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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Jun 29. 2024

8. 구원이 아닌 해방의 글쓰기, <더 웨일>


영화 <더 웨일>을 '구원'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많습니다.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천지창조 7일의 형식을 빌려왔고, 토마스라는 젊은 선교사가 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겠다며 그를 자주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선교활동을 하던 중, 전도 방식의 문제로 선배 선교사와 마찰을 빚고 성금을 훔쳐 도망치면서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배교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찰리를 구원하고자 했던 이유는 어쩌면 자기 행위에 대한 죄 사함, 자기 구원이 아니었을까요. 


신에 의한 구원이든, 타인에 의한 구원이든,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고 비루합니다. 남이 알아주길 기다리는 일은 요원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알아주는 일은 더 가깝습니다. <더 웨일>의 찰리는 구원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가 사랑해서 아내와 어린 딸을 버리고 선택했던 사람이 구원을 이야기하는 종교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 아닌 해방을 도모합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육체에 갇힌 그는 소설『모비 딕』의 흰고래이면서, 에이헤브일지도 모릅니다. <더 웨일>은 거대한 운명 그리고 그 앞에 선 왜소한(혹은 지나치게 비대한) 단독자, 한계라는 말이 반드시 신념과 의지를 포기하게 만들지 않는 삶을 보여주는 소설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 첫 장면 노트북 모니터 정중앙, 카메라가 꺼진 찰리의 화면은 텅 비어, 마치 깊은 어둠처럼 보입니다. 

에세이 쓰기 수업을 하는 찰리는 연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폭식으로 272kg의 초고도 비만이 되었습니다. 비만 때문인지 울혈성 심부전(여러 원인으로 인해 심장이 신체 조직이나 기관에서 필요한 혈액, 특히 산소를 공급할 수 없는 병태생리학적 상태)으로 숨쉬기조차 힘들어합니다. 음식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질식사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찰리를 돌보는 리즈에 의해 고비를 넘깁니다. 리즈는 찰리의 연인이었던 사람의 여동생입니다. 리즈 또한 오빠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찰리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상실은 언제나 죄책감과 함께 오는 것 같습니다. 

상실감은 자기 내부의 스러짐보다 외부와의 단절에서 주로 찾아옵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달라지면,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변화는 너무나 빠르고 마음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므로 삶에 구멍이 생깁니다. 그곳을 우리는 죄책감으로 메웁니다. 죄책감은 우리가 자기 안에서 꺼내기 가장 쉬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내가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 "내가 더 신경 써줄걸" 하는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또한 관계의 단절과 같은 상실의 경험에서도 "내가 잘못했다.",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았다."라는 자책감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상실은 우리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주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이나 결정에 대한 죄책감도 동반합니다. 이러한 죄책감은 상실의 극복을 어렵게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죄책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글을 쓴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찰리


하지만 죄책감을 받아들이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파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찰리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혐오감을 표현하는 이들의 감정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웁니다. 자신의 생명을 곧장 끝낼지도 모를 음식들을 마구 입에 집어넣고 결국 게워 냅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자신에게 쌓인 후회나 자기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몰아내고 싶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였는지도 모릅니다. 정신건강의학에서는 이를 거식증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었던 가장 능동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음과 몸은 결국 분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니까요.



"누군가가 누군가를 구할 있다고 믿지 않아."

찰리의 곁은 지키는 리즈는 친오빠에 이어 죽어가는 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고?" 

리즈에게 다시 물어보는 찰리, 사실 영화 내내 그들이 서로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미안해'였습니다. 친오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리즈가 오빠의 찬란한 시간 속에 함께 있었던 찰리를 필사적으로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찰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리즈는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찰리를 보며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합니다. 상실로 인한 마음속 어딘가가 텅 빈 존재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은 미안해하거나 죽일 것처럼 증오하는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딸 엘리가 찾아옵니다. 찰리는 자신의 선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지만, 딸 엘리는 아빠를 잃었습니다. 엘리는 ‘자신이 아빠에게 버린 받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찰리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표출합니다. 이런 엘리의 모습을 보며 찰리는 그녀가 8학년(한국나이 15살) 때 쓴 소설『모비 딕』에 관한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말합니다. 


'허먼 멜빌의 놀라운 소설인 모비 딕에서, 소설 속 저자는 바다에서 겪은 일을 회상한다. 소설 첫 부분에서 이스마엘이라는 저자는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퀴퀘그라는 자와 숙소를 나누어 쓰고 있다. 저자와 퀴퀘크는 교회에 갔다가 에이헤브라는 해적 선장의 배에 오르게 되는데 에이헤브는 한쪽 다리가 없고 모비 딕이라는 하얀 고래를 죽이려는 마음뿐이다. 소설 내내 에이해브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그의 삶은 온통 그 고래를 죽이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고래는 에이헤브에게 어떤 감정도 없고, 그가 자신을 절실히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점이 슬펐다. 고래는 단지 크고 가여운 동물일 뿐이다. 에이헤브도 가여웠는데, 고래만 죽이면 그의 삶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매우 슬펐고, 등장인물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슬펐던 것은 고래에 대한 묘사들뿐인 따분한 장을 읽을 때였는데, 저자가 잠시라도 우리를 그의 슬픈 이야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의 삶을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해 주었다. 나의…'


찰리는 딸이 쓴 진솔한 에세이를 좋아했습니다. 급격하게 불어난 체중으로 위기가 올 때마다 엘리가 쓴 에세이를 읽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증상이 가라앉습니다. 에세이의 내용을 모두 외우고 있음에도 굳이 딸이 쓴 종이를 꺼내는 이유는 그 에세이가 엘리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찰리가 한 일 중 최고로 잘한 일이 엘리를 낳은 것이기 때문에 그 에세이를 대면함으로써 죄책감을 약간이나마 덜고, 공허함의 일부를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찰리는 삶의 무게에 질식할 것 같을 때마다 딸의 에세이를 읽습니다. 솔직한 태도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에세이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의 에세이는 무엇보다 진솔했고, 엘리다웠습니다. 찰리는 그런 의미에서 딸을 버린 존재가 아니라, 딸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사랑했던 아빠였지 않을까요. 그에게 에세이란 자신을 가둔 '몸'이라는 감옥과 자책과 죄책감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해방되는 도구였습니다. 


찰리를 보고 있으면 록산 게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성폭력을 경험한 이후, 그녀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먹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190cm에 190kg이 넘는 거대한 체격을 가지게 되었고, 매 순간 자신의 몸 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솔직하게 쓰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의 고통과 자기혐오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일 아침에 날씬한 몸으로 일어난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내가 지난 30년 동안 끌고 다녔던 짐을 여전히 끌고 다닐 것임을 안다. 이 잔인한 세상에서 뚱뚱한 사람으로 살아온 그 수많은 세월이 남긴 흉터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을 것이다.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내가 이 흉터를 단 하나도 걷어내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언젠가, 어느 날 내가 이 흉터의 대부분을 잘라내는 것이다.'-록산 게이, 『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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