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배운 나이

by 코난의 서재



"아, 진짜 개빡친다!"


작년 4월의 어느 화요일 아침,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 속으로 욕을 했다. 새벽 3시까지 붙잡고 있던 프레젠테이션 파일이 갑자기 먹통이 된 것이다. 발표 2시간 전.


20대의 나였다면? 울면서 다시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30대의 나였다면? 남편을 깨워서라도 컴퓨터 고치는 법을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40대 후반의 나는 달랐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간단한 메모를 적기 시작했다. 완벽한 슬라이드 대신 진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런 발표는 처음이에요. 진짜 현실적이고 와닿아요!" "슬라이드 없어도 이렇게 몰입되다니..."


그날 이후로 나는 깨달았다. 완벽함이라는 건 결국 '나만의 감옥'이었다는 걸.


예전의 내 일상을 공개하자면 좀 민망하다.


카톡 답장: 3번 이상 다시 읽고 보내기 (혹시 오해받을까봐) 인스타 포스팅: 사진 50장 찍어서 1장 올리기 (각도, 조명 완벽해야 함) 친구 만나기: 만날 장소, 메뉴까지 미리 다 조사해가기 회사 메일: 한 줄 쓰는데 30분씩 고민하기 취미생활: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미루고 미루기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미쳤었다.


그런데 요즘의 내 일상은?


카톡 답장: 생각나는 대로 바로 보내기 (오타? 뭐 어때) 인스타 포스팅: 그냥 그 순간이 좋으면 찍어서 올리기 친구 만나기: "뭐 먹을래?" 현장에서 정하기 회사 메일: 요점만 간단하게, 끝 취미생활: 일단 시작하고 배워가면서 하기


진짜 터닝포인트는 작년 가을이었다.


중학생 아들이 갑자기 물었다.


"엄마, 완벽주의 진짜 피곤하지 않아?" "...어?" "엄마 맨날 뭔가 신경 쓰고 있잖아. 나는 그렇게 안 살고 싶어."


그 순간 멘붕이 왔다. 애가 중2인데 벌써 내 완벽주의를 알아본 거였다.


그날 밤에 생각해봤다. 완벽주의 때문에 얼마나 많은 걸 놓치고 살았나?


아들이 "엄마 이거 봐봐!" 하면서 보여주는 것들을 "나중에, 엄마 바빠" 라고 한 게 몇 번이나 될까.


그래서 시작했다. '적당히 살기' 프로젝트.


1단계: 김치찌개에 라면사리만 넣어도 되나?



결과: 남편이 "오랜만에 집밥 같네" 함



2단계: 안방에 빨래 그냥 쌓여있는데 친구가 온다면?



결과: 친구가 "우리집이랑 똑같다" 하면서 오히려 편해함



3단계: 온라인 강의 중에 택배왔는데 어떡하지?



결과: "실제 상황이라 더 현실적이에요" 라는 피드백



뭐야, 이거? 완벽하지 않은 게 오히려 더 매력적이잖아?


요즘 내가 깨달은 '불완전함의 마법'들:


집안일: 80% 정리된 집이 100% 정리된 집보다 더 살기 좋다. 약간의 어수선함이 '사람 사는 집' 느낌을 준다.


일: 90%짜리 기획서가 100%짜리보다 더 빨리 피드백을 받고, 결국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


인간관계: 가끔 실수하는 엄마가 아들한테는 더 편한가보다. "엄마도 모르는 게 있구나" 하면서 오히려 자기도 편해하는 것 같음


새로운 도전: 그냥 해보자 정신으로 시작한 인스타그램이 완벽한 콘텐츠 기획만 하던 블로그보다 훨씬 재밌음


지난주에는 정말 웃긴 일이 있었다.


강의하다가 갑자기 와이파이가 나갔다. 옛날 같으면 식은땀 흘렸을 텐데, 그냥 웃으면서 말했다.


"아, 인터넷이 쉬고 싶나봐요. 우리도 잠깐 쉴까요?"


학생들이 웃었다. 그 잠깐 동안 오히려 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완벽함을 내려놓으니까 진짜 의외의 재미가 생겼다. 계획에 없던 일들이 스트레스가 아니라 '오늘은 뭐가 터질까?' 싶은 궁금함이 됐다.


지금 이 글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고 있다.


옛날 같으면 몇 번이고 고치고, 문장 하나하나 다시 보고, 완벽한 글을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친구한테 카톡 보내듯이 써본다.


결론은 이거다.


완벽주의라는 게 결국 실패가 무서워서 만든 방어막이었다. 그런데 그 방어막 때문에 정작 재미있을 수 있는 일들을 다 피하고 살았던 것 같다.


40대 후반 되니까 알겠다. 인생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전부 예상 못했던 순간들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완벽하지 않을 때가 더 재밌다!


내 좌우명이 바뀌었다: "일단 해보고, 안 되면 웃지 뭐"


예전의 나한테 말해주고 싶다. 완벽해지려고 미루지 말고, 그냥 시작하라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실패 경험담이 오히려 더 재밌는 소재가 된다고.


혹시 지금 완벽주의 때문에 못 시작하고 있는 게 있다면?


그냥 시작해.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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