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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한나라의개짱이 Jan 08. 2024

이토록 공격적인 세상에서 사회인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이선균님의 죽음을 보며

이선균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이 있었고, 처벌을 받아야지 왜 죽느냐고 분노하는 사람도 있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추모할 죽음이 아니라며 추모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조사를 통해 죄가 밝혀진다면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나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나는 그가 왜 죽어야 했는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들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타인의 잘못에 지나치게 엄격하고, 

모두가 쉽사리 타인을 심판하고 비판하려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를 떠밀지 않았을까.

30대 직장인으로서, 그와 너무 다른 시공간을 살아감에도 나는 그가 처한 환경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떠오른 과거의 시간이 있었다.

2019년 10월, 가수 설리님이 목숨을 끊었을 때 썼던 일기가 있었다. 

난 이때 회사에 입사한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사회 초년생이었다. 


회사 생활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 여기고 있었다. 유난히 타인의 말에 상처도 잘 받고, 눈치도 많이 보는 성격이었다. 

난 설리님에게 많이 감정이입을 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선택을 보며 이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회사에서 버텨낸다는 것에 굉장한 위기감과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4년 전의 어린 내가 썼던 일기를 첨부한다.



설리가 죽었다.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브래지어의 착용 여부나 예능 프로그램 출연 등 여러 가지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던 그녀였다.
내 인스타 피드는 물론 구글 뉴스에도 자꾸만 등장해 내가 '관심 없음' 항목을 눌러야 할 정도였다.
이처럼 활발히 활동하고 외부와 상호작용을 하던 그녀가 급작스럽게 본인 삶의 스위치를 내려 버렸다.
활발히 활동하던 사람이 이토록 급작스럽게도 세상을 떠난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연예인의 죽음보다도 가깝게 다가왔다. 알 수 없는 허무함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꿈틀거림이 온 마음을 채워버렸다.

이때 나 역시 고민이 많았었다. 삶의 지속 여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던 그녀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꽤나 무거웠던 이야기였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휴가를 언제 쓰느냐, 며칠을 쓰느냐 같은 문제였다.  
그런 나에게 부장님이 눈치를 줬다. 또 여행 갈 거냐고, 일은 어떻게 하냐고. 어찌 보면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언질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통제나 지적들이 쌓여 나를 몹시도 흔들리게 했다.
고민하다가 설리의 일이 있었다. 순간 나는 모든 일이 바보 같아 보였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무너졌다. 그녀조차 무너졌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내가 그녀와 대화를 해본 일이 없으므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나,
지금껏 걸어왔던 행보와 언행들을 보아올 때 꽤 단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내부에 자신을 지탱하는 기둥이 있는 사람임을.
적어도 나보다는 주위 시선과 압박에 흔들리거나 눌리지 않고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
주위의 숱한 시선과, 압박과, 도마질에도 꿀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였었던 그녀다.
그 소신이 옳고 그른 걸 가리기 전에 그 태도만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나처럼 주위 시선을 많이 살피고, 부품이 되어 소진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더더욱.
그러나 결국 그녀조차 최후에는 그걸 이기지 못했다.
스스로를 지키려 발악하다가,
끝내  굽히지 않았던 그녀는 대신 스스로를 부러뜨리는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다.
환경과 주위 사람들이라는 게, 그들의 시선과 입방아, 사회의 기대, 보편적인 상식, 평균적인 행동 등등 이러한 모든 압박들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
그에 끝끝내 대항하다 끝내 가버린 삶은 얼마나 허무한지.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녀처럼 온몸으로 그녀에 대항했나?
그녀처럼 온몸과 본인의 온 생애를 다해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고, 스스로를 위협에서 지키기 위해 격렬히 반항했는가?
아니다.
그냥 재미 삼아, 혹은 그녀를 흠집내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거나 자존감을 채우고자 , 혹은 그녀를 평가하고 체벌함으로써 얻는 소소한 권력감을 느끼고자 그랬던 거다.
무심코 던진 돌이었고, 그녀는 맞아 죽은 개구리였다.  


