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받아들이는 여정
옷장에 있던 반팔을 정리하고 세 달 가까이 옷장에 넣어둔 니트를 꺼낼 때가 되었다. 먼 훗날은 저 멀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와 있는 걸 체감하는 순간 시간의 흐름이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 반년 가량을 검정고시와 대학 입시에 매달려 있다가 해방된 지금, 내게는 어떤 감정이 머물러 있는 걸까. 해방감에서 드는 안도감일지, 혹은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에서 오는 초조함일지 너무나 궁금하다. 헛헛한 마음이 드는 지금이 아니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했던 순간의 나를 오로지 내 시선으로 들여다보기 어려울 것 같다.
작년 말쯤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자 대학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 보이듯 내가 성숙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게 해 준 이 공동체로 다시금 돌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가서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어떤 분야(내게는 그게 문학과 사회학이었다.)에 대한 전문성을 갖춰 준비하려 했다. 실제로 졸업을 하고 도서관에 다니며 수능 문제를 다루는 인강을 구매했고, 소위 ‘명문대’로 진학하려 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학교 친구들과의 만남이 차츰 뜸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는 만날 수 있었지만, 매일 만나다가 그 만남이 뚝 끊겨버리니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허전했다. 지금에서야 바라보면 세상에 나가 혼자 설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각자 갈 길이 바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도 찬밥처럼 방 안에 담겨 있으니 입시 공부를 위해 집이나 학원에서 꼼짝 못 하고 갇혀 있어야 하는 숨 막히는 삶이 그려졌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공동체 안에서 살아 숨 쉬었던 나를 잃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5년 동안 학교에 다니며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던 나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다가오자 너무 성급하게 대학 진학을 결정한 건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과정 속에서 학교 선생님, 마을 공동체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듣고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을 지내다 덜컥 대학에 안 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의 시선으로 본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고 고독의 가치를 알아도 행하기는 꺼려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동시에 입시 공부(수능)를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싫었다. 삶이 입시에 맞춰지고, 끊임없이 나를 몰아세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껴 결국 졸업한 지 한 달 만에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명문대로 진학하겠다는 포부는 금방 사라졌다. 학교 밖 더 넓은 세계로 향하지 않으면 새로운 관계를 맺지 못할 것이라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동호회나 모임 같은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막연하게만 생각한 것, 이게 문제였다. 막연하게만 생각해서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이유로 집에 늘어져 핸드폰만 하기 일쑤였다. 어차피 대학에 가지 않을 건데, 무언가에 몰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도서관도 꾸준히 갔지만, 타이밍 참 나쁘게도 장염에 한 번 걸리고 나니 생활패턴이 망가져 집에 늘어져 있었다. 그때 반복되던 생활은 일어나서 미디어에 빠져 살다가 저녁이 다 돼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하고 생각하다가 귀찮아서 덮어두고, 그날의 일기를 쓸 때 무망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물밀 듯 밀려오는 것에서 괴로움을 느껴 도피하고자 미디어 속으로 들어가는, 혼란스러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다가오는 현실과 마주치기 싫어서 피했던 것이다. 대학에 안 가겠다는 생각만 했지, 그 시간을 어떤 것으로 채울 건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아 방탕한 생활에 빠진 나는 한 달 남짓한 기간을 축 늘어진 채 보내거나 가끔 나가서 돈만 쓰고 오곤 했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게 살았다.
이렇게 자괴감이 쌓여 나에 대한 불신이 치닫던 와중에 학교가 개학한 3월에 지원교사로 가게 되었다. 이때도 정체성에 혼란이 있었다. 학생은 아닌데, 그렇다고 선생님도 아닌 중간의 어딘가에서 조금 헤매기도 했다. 다행히도 주에 두 번 정도 학교에 나감으로써 멀리 했던 책과 글을 가까이할 수 있었다. 집에선 하는 게 없으니 핸드폰밖에 할 게 없었는데, 학교에 나가고부터는 시간을 조금씩 나눠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전보다 마음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시간과 거리를 두고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때서야 내가 어떤 것에서 가치를 느끼는지, 내게 필요한 건 무엇인지를 알아가다 다시 대학 진학에 대한 고민을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끄집어냈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게, 나 혼자 한 고민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과 대화하며 나왔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대학은 무조건 수능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능만을 위해 방 안에 틀어박혀 지적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것에 몰입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검정고시와 면접(학생부종합)을 위주로 하는 수시는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이랬던 내게 선생님은 내가 잘 맞는 학풍을 지닌 수시 전형이 있는 학교를 추천해 주셨고, 대학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었던 나는 고민 끝에 넓은 세계로 발을 들이고자 했다. 이때의 일기 내용을 가져오면, “참 길게 돌아왔다. 야구할 때도 내 폼을 찾느라 그렇게 오래 걸렸는데,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찾는 게 참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수시 모집에 지원해 보기로 한 내게 필요했던 건 검정고시였다. 그것도 합격 정도가 아니라 꽤 높은 점수가 필요했다. 당장 4월에 있을 검정고시를 한 달 안에 준비해야 해서 빠듯한 삶을 살았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초가 많이 없고 기피하기만 했던 수학을 인강을 통해 공부했고 내가 공부머리가 좋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에 수업을 가는 날과 가지 않는 날의 공부 양을 조절하며 한 달 동안 매진했다. 그러나 시간의 제약도 영향이 있겠지만, 내가 진심을 다했는가라고 스스로 반문해 본다면 그건 또 아니다. 적당히 공부하고 놀기도 놀고 가끔은 퍼질러져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너무 늦게 시작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말이다. 노고 끝에 시험을 치른 날에 점수도 굉장히 애매하게 나와서 잠깐 흠칫했던 때가 아직 생생하다. 공부할 때 밀려오는 불안감을 내년(재수)에도 느끼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8월에 있을 검정고시를 생각하고 길게 보고자 했다.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남아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시험에 대한 미련은 잠시 제쳐둔 채 친구들을 만나 오랜만에 다 같이 시간을 보냈을 때 내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즐거워한다는 걸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지난날 방황했던 내가 생각나 잠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4월의 나에게 2,3월의 나는 그저 애송이었다.
