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9 히에로니무스의 쾌락의 정원을 통한 탐욕과 내면의 죄의식
히에로니무스 보스[출생 - 사망 1450년경 ~ 1516]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1500~1505년경
나무판에 유채, 220cm × 389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은 세 구역으로 나누어진 삼면화다. 좌측에는 신의 손길로 연결되는 아담과 이브가 그려진 에덴동산이 있고 가운데는 제목에 해당하는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 그리고 가장 우측에는 지옥이 그려져 있다. 세 구역은 다른 듯 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실은 이 세 가지의 그림이 합해져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는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영감은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의 세 구역은 낙원과 현실, 그리고 지옥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 에덴동산 -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쫓겨난다.
신은 시험을 하지 않는다지만 대신 신은 모든 것을 계획했다.
모든 것은 신의 완벽한 의도였다.
우주의 질서는 조용한 형태의 지루한 것이 아니다. 생명이 깨어나고 그 생명이 살아가고 그로 인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이미 신이 계획한 일이 아닌가 싶다. 지루하게 멈춰있는 것이 아닌 혼돈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가 생기며 성장하는 것이 우주의 질서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우주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 신이 우리에게 준 축복 하나는 누군가의 노예로서의 결박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권이라는 자유를 주었다는 게 아닐까. 만약 신이 이 모든 것을 계획하지 않았다면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굳이
보여주며 그건 절대 건드리면 안된다고 했을까. 모든 것은 의도적이었다. 신은 인간의 존재가
호기심이 넘쳐 주체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조차 알고 있었다. 모두 알기에, 모두 스스로 계획했기에 신은 비로소 신이 될 수 있다.
신은 그들이 스스로를 선택하게 만들고 그 인과로 세상이 돌아가며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편이 안전하고 평안하고 조용한 낙원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다이나믹하니까 말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순수성이 타락하지 않고 남아있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어쩌면 운명은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율적 의지이며 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신이 아니라 인간일지도 모른다. 신은 지켜보는 존재, 그저 우리를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개인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또는 모두가 만들어가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며.
- 쾌락의 정원 부분 개인적인 해석 -
01. 과일
인간의 욕망
과일을 먹지 않고 그 안에 들어가 있거나 안고 있는 부분은 현실의 욕망을 표현한 부분으로 취하지 못하고
영원히 내 것으로 가둘 수 없어 결국에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욕망이 과하면 탐욕으로
변질되고 그 탐욕은 한 번 시작되면 멈추기가 쉽지 않은데, 아주 작은 소망의 성취감을 맛보면 점점 욕심이
커지고 그 욕심은 욕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욕망이 커지면 탐욕이 된다. 결국
나를 위해 바랬던 순수한 소망은 절제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탐욕의 노예로 만들 수 있다.
02. 투명한 구 안의 연인
깨지기 쉬운 쾌락적인 관계, 즉 인간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좋아 보여도 결국 변심하는 것은 깨지기 쉬운 유리구처럼 빠르게 이어진다. 영원할 것 같았던
관계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기도 한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마음은 투명하게 비추는 유리구와는 다르게,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판단해서도 안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결속은 환경이 아닌 자신의 판단하에 어느 순간 이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인에 대한 변심을 자신의 문제가 아닌 상대의 문제로 탓하는 비상식적인 인간들의 죄의식이 떠오른다. 결국 변심이라는 단어는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아닌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문제를 한낮 깨지기 쉬운 유리구로 덮으려는 인간의 간사함이 드러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03. 반복되는 원형의 행렬
불교의 업과 윤회
인간의 습성은 잘 변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같은 업을 반복해서 짓는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분명 잘못된 판단에 교훈을 얻기도 하지만 또다시 그 잘못된 판단을 저지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고통의 순간은 반복되고 그 반복의 사슬을 끊으려면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으므로 반복되는 패턴의 원인을 찾고 자신의 과오를 상기시켜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의식에 저장된 어떠한 행위는 내가 모르는 새 나를 갉아먹기도 한다. 때로는 집단 무의식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분명 잘못된 판단과 선택임이 분명함에도 구분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이라고 믿는 상식들이 인간의 발전을 막기도 한다. 때로는
집단무의식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종료시키거나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 음악의 지옥 -
음악의 지옥을 보면 실제 인간이 겪는 고통이라기보다 고통받는 영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쾌락을 통해 맛본 즐거움을 스스로 끊어낼 수 없는 육체 안의 영혼이 쾌락으로 인해 점차 시들어가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 생각한다. 아주 순수했던 꿈도 희망도 그 목적을 잊어버리고 엉뚱한 것에 취해버리면 길을 잃게 된다. 목적은 목적의 성취였지만 결과적으로 목적의 성취를 위해 달려 나가는 동안 지친 정신을
달래줄 무언가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주객전도의 순간을 눈치채지 못하고 어느 순간 자신이 쫒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의미 없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걷는다. 성취의 목적을 잊으면 결과적으로 그것을 성취했을 때 느껴지는 희열과 뿌듯함보다 허망함과 허탈함이 남을 것이다. 목적을 위해 열심히 달렸지만 그 목적을 위해 했던 어떠한 행위들이 결국에는 목적을 지워버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잊게 만들 때도 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다. 초심을 잃지 말라.
