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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유니 Nov 14. 2022

내가 내 아들이 싫었던 이유

 매주 수요일은 단 두 글자라도 꼭 노트북을 열어 글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요일이다. 오늘은 그렇게 결심한 지 두 주쯤 되는 날이다. 오늘 하루 여러 가지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핑계 삼아 노트북을 안 열고 누울 참이었다. 옆에선 큰 아이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챌린지가 밀렸다며, 늦은 시간까지 하고 자겠다고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다. 그렇게 나는 한 줄만 써보자는 생각으로 연 메모장에 그 이상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날에는 큰 아이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눈물 날 만큼 행복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마음이 생기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태어날 때부터 한 두 살 까지는 느리지만, 순한 아이였다. 세 살 이후 어린이집을 가고, 내 아이가 다른 아이와 다른 관심사와 행동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다섯 살에 유치원을 간 뒤, 나의 걱정은 깊어졌다. 소위 혼자만의 세상에 있는 듯, 선생님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자기 관심사가 아닌 것을 하게 되었을 때 교실 문 밖을 나가 버리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벗어나는 행동에 대한 꾸지람이 늘었다. ‘보통’,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어색해지고, 바람이 되었다. 


 내가 한창 아이를 키울 당시에 ‘맘충’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뜻이 정확하게 뭔지 모르지만, ‘맘충’ 이 되기 싫었다. 남들에게 밉보이기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더욱 아이를 꾸짖는 일이 잦아졌다. 남들은 괜찮은 수준의 아이의 행동도 나는 용납하지 못했다. 아직 5살이라서 그럴 수 있는 정도의 행동에도 아이에게 맞지 않는 통제를 원했다. 그 어린아이에게 왜 그렇게 까지 모진 표정과 말투를 드러냈을까 많이 후회가 된다. 난 그때 아이가 많이 큰 줄 알았다. 말귀를 알아들으면, 다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소리가 귀에 들어가는 것과 머리로 이해하는 게 달랐을 텐데, 난 아이를 키우는 것에 무지했다. 내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고, 이해하려고 했다.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만이었다. 어디 가서 남에게 피해 주는 일 없이 일하고, 부족하지 않게 적당히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 잣대가 강하고, 두터워질수록 아이가 더 싫어졌다. 그리고 미워졌다. 모든 힘든 일은 다 큰 아이 탓이 되었다. 내 짜증과 화는 고스란히 큰 아이에게 옮겨졌고, 함께 지내는 작은 아이는 눈치가 늘고, 행동과 말이 아이 같지 않았다. 남들은 공손 하다고 했지만, 난 괴로웠다. 아이답게 키우고 싶었을 뿐인데, 두 아이 모두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아 매일 밤 자책하기 일쑤였다. 어른인 나의 양육태도로 이 모든 상황이 극악으로 치닫는 것 같다는 괴로움이 날로 커졌다. 돌이 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도망가고 싶었다. 당연히 과거를 돌이 킬 수 없다. 이미 그것이 사실이고, 옳다고 믿어 온 신념으로 지내 온 시간이 흘렀다. 미련 없이 버려야 하는데도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런 종류의 강박에 휩싸여지나온 세월 까지 깨끗이 지우고, 다시 그리고 싶어 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내가 아이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 강박을 내려놓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은 지금도 현재 진형형이다. 내려놓을 수 없는 완벽하고 싶은 강박, 강박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말투와 행동이 더해져 난 남보다 두 배 더 복잡하고,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이 모습이 큰 아이에게 보였다. 한 없이 자유로운 영혼일 것 같은 큰 아이는 불안과 강박으로 울음이 잦다는 걸 심리 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만큼이나 불안한 아이, 각종 강박으로 남 보다 더 괴롭고, 고통스러울 아이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건넸다. 참 쉬운 말, ‘그러지 않아도 돼.’ 눈물이 났다. 아이는 어리둥절해했지만, 난 그냥 꼭 안아 주었다. 나에게 건네는 말을 아이에게 건네니, 아이도 나도 편안해졌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키우는 아들이 아니지 않은가. 엄마 옆에 있을 때 가장 편하고, 외롭지 않을 아이로 키우고 싶다. 그저 얼굴 마주 보고 웃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아이의 모습이 미워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의 이러한 행동과 말을 웃어넘겨주고, 차분히 교정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불안해하거나 힘들만한 상황을 굳이 만들지 않는다면, 아이는 울지 않았다. 결국 같은 현상에서 어른인 내가 정확히 인지하였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들이 줄어들었다. 아이는 더 많이 웃고, 난 이제 아이가 밉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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