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컬 데모크라시- 더글러스 러미스
만약 누군가 민주주의를 근원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의무교육에서의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라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서일지도 모른다. 혹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뒤로한 지 꽤 오래 지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국가에 살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가 맞는지 설명할 수 없는 반쪽짜리 시민이 되어 있었다. 의무교육의 영향일지 몰라도 별다른 이유 없이 민주주의만이 ‘옳다’고 여겨왔으며, 그 외 다른 이념은 ‘옳지 않다’는 관념에 사로잡힌 나에게 있어 <레디컬 데모크라시>는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었다.
책을 피고 서문을 읽을 때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민주주의 국가라 칭하는 나라에 살면서 그것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서문을 읽으며 늦게나마 생각한 것들은 저자가 말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정치권력들의 농간이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며 행동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모르고 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으로써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발전 이데올로기를 형성해 왔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추상적인 언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앞에 여러 단어들(사회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경제민주주의 등)이 붙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추상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변형되기 굉장히 쉽기도 한데, 실제로 정치권력을 잡은 이들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도 종종 보인다. 이런 것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라는 게 무엇인지 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것을 근원적(레디컬)으로 바라봐야 한다. 앞에 어떠한 단어도 붙지 않은 말 그대로 ‘레디컬’한 민주주의에 대해 저자는 “오늘날 정치세계의 통치형태가 아닌 통치의 목적이며, 소수가 아닌 민중이 권력을 잡고 토론하고 행동하며 정의와 평등의 윤리 아래 삶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투표와 같이 제도적인 것들로만 바라보던 민주주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물론 투표도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니곤 있지만, 선거철이 될 때 반짝 참여하는 행위는 앞에서 이야기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은 정치에 관해 찾아보고 참여한다고 반문할 수 있으나, 그것이 우선순위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근원적 민주주의는 민중이 권력을 잡고 함께 행동하며 담론하는 행동양식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정치와 같은 시민참여형 제도에 신경쓸 겨를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민중이 대표자를 선출하고는 하지만, 이 대표자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사람들만을 ‘민중’이라 칭하곤 한다. 민중이 권력을 잡는 게 민주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권력을 누리는 상류층은 민중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 즉, 정치권력의 본질은 민중에 대한 지배이며, 그 목적은 민중들에게 하여금 경외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근원적 민주주의는 민중이 스스로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며 정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들이다. 반복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근원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지금 우리 주변 세계의 현상을 레디컬한 민주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처럼 기술이 발전해 시대가 바뀌기 시작할수록 더더욱.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들었을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경제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도록 사람들을 조작하는 방식일 뿐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경제활동들은 일, 즉 노동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강제력과 노동의 가치, 혹은 노동이 가져다주는 부와 명예를 이데올로기화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한 것들이다. 얼핏 보았을 때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경제발전은 민중의 삶과 노동에서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지배 형식을 확립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라는 점,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 여기에 더해 앞에서 언급한 정치적인 목표와 정치 투쟁에 관해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게끔 만든다. 그리고 이 관심은 경제적인 목표, 즉 자본으로 옮겨간다는 점에서 경제발전은 민주주의와 엇갈린다. 발전이라는 은유는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들이 자본이라고 가르치며,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경제적인 것이라 말하는 동시에 해결책은 결국 경제발전이라고 이야기한다(그러나 실제로 오늘날의 사회문제는 대부분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생겨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노동운동의 방향은 더 나은 작업환경과 일하는 곳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한 투쟁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예부터 내려온 정치적 요구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는데, ‘자유’가 자유시장이 되었고, ‘평등’은 기회의 평등으로, ‘안전’은 직업의 안정으로, ‘동의’는 소비자 주권으로, ‘행복 추구’는 평생 이어지는 쇼핑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보아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배제하는 삶의 영역을 넓혀간다는 점에서 반민주적이다.
