간다. 

나단이를 데리고 <세븐 스타 베이커리>라는 카페에 거의 매일 갔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문 앞으로 가면, 항상 누군가가 문을 열어준다. 

"내가 열어줄게요." 밖에 있는 사람이 뛰어와서 잡아주거나, 안에 있던 사람이 나를 보고 문을 잡아준다. 나는 여유 있게 그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2분 정도 기다리면 된다. 

줄을 서 있으면 앞에 사람이 말한다. 

"먼저 주문하세요."

나는 빵을 고를 때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고, 나단이에게 어떤 페이스트리가 있는지 구경시켜주려고 대부분은 괜찮다고 웃으며 거절한다. 

빵과 커피는 셀프서비스지만, 점원은 내가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보고 말한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갖다 줄게요." 

나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서 앉아서 편하게 기다린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나이 지긋한 여성분이 말을 건다.

"어머, 아기가 정말 예뻐요! 몇 살이에요?"

나단이랑 눈을 맞추며 웃어준다. 그 사람이 가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말을 건다. 

어떤 사람은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서 나단이에게 삐까부(있다-없다, 손으로 눈을 가렸다, 보여줬다 하는 놀이)를 하며 시선을 끌어준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자주 가다 보니 나름 친해진 사람도 있다. 그중 주디와 조이스는 이제 일흔이 넘은 멋쟁이 쌍둥이다. <세븐 스타>에서 만나 지금은 매년 나단이의 생일을 함께 축하한다.

아이와 함께 외출하면 외롭다는 느낌이 들 새가 없다.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 사람들의 배려를 느낀다.


혼자 외출하면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미국사람들은 개인의 공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확실히 나 혼자 있을 때는 아이와 있을 때만큼 말을 거는 사람이 없다. 먼저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내가 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기는 하지만, 유모차를 밀고 있을 때처럼 굳이 달려와서까지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다. 

같은 아파트에 살며 두 돌 된 딸을 키우는 언니도 같은 말을 했다.

"나 혼자 다닐 때보다 아이랑 다닐 때 사람들이 훨씬 친절해. 내가 애를 보호해 주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보호해 준다는 느낌이 들어." 


미국에서 아이, 특히 어린아이는 '골드 패스' 같다고 생각되는 상황을 자주 경험했다.

다만, 사회가 중산층이 보육 시설을 이용할 때 내는 비용 부담을 좀 줄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라 다음에 다시 다뤄보기로_)




한국에서 '노키즈 존'이 많이 생긴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솔직히 나도 싱글이었을 때는 '애들은 가라'라고 말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친구 두 명과 롯데백화점 여성복 층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장소가 좁아서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가벽에 기다란 좌석이 놓여있고, 여러 사람이 나란히 앉도록 되어 있었다. (분명, 이런 의자를 표현하는 용어가 따로 있을 것 같지만, 나는 인테리어에 문외한이라.)

옆 테이블에 엄마 두 명이 아이 둘을 데리고 앉았다. 

내 친구와 네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딱 A4용지 세로 길이만큼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의자 위에 올라가서 콩콩 뛰었다. 엄마는 별 제지를 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친구를 팍 쳤고, 음료를 쏟았다. 다행히 친구의 옷이 살짝 젖은 정도였다. 

"어머, 죄송해요." 엄마는 사과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왜 그 엄마가 애초에 아이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의자에 올라가 뛰는 걸 막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굳이 어린애를 이런 좁은 카페에 데리고 오지 말았으면 했다. 