쾌락의 정원의 인간들은 표정은 없지만 모두 편안해 보인다. 어떤 고민이나 걱정도 잊은 채 쾌락에 물들어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도 모른 채 지옥을 향해 달려간다. 그 선택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모두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결과이다. 지옥이나 낙원이나 천국은 어떠한 장소가 아니다. 바로 나의 내면의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큰 상처라기보다 어떠한 경험에 불과했지만 성인이 되면서 더 깊어지는 그런 것과 비슷하다. 좋지 않은 행위를 반복하면 나도 모르는 새 순수했던 나는 사라지고 누군지 알 수 없는 껍데기만 남는다. 그 껍데기는 고통일 수도 있고 허망함일 수도 있고 후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후회는 다행히도 새로운 발판의 기회이기도 하다. 죽기 직전만 아니라면. 오직 시간이 충분한 깨어있는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낙원과 현실과 지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그림의 에덴동산은
태초 인간의 근본인 순수함은 우리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힘이다.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두 번째 그림의 세속은
선악과를 먹은 후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그것을 숨기려는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뒤집어 현실 속 내면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발가벗겨진 인간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라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욕망을 까뒤집어서 눈에 보이게 만든 것, 즉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숨겨져 있는 내면의 모습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림 속 인간들은 서로의 시선을 외면한 채 인간 외의 모든 것에 집착하며 눈길을 주고 있다. 욕망에 의한 인간성의 결여와 점점 탐욕으로 향하는 시선을 시각화하였다. 인간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은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기에 어떠한 악랄한 생각을 품고 있어도 안전하다고 착각한다.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욕망을 넘어
탐욕에 가득 찬 인간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 그림을 감상하면서 자신이 작품 안에 있는 누군가라고 생각했을 때 발가벗고 있는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누군가가 적나라하게 보고 있다면,
그래도 인간은 죄악을 저지를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악의가 없는 사람들은 안전하게 그들로부터 피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세상에 죄악도 없을 것이다.
분명 신이 인간의 내면을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이유도 있지 않을까.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더 다이나믹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은 노출되지 않는다고 믿는 영역에서 가장 솔직해지면서도 그 어느 곳에서 보다 통제력을 잃기도 쉽다. 부끄러울 필요도 없고 방어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작품 안의 사람들이 무표정인 것도 어차피 내면은 누구도 볼 수 없기에 안심하고 무슨 생각이든 만들어내는 무의식이 아닐까 한다. 무의식은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 슬픔도 없고 기쁨도 없다. 단지 한 순간에 지나가버릴 쾌락만이 그들의 얼굴이고 감정이고 표정이다.
나는 쾌락이 아니다.
쾌락은 내가 아니다.
쾌락은 나 자신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환상에 불과하다.
쾌락의 끝에는 오직 공허만이 남는다.
쾌락은 영혼을 서서히 병들게 하고 타인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쾌락의 정원은
부끄러움을 잊은 인간이 아니라 아직 부끄러워할 기회조차 없는 인간의 숨겨진 내면의 모습을 그린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으니 눈속임이면 또는 말 몇 마디면 속을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부끄러움을 잊었다면 한 인간이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그 누구도 그에게 내면적 지옥을 선사할 수 없다.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손가락질을 해도 그는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여길 수 있는 낙원에 있을 테니
말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은 인간은 영원히 낙원에 머물 수 있다.
가끔은 무지한 것이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무지가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움, 죄책감, 불안함에 시달리면서 살아간다. 큰 죄를 저지른 적도 없고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님에도 말이다. 때로는 지식이나 정보가 삶을 더 꼬이게 만들 때도 있다. 오히려 정보를 과도하게 수집하는 사람이 더 실속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지식보다는 지혜를, 유식보다는 무지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더 나은 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죄를 짓는 건 나쁘거나 악한 인간이라기보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숨기고 싶어 안달 난 가면을 쓴 인간들이다. 내면의 그것이 외부로 드러날까 봐 또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더 많은 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내면을 숨기려 타인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게 꼭 범죄는 아니더라도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올라가는 자신의 가치, 자신의 위치 등 말 한마디로 수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무의식이 착각하거나 자신의 결핍과
부족함을 숨기려 타인을 이용하지만 사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저 판도라의 상자를 굳이 열어보지 않으려는 배려일 뿐. 대부분이 부끄러움을 가진 인간임을 알기에.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므로.