지금 나는 개구리가 되어가고 있다. 무심코 던지는 돌들을 가까스로 피하고 있다.
어떻게든 돌에 맞지 않으려 논두렁 구석에 숨어 벌벌 떠는 개구리가 되고 있다.
나와 같은 개구리였던 그녀를 보며.
결국 참지 못해 스스로를 불살라 버린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지금 여기서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의 말이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줄 수 있나? 그들이 내 삶을 결정지어버릴 힘이 있나? 그들의 언행에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면 내 삶이 무너지는가? 그들은 진심으로 내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혹은 진심으로 나를 통제하거나 바꾸기 위해 내게 입을 대는가? 그들이 하는 말을 따르면 나는 행복해지는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한 번만 양보하면 다음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이 내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가?
그들의 말은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깊이도, 반성도, 통찰도, 나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냥 뱉어진 말이다.
스스로의 기분을 충족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상받기 위해 나를 통제하려 하는 것뿐이다.
그저 본인의 맘에 쌓여가던 젊은 세대에 대한 불만, 스스로가 현세대에서 배제되어 가는 느낌을 지우기 위해, 또 본인의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지우기 위해 나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결코 내 삶을 결정지어버릴 힘이 없다. 그들의 말을 어겨도 내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의 조언을 따라봐야 내게 행복은 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를 받아들이며 목줄을 걸게 되는 셈이다.
나는 통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고 더 눈치를 보게 되고, 그들은 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 나를 통제하려 하겠지.
저항하자. 하고픈 걸 하고 살자.
내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을 하자. 매일매일 하나의 부품이 되어 소진당하고, 부유하고, 마모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기나긴 지루한 삶 중에 겨우 며칠 간의 휴가조차 맘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내 삶에 희망이 있을까. 살아갈 의미가 있나.
차라리 '요즘 것'이 되어 버리자. 그들이 포기해 버리도록. 우리와 다르다. 맘대로 통제할 수 없다. 이런 걸 느끼게 만들어 버리자.


 4년 전의 나는 많이 흔들렸던 것 같다. 짧은 일기에 모두 담기지는 않지만 사회로 처음 나오게 되면서 '나'를 바꾸기 위한 무수한 외부의 통제들에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들,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끝이 없었다. 내 개성과 성향, 취향은 결코 드러낼 수 없었다. 업무방식, 복장, 휴가, 말투, 심지어는 메뉴를 고르는 것조차. 

나를 지킬 것이냐, 튀지 않게 나를 죽이며 어우러질 것이냐 사이에서 늘 헤맸다.


 4년 전에 사람들은 설리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사회초년생이었던 내게도 잘못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사회인'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 속에서 '나'를 너무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결코 참지 않았다.




물론 이선균님과 설리님을 동등하게 비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선균님은 마약투약이나 유부남 신분으로 유흥업소의 출입 등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옹호할 수 없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죄를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죄가 확정되기 전에 그가 이미 지나치게 벌을 받고 있진 않았을까 돌아볼 수밖에 없다. 여러 번 죄인처럼 포토라인에 섰고, 온갖 기사와 콘텐츠는 그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공격했고, 무수히 쏟아지는 대중의 돌팔매를 견뎌야 했다.


마땅한 처벌을 받기 전에 그는 이미 끝도 없이 사회적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혐의를 받던 지드래곤은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우리 모두가 꼭 타인을 심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우리가 잘못의 경중과 진실의 여부를 가릴 수 있을까. 혹은 그러할 권리가 있을까.


타인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어쩌면 그 사람의 영혼에까지 깊은 상처를 새길 수 있는 일이기에

지금보다도 조금은 더 무겁게 여겨야 할 일은 아닐까.



영화관에서 나를 울려버렸던 대사가 있다.

영화 '에브리씽에브리웨어올앳원스'에서 오는 대사다.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버티고 있어. 이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



모두가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건너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내 삶에도 타인의 삶에도 조금만 더 다정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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