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 그네

세월 무상

by 강쌍용


회전 그네



땡그랑 땡~그랑! 불규칙한 쇳소리가 녹슨 기억의 문을 열라고 노크를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금속 손잡이가 철 기둥과 부딪치는 소리였다.

지난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발밑에서 차오르기 시작한 어스름이 벌써 사방을 채웠다. 버려진 듯 외롭게 서 있는 낡은 회전 그네가 폐교된 학교 운동장 귀퉁이에서 홀로 쓸쓸했다.

세월에 묻어가는 것은 비단 나이 들어가는 내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벌건 녹물이 흘러내린 회전 그네 또한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위태하게 서 있다. 걷어낸 기왓장처럼 방치된 폐교가 그래도 한때는 전교생 54명을 품었던 학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대세에 밀린 쇠락은 어찌할 수 없다 해도 빛나는 유년의 이야기는 여전히 구석구석에 서려 있는 것 같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이 말은 변화된 대상에 방점을 찍었다기보다 십 년이라는 시간의 장구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수사일 것이다.

십 년을 가만히 내버려 둬도 모든 것이 변할 만큼 긴 시간이란 뜻이다. 하물며 50년은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했다는 말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긴 시간도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빠르게 흘러버린 세월이다.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흐르는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며 사라지게 한다. 제 것을 온전히 유지해 나가기 힘들다.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그것을 대하는 불편한 낯섦은 익숙한 것에서부터 멀어지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이렇듯 세월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란 없다. 인생이 무상하다면 이렇게 덧없이 흘러버린 시간 뒤에 남겨진 빈 껍질 같은 허무함일 것이다.

엊그제의 유년이 텅 빈 시간을 뛰어넘은 것 같은 오늘에 이르도록 무엇을 하며 살았던가? 비록 되돌릴 수 없는 당위의 안타까움과 허전함이 복합된 심경이라 해도 이 자리에서 지금 마주하고 있는 회한은 슬프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내만 늙어 간다고 불평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세상만사가 바뀌고 사라지는 것은 필연이다. 사람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으니 거부할 끈덕지도, 받아들이지 않을 여지도 없다. 그저 수긍하며 하루하루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


깍지를 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야무지게 손잡이를 잡는다고 힘이 바짝 들어간 탓이다. 호기심에 긴장감이 더한 미묘한 공포가 함께 밀려왔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하늘을 날 것이다. 아이들 틈에서 순서가 오기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린 결과였다.

6학년 형들이 매달린 아이들의 허리를 뒤에서 붙들고 서너 바퀴 힘차게 돌았다. 탄력이 붙자 가속을 붙이느라 한 번 더 힘껏 밀어주고 옆으로 빠졌다.

세상이 눈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공중으로 붕 떠서 날아가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우렛소리를 내며 시루봉 위로 날아가던 쌕쌕이가 생각났다. 고막을 뚫는 굉음이 들리면 교실의 창문을 닫든 선생님이 총알보다 빨리 날아가는 팬텀 기라고 알려주었다. 꽁무니로 쏟아진 연무가 하늘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을 타면 이렇게 날아가겠구나!

마음껏 상상을 즐기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누가 건드리지도 않은 바지가 훌렁 벗겨져 무르팍에 간당간당 걸렸다. 드러난 아랫도리가 운동장을 가로지른 햇살에 부끄러웠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냥 이대로 멈추지 말고 하늘 바깥까지 날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무줄이 터졌던, 구심력보다 강한 원심력이 끌어내렸던, 지금은 원 없이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회전 그네는 오늘 낮에 ‘섬돌 보기’(낙도를 도는 당시의 행정선)가 실어서 들여왔다. 이미 예고가 된 상황이라 뱃고동이 울리자 아이들은 떼를 지어 뱃머리로 몰려갔다.

배에서 내리고 학교 운동장까지 어른들이 손을 맞춰 리어카로 옮겼다. 땅을 파고 세워서 넘어지지 않게 땅을 다지는 동안 아이들의 시선은 온통 회전 그네에 집중되었다.

드디어 오후부터 시작된 회전 그네 타기는 어둠이 깔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난생처음 타보는 놀이 기구가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와글와글 밀려든 아이들을 줄 세우느라 선생님 목에 핏대가 돋았다. 하도 용을 쓴 탓인지 목구멍에서 따다닥 거리는 이상한 쇳소리가 났다. 나중에는 헛바람 새는 소리가 거슬리는지 자꾸 짜증을 냈다.

그 와중에 얍삽하게 새치기를 하다 들킨 녀석이 악다구니를 쓰는 바람에 신경질이 머리를 뚫고 솟구쳤다. 그때부터 아이들이 슬금슬금 선생님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기었다.

담장 밖에서 이를 은근히 지켜보던 순이 이모가 조마조마했다. 포마드 바른 선생님 머리카락이 헝클어질 때마다 자꾸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었다. 선생님도 가끔 그쪽으로 눈을 흘겼다. 노느라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선생님은 분명히 총각 선생님이었다. 순이 이모가 섰던 담벼락에 노란 금계국이 함께 수줍었다.

얄미운 구심력이 회전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고도가 낮아지자 발끝으로 몇 번 더 땅을 찼지만, 소용이 없었다. 끝없이 돌아갈 것 같은 회전 그네는 결국 멈추었다.

깍지를 풀지 않으려고 눈을 꼭 감았다. 현기증 같은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다 이내 사라졌다. 또 순서를 기다릴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눈치도 없이 멈추는 회전 그네가 원망스러웠다.

무엇이든 멈추는 것이 싫었다. 빨리 커서 어른이 되려면 시간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늘 바깥까지 날아가려면 회전 그네도 멈추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시공간의 그 어떤 것도 관성을 받아 오직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어제 일처럼 눈에 떠오른다.

이제는 모든 것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나이만큼 간사해진 셈법을 들이밀 생각은 없다. 이미 멈추어버린 회전 그네를 따라 세월도 이쯤에서 멈추어 주면 정말 좋겠다.

새삼 따져할 이유도 없다. 속마음을 숨길 까닭도 없다. 더 이상 나이 먹기 싫으니까! 돌고 도는 회전 그네 같은 인생, 여기서 멈추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잡초 무성한 운동장 귀퉁이에서 그렇게 서성이고 있었다. 녹슨 회전 그네의 철 기둥을 붙들고 하릴없이 서 있었지만, 그때 매달리던 아이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땡그랑 땡그랑 쇳소리만 그저 무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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