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에서 만난 라디오 같은 모임
중학생 2학년이던 어느 여름날, 방학숙제를 위해 책상 앞에 앉은 나는 배경음악이 필요했다. 늘 듣던 음악이 지겨워진 찰나 발견한 라디오 어플. 그때부터 나는 라디오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거의 라디오와 함께 생활했다. 굿모닝 FM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신나는 음악에 맞춰 내적 댄스를 췄다. 밤에는 푸른 밤을 들으며 연애 상담에 같이 공감하고 다양한 사연들을 들으며 울고 웃었다.
특히 종현의 푸른 밤을 정말 좋아했다. 지친 하루 끝에 종현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지만 속마음을 터놓은 사연들을 들으며 청취자들과 내적 친밀감까지 생겼다. 종현이 푸른색 양복을 차려입고 온 마지막 방송날은 정말 너무너무 슬펐다. 그날 라디오 막방을 들어야 한다며 아무도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신신당부하고 고도의 집중력으로 책상 앞에 앉아 라디오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속절없이 가는 2시간이 너무 아쉬워서 울음을 참다 터져버린 종현과 함께 엉엉 울었다.
나는 라디오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나에게 라디오는 소통의 창이었고 더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나의 감수성이 가득 담긴 티백을 따뜻하게 우려낸 소중한 차 같은 존재였다. 라디오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듣는 게 참 좋았다. 등굣길에 있었던 일들, 오늘 하루 속상했던 사건, 생일이라며 축하해 달라는 사연까지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타인의 소소한 일상들이 좋았고 그 이야기들을 세심하게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청취자와 디제이의 소소한 연대가 참 좋았다. 라디오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아날로그 감성이었다.
무엇보다 익명으로 참여가 가능해서 사람들이 더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소소한 고민은 얼마든지 친구들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이나 심각한 일들은 쉽게 털어놓기 쉽지 않다. 나의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나면 오히려 그것이 나의 약점이 되어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 비밀이라며 너만 알고 있어라고 말해도 다음날 학교에 가면 대부분 친구들이 공공연히 다 알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타인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 라디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소소한 이야기라도 디제이와 청취자들이 마음을 다해 공감해 주는 이처럼 착한 매체가 또 있을까. 거기다 사연에 안성맞춤인 선곡까지 나오는 라디오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체이다.
요즘 나는 라디오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독서 모임에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독서 모임 중에서 대화의 장이라는 만남이 있었다. 대화 주제가 담긴 카드를 각자 골라서 해당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대화 주제가 가벼운 질문부터 철학적인 질문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내가 고른 카드는 과거의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였다. 과거의 나라니… 어떤 나를 이야기하지? 그 카드를 고른 뒤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과거의 여러 모습들 중에 어떤 걸 이야기해야 우스워보이지 않고 만만해 보이지 않을까 열심히 고민했다. 과거의 모습들 중에 그나마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적당한 내 모습을 찾느라 바빴다. 겨우 찾아낸 과거의 나는 거절하기 힘들어했던 나였다. 거절하는 게 미안하고 상대방 눈치도 보여서 거절을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지만 이제는 적당히 거절을 하며 나를 지킬 힘이 생겼다고 이야기했다.
고르고 골라 적당한 과거를 드러낸 나와 달리 다른 분들은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들의 과거 모습을 이야기했다. 힘들고 불안하고 우울했던 과거, 사회화가 덜 된 어릴 적 자기 모습들을 이야기하는 분들을 보며 나는 좀 부끄러워졌다. 검열하듯 과거의 나를 선별했던 나와 달리 남 이야기하는 것처럼 감정을 빼고 과거를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분들의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과거의 자신을 드러내는 그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였을텐데 가까운 친구도 아닌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해당 내용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감정에 떳떳하구나. 그때의 모습을 묻어두고 외면하고 있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줄 아는구나. 과거 자신의 모습을 이미 극복하고 지금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나도 힘들고 불행했던 어두운 시절이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뭔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낯선 분들 앞에서 나의 초라한 모습을 이야기하기 싫었다. 나는 아직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나의 불행을 그땐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너무 좋아.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작아 보였다. 결국 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라디오 같은 매체를 통해서만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인가? 아직 내가 미성숙한 걸까?
대화의 장 모임에 참여하면서 라디오에서만 들었던 타인들의 속내를 실제로 듣는 기분이었다. 평소에 친구들하고도 잘하지 않는 대화의 주제로 깊이 있는 대화를 하니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 같았고
저마다 각자의 고민과 걱정을 품고 사는구나.
사람 사는 게 별반 다르지 않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위로를 얻었다.
아직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곳이 다이어리밖에 없지만 조금씩 용기를 가져볼까 한다. 나의 행복이든 불행이든 주눅 들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내공과 여유를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