4월에 있던 검정고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던 계기가 한 가지 있었다. 4월 말에 후배들의 학년여행에 지원교사로 함께했을 때인데,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배움이 될 수 있도록 작은 것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고 부족한 나를 비춰보기도 했고, 아직 학생인 후배들의 언행에서 나오는 순수함과 진실됨이 너무 예뻤다. 학생일 때의 시선과 졸업생일 때의 시선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니 이런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선배가 되고 싶지 않았다. 후배들과 함께했던 경험 덕분에 삶을 조금 더 진실되게 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자세한 내용은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라는 글을 참고해 주시길.). 동시에 졸업하고 잊고 있었던 내 곁의 여러 존재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무기력했던 지난날의 나와 여행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후배들의 모습을 나와 비교해 보며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학생의 신분으로 학교라는 안전한 곳에서 배워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느꼈던 오묘한 순간 속에서 성실, 책임과 같은 중요한 가치들을 새롭게 발견해 나갈 수 있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여행 속에서 함께 부대껴 살며 지냈던 후배들과의 기억이 없었다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다녀오고부터 많은 걸 배웠던 나는 다시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했어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정의로 향하는 여정을 다시 밟게 된 나는 올해의 마지막을 대학 합격으로 장식하겠다는 목표를 내건 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동시에 학교에서 운동을 가르치는 법을 배우며 더 넓은 시선을 갖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멈춰 있던 배움의 시간이 흐르니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의 핵심인 ‘고독’이라는 것을 즐기고 필요한 것에 매진할 수 있었다. 캄캄한 밤이 와도 마주 잡을 손 하나는 있었다.
8월 검정고시까지 남은 세 달 정도 되는 시간에 영어와 과학 공부에 매진하던 중 검정고시 점수가 전보다 낮아진 나를 놀리는 친구들이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방황했던 경험을 갖고 있던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산란한 무감각의 세계 속으로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한 번에 끝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 열심히 임했다고 보기 힘들었던 4월 검정고시와는 다르게 한 큐에 끝낸다는 생각으로 임한 8월 검정고시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아무리 면접 비율이 높다고 해도 기초 성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울 거란 이야기를 들어서 매진한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다행이었다. 이때 공부를 하며 느낀 건 내가 어떠한 지식을 습득한 것에 대한 즐거움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을 하는, 삶의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한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미래의 내가 되어 현재의 나를 바라볼 때 자신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때까지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를 구상한다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방황했던 시절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 불안했던 거였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쓴 내가 들어갈 문이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과거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전태일 열사가 말했듯 과거가 불우했다고 과거를 원망하면 그 과거는 내 영역의 사생아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미래는 불안해도 전처럼 나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방황하고 부딪치며 나도 모르게 성숙의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느끼니 불안해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느낀다. 커가는 것은 내 앞의 불안을 떨쳐내는 게 아니라 불안을 안고 살아가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기르는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처럼 갓 사회로 나간 19살의 청년에게는 더더욱. 그러나 삶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기르는 과정이 아닐까. 아무리 입시위주 교육과 물질만능주의 사상이 판을 쳐도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는 법을 배우는 거다. 이제는 불안하지 않다. 학교 다닐 때 수도 없이 많이 들어왔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직접 깨달았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의미부여를 하며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조금 돌아왔지만, 나에게 있어 삶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그 사람들이 속한 사계로 들어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참 길게도 방황했다. 그러나 이 방황의 과정 속의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만약 방황의 과정이 없었다면? 졸업 후 자립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교에서 후배들을 만나는 귀중한 경험, 진학을 위해 필요한 검정고시에 몰입했던 경험과 더불어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며 세상에 나 혼자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불안을 안고 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 왔던 책과 글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내 주변에는 좋은 어른들이 너무나 많았다. 삶에 대한 조언을 얻기도 하고, 배울 점들을 찾아내며, 혹은 만들어내며 나에게 접목시키고자 했던 과정을 거쳐 한 뼘 더 자란 지금은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신의 입을 빌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느니.”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방황했다. 더 나은 인간 된 삶을 살려고 여기저기 치이고 혹은 도망치기도 했다. 불안에 의한 방황이었다. 그러나 불안 덕분에 더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삶의 조건으로 기인할 때 그것은 악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빌려보면, 불안은 내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게 만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해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진리로 향하는 빛을 보려 애썼다. 불안을 안고 살 수 있게 된 이제 말해도 되지 않을까.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결과적으로는 대학에 붙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학교에 다닐 땐 방학을 해도 다음 학기가 있다는 생각에 허송세월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졸업학년이 다가오자 그간의 생활을 후회하며 마지막 한 해를 위해 운동을 하고 책을 읽으며 다음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학교를 더 잘 다니기 위한 준비였다. 이번에도 똑같다. 대학에 붙었어도 기쁜 건 하루로 족하다. 남은 기간 동안 내 삶에 충실해야 한다. 학교에서 후배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 입시로 바쁜 3개월 동안 글을 놓고 있었더니 지금 이렇게 글 쓰는 것조차 어려운 걸 실감한다. 앞으로의 불안을 안고 살아갈 내가 더 넓은 세계로 향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하는 지금, 내게 찾아온 건 안도감도, 초조함도 아니다. 성숙에 이르는 길을 위한 배움을 갈망하는 배고픔이다. 진리로 향하고자 하는 인간 된 노력과 갈망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