사람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 

내가 애를 낳고 키워보니, 백화점에서 애를 쫓아다니면 지치고, 지치면 좁든 넓든 어디든 가서 쉬면서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들이켜고 싶어 진다. 그리고 조금만 더 앉아있을 수 있다면 아이가 좀 뛰는 정도는 무시하고 싶어 진다. 특히 서울은 면적이 좁고, 사람은 많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한 번 정도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다만, 그 엄마의 대처에 아쉬웠던 점은 내 친구의 음료가 엎어졌고, 옷이 젖었으면, 예의상이라도 음료를 다시 사겠다든지, 세탁비가 필요한지 물었다면 좀 더 좋았을 텐데. 사과 한마디로 끝났다는 거.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 후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상대의 마음이 씁쓸해지기도 하고, 흐뭇해지기도 하니까. 



 미국에서 7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노키즈 존'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동체에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키즈 존'은 어른은 어른끼리, 아이는 아이끼리, 더 나아가 노인은 노인끼리 놀자는 마인드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가 젊고, 싱글이고, 혼자니까 모처럼 생긴 귀중한 여가 시간을 '조용한 곳'에서 보내고 싶은 게 당연하다. 애들도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애들끼리 키즈 카페에 모여 신나게 놀면 얼마나 좋은가. 노인은 노인정 또는 경로당에서 모여서 옛날 얘기, 자식과 손주자랑 하면 편하고 즐겁다. 

 

하지만 우리는 아기부터 노인까지 함께 살아간다. 나도 한때는 아이였다. 언젠가는 늙는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 그런데 "너는 아이니까 여기 들어오지 마.", "나이 드신 분은 여기 오래 계시면 안 돼요." 라며 거부한다면,  나와 다른 타인을 거부하고 분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키즈 존'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공공질서, 예의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내 아이는 내가 책임지고 가르치는 게 맞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 

옛말에 '아이 한 명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필요한 질서와 매너를 배우기 위해서는 일단 그 '공공장소'에 있어야 한다. 카페에서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뛰어다니지 않고, 음식을 집어던지지 않고, 타인의 물건이나 음식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이런 적절한 행동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 장소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고, 어떤 것들이 요구되는지를 시간을 들여, 반복적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어디선가 배워와.' 한다면,  머리로 배울 수 있어도 몸에 익힐 수는 없지 않을까?

사회초년생이 취업을 하려는데, 모든 회사가 '경력직만 찾습니다.'라고 한다면, '경력을 도대체 어디서 쌓으라는 말인가'하고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노키즈 존'이라는 개념도 별로 없고, 그런 게 있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며 묻는 사람도 많다. "그거 차별 아니에요?" 나이, 성별, 인종 때문에 어떤 장소에 들어갈 수 없고,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차별'로 생각한다. 

이제까지 살면서 본, '아이들은 출입금지'라고 하는 곳은 클럽, 술집 정도였는데 호텔 라운지나 바는 아이도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 

레스토랑에 가면 좋은 곳이든 평범한 곳이든, '키즈 메뉴'를 볼 수 있다. 대부분 아이가 기다리는데 지루하지 않도록 컬러링 페이퍼와 색연필을 준다. 호텔에도 체크인할 때 아이들에게 '키즈 키트'를 주는데, 그 안에는 제법 두툼한 컬러링 북, 색연필, 장난감, 간식 등이 들어있다. 

비싼 곳일수록 아이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많이 가본 것은 아니지만)

식당, 병원, 카페 등 서비스를 받는 곳에 가면, 직원들이 아이에게 직접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뭐 주문할 거야?", "우리는 맥 앤 치즈가 인기인데 뭘 먹을래?", "음료는 이런 이런 게 있는데, 넌 어떤 거 좋아해?", "오늘 어디가 아파?", "요즘 밥은 잘 먹고 있어? 뭐 잘 먹어?"

아이가 자기 의사를 표현할 정도의 나이면 아이와 직접 대화를 하려고 한다. 엄연히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느낌이랄까. 


어렸을 때부터 여러 세대의 사람에게 둘러싸여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고, 배우고, 소통해 온 아이는 성인이 되면, 어린아이를 자기가 대우받은 대로 대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내가 노키즈 존을 찬성하지 않는 이유다.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미숙한 타인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도 어른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할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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