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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한나라의개짱이 Apr 05. 2024

영업담당자 삼백명 만나고 느낀 영업/보고 잘하는 법

 이 글은 영업담당자 백명 만나고 느낀 영업 잘하는 법에 이은 두 번째 글이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 나는 대기업 유통회사에서 MD로 근무하고 있다. MD는 상품을 선정해서 매입하거나 신상품을 개발하고, 해당 상품들을 운영하는 일을 한다. 업무의 특성상 거의 매일 서로 다른 회사의 영업담당자들과 미팅을 하게 된다. 일정이 겹치는 날에는 하루에 세네명 이상의 영업사원들을 만나기도 한다. 만나는 사람은 사원부터 임원과 대표까지, 만나는 회사는 작은 가족기업에서 대기업까지로 다양하다. 


  처음 만난 분들께 받았던 명함을 세어보니 어느새 300장이 훌쩍 넘어있었다. 심지어 이사를 하며 상당수를 잃어버렸는데도 그렇다. 나는 이들과 내가 운영하고 싶은 품목과 상품 개발 등에 대해 논의한다.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업무들을 협의를 통해 처리하고 상품의 운영과정 중 생기는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간다. 그러다보니 늘 이들에게 '제안'이나 '보고'를 받게 된다. 내가 상사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게 주된 업무라서 그렇다. 이들은 내게 본인 회사의 상품을 판매해야 하고, 발생된 문제와 해결방법에 대해 내게 설명해야만 한다.



6년 간 MD로 근무하며 받은 명함. 이사를 하며 꽤 잃어버렸는데도 세어보니 300장이 넘었다.




 내가 대표가 아닌 이상, 혹은 여러 명이 수평적으로 일하는 소수 스타트업의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의 직장인들은 모두 피라미드식 관료제 안에서 일한다. 이 때문에 '보고'란 직장인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 지시받은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혹은 상사가 알아야 할 현안이 어떤게 있는지 보고하는 게 직장 업무의 기본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수백명의 영업담당자들을 만나고 수천 건의 미팅을 진행하며 상사들의 시선을 이해하게 됐다. 어떤 보고가 좋은 보고고 어떤 게 좋지 않은 보고인지를 깊이 체감했다. 이제부터 내가 영업담당자들을 만나며 느꼈던 좋은 보고의 공통점들을 말해볼까 한다. 그들과 상하관계도 아니고 함께 진행한 다양했던 업무를 보고라고 퉁치는 것이 적절치 않을 수 있으나 업무의 특성상 보고와 같은 형식을 띈다는 점에서 해당 표현을 사용함을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첫째. 간결하게, 결론부터 말하라는 거다. 


 이 글은 보고를 위함이 아니고 끝까지 읽히기 위함이니 결론은 뒤에 배치했다. 그러나 보고의 목적은 상황 전달 및 의사'결정'을 받는 것이다. 보고는 반전영화가 아니다. 기승전결이 중요한 드라마도 아니다. 중요한 건 결론이다. 결론이 먼저 나와야만 한다. 그게 듣는 사람을 배려하는 보고다. 뒤이어 나올 상황설명들을 따라가기거나 의사결정을 하기도 편하고, 의사소통도 훨씬 효율적으로 진행된다.


 미팅을 하다보면 말이 긴 사람들이 참 많았다. 


"MD님,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새로운 설비를 들여왔는데요. 해당 설비는 원가를 절감할 수 있어서 ......
일전에 제안드렸었던 상품은 가격 구조 때문에 선정되지 못했었는데  ......
그래서 이 소스를 한 번 매입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아 가격이요? 이게 원료인 고춧가루는 국내산은 가격이 비싸고  ....
이 포장 PET는 얼마기 때문에  ......
원가는 한 번 산출해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내가 궁금한 건 내가 매입을 결정할 상품의 원가다. 그는 결국 내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은 셈이다. 시간과 인내심을 들여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나는 허탈해진다. 미팅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결론을 간결하게 말하는 사람과 미괄식으로 썰을 푸는 사람, 이건 성향의 문제다. 화법의 차이일 뿐이다. 뭐가 더 낫거나 옳은가의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업무에서는 의도적으로라도 결론부터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보고를 듣는 사람이나, 보고를 통해 결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 모두를 위해.



 나는 보통 위와 같은 상품 제안을 수도 없이 받는다. 이미 봤던 상품도 많고, 판단 기준도 나름 확고하다. 상대가 어떤 제안을 할지, 어떤 문제인지도 익숙하다. 매입을 결정하기 위해 원가나 물량 같은 핵심적인