발전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발전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은유다. 발전의 은유 덕에 발전 이데올로기 아래 실행되는 계획들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고, 본질적으로 내제된 실체를 발전시켜 그것의 본래 예정된 미래를 실현시킬 수 있을 거란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나는 일상 속에서 ‘발전’이라는 말을 긍정적 요소로 쓰곤 했는데, 정치, 사회학적 관점으로 ‘발전’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니 섣불리 내뱉을 수 없게 되었다. 발전은 궁극적으로 경제와 이어지는데, 경제발전의 종착지는 만인이 부를 누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역시 ‘부’라는 말을 낱낱이 파헤쳐 보면, ‘부’의 본질이 재산으로 사람을 지배한다는 뜻이란 걸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의 부유함은 가난한 사람의 빈곤으로 인해 두드러진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부자들의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재산으로 사람을 부리며 그를 통해 자신의 부를 훨씬 돋보이게 만들곤 한다. 나라로 범위를 넓혀 봐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의 부의 원천이 무엇인가. 우리가 후진국이라 칭하곤 하는 가난한 나라의 재산(자원)과 인력(이주노동자)이다. 빈익빈부익부라는 말만큼 경제를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 경제를 발전시키면 발전시킬수록 가난한 사람, 가난한 나라는 부유한 사람과 나라의 독점으로 인해 더욱 가난해지고, 그 반대로 부유한 사람, 부유한 나라는 더욱 잘 살게 된다. 세계경제체제는 불평등을 조장하고 불평등을 원료로 작동한다는 이야기가 딱 맞아 떨어진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엄연히 다른 것이며, 경제성장은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방해물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발전으로 인해 바뀐 게 너무나 많아졌다. 부를 누리게 된 이들은 더욱 편리한 것을 찾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게 하이테크로 이루어졌다. 부를 누리고 있는 이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경제발전이 만인의 부를 추구한다.”라는 거짓은 들통 난 지 오래다. 이제는 기술을 개발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굳힐 생각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기술을 개발하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체제 속에 살아가며 반강제성의 노동, 그리고 경쟁으로 인해 자신을 신경 쓰기도 힘든데, 자신을 둘러싼 세계까지 생각해 보라니 말이다. 이렇게 눈을 뗀 사이 기술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해졌다.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기술이냐고 자문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의존해버린 나머지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신비화시키곤 한다. 사람들은 자기 몸이 보내는 메시지보다 기계의 신호를 더 잘 믿게 되었고, 자신의 뜻을 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었다. 이러한 기술발전은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사유하고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앗아간 것이다. 효율과 합리라는 단어 아래 서로간의 소통은 단절되고 대부분의 일을 기계에게 맡기곤 한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사회는 좌절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자리 잡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든 간에 목소리를 내려고 해도 금방 묻혀버리기 일쑤니 말이다. 인간들의 관계는 소통망 속에서 이루어지고, 넘쳐나는 정보를 통제할 수조차 없어졌다. 민중들은 그렇게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기술이 지향하는 바를 물어야 한다. 그것에 대답할 수 있으면 기술의 발전을 반대할 이유도 찾기 어렵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은 우리가 더 편리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기술이 아닌 스스로 행동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술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균형 잡히고 안정되어 건강한 삶을 사는 데 있어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은 고대의 기술이라는 점을 상기해 봤으면 한다. 현재 경제발전에 따라 형성된 이데올로기는 가장 최근에 나온 기술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기술의 가치는 그것이 사람과 사회,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으로 판단되어야 하지, 그것이 개발된 시간대로 판단돼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기술은 할 일을 대신해주고 생각을 대변해주는 척하며 우리의 행동양식과 인간성을 앗아가는 기술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레디컬 데모크라시>에서 말하는 근원적 민주주의가 해답이라 이야기하고 싶지만, 선뜻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안의 민중 권력은 실행이 이루어져야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빈익빈부익부, 전쟁, 경제발전을 멈춘 세계가 찾아올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기획해야 한다. 민주주의 권력은 동아줄처럼 위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 정신 상태를 가진 민중이, 그리고 그 정신 상태에 따라 움직이는 민중이 만든다. 정신 상태의 변화 가능성이 힘없는 자들의 힘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으며, 지속할 수 없다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떠한 제도로서 마련되는 게 아닌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민주주의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지만, 그렇다고 반짝 빛나다 사라지는 민주주의는 별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는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즉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어야 한다. 근원적이라는 말을 다시 살펴보면 민중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본바탕은 결국 모두가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기술과 경제발전에만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은 하이테크가 아닌 고대의 기술임을 인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대의 기술은 밥 짓기, 집짓기 같은 자립의 기술을 뜻하는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서로 토론하고 행동하며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민중이 권력을 잡는 것을 뜻한다. 부유한 이들, 혹은 정치세력에게는 경제적, 기술적으로 자립을 이룬 농부들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가장 끔찍한 악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제도화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민중들이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삶의 질서를 세울 수 있다. 근원적으로 바라보라. 민주주의는 결국 우리가 행함으로써 생겨난다. 근원적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근원적이다. 인류가 맨 처음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면 함께 농사를 짓고 무리를 지어 살아왔다. 근원적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근원적이다. 민주주의의 근원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민중 권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