부끄러움과 죄책감과 두려움은 아주 가까운 관계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에너지이다. 부끄러움은 현실적 감각이지만 무의식이 기본값이다. 두려움에서 부끄러움으로 부끄러움에서 죄책감이 발생한다. 그리고 일부는 이 점을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또는 고의적으로 전가시키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때때로 원인도 모를 불안함에 그리고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두 부끄러움과 그로 인한 죄책감에서 발생한다. 과도한 도덕성과 양심과 사회적 시선의 결과다. 미래에 내가 책임지지 못할 상황이 발생할까 봐, 내가 한 행동이 타인에게 해가 될까 봐, 또는 사회에 속하지 못할까 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안에 목숨을 걸고 감정을 소비한다. 정작 중요한 건 지금 여기 나 자신인데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당당한 사람인지, 내가 떳떳한 사람인지, 그런 것들이 가장 중요함에도 탐욕은 인간이 인간일 수 없게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내면이 한 인간을 만드는 영향력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은 안심을 하고 자신이 살아온 대로 육체를 조종한다.
드러나지 않기에 더욱 고치기도 어렵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현실에 드러나는 죄는 세상과 사회와 나 자신으로부터 교정이 가능하지만 은폐되어 내면에 축적되는 죄는 교정이 어렵다. 부끄러움은 단지 인간을 구속하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서로서로 각자 알아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감정이다.
나침반이 되기도 하고 방향을 잡기도 한다. '도망치는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은 어쩌면 한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 보여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죄를 회피하면 그곳에 낙원은 없다. 내면의 죄는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보이지 않지만 축적되어 하나의 길을 만드는 과정이며 어디로 갈지는 자신은 몰라도 아마 자신의 영혼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쾌락의 정원은 그 부끄러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치되어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내면의 풍경을 묘사했다. 내면의 탐욕과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결국 도착할 곳은 지옥이라는 의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을 느끼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주시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예상밖의 형태로 또는 원하지 않는 형태로 변질될 수 있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인과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아주 오래전부터 돌고 돌며 항상 지금, 현재를 만들었다.
세 번째 그림인 음악의 지옥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탐욕에 물든 영혼이 고통받는 모습인 듯하다. 내면의 부끄러움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절대 숨길 수 없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나의 영혼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의 양심이 나의 도덕심이 나를 지켜본다. 내가 아무리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겨도 내 영혼은 알고 있다. 내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지 또는 아직 배울 게 많아 경험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는지 또는 더 이상 부활의 가치가 없는지 모든 걸 나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부끄러움, 죄책감, 두려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영혼은 고통에 잠식당한다. 나는 아니라고 우겨도 나 자신은
못 느껴도 영혼은 모든 것을 느낀다. 겉으로는 볼 수 없어도 아무리 내면 무의식의 행위라도 쾌락, 탐욕, 고의적인 악행은 영혼에 각인되어 영혼을 병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나 하나가 떳떳한 것이 더욱 좋은 사회를 만들고 그렇게 모두가 떳떳해지면 인과로 인해 세상은 낙원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신이 의도치 않는 상황일 수 있다. 낙원은 단조롭고 지루하고 안정적이고 평안함으로 쾌락에 의한 재미는 없을 수도 있기에.
결국 이 세 가지의 그림은 인간 내면의 집단적 투시도 및 정신 해부도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에덴동산은 우리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수순함, 세속은 우리가 가진 내면의 욕망 그리고 지옥은 그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고통받는 영혼으로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인간의 구성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인간의
구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영혼과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배우는 자아(무의식), 그리고 그 둘을 연결시키는 이성(의식)을 의미한다. 인간은 단지 하나의 몸뚱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 세 가지의 구성이 합해진 하나의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가 합심하지 않으면 인생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다. 또는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업과 인과를 만들 수 있다. 그걸 피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믿고 의지하며, 내가 나의 스승이 되어주고, 나쁜 것을 걸러 좋은 것을 나 자신에게 주며, 타인에 대한 기대치와 의지력을 낮추고 자신의 중심을 잡고 자신의 삶을 양심적으로 똑바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그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그저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더 멋지고 훌륭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영혼은 순수하면서도 모든 우주를 품고 있다.
자아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한 지식이나 정보를 저장한다.
이성은 이 둘을 적절히 섞어 인간의 욕구를 해결한다.
보스는 순수함과 적나라하게 발가벗긴 인간의 내면과 탐욕에 잠식된 인간의 영혼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쾌락의 정원은 단지 낙원, 세속, 지옥이 아닌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붕괴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아닌 모두가 만들어가는 세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듯하다. 결국 미래는 위대한 소수가 만드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하나의 커다란 세계이다. 인과는 위대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인과는 한 명 한 명이 퍼트리는 바이러스처럼 그렇게 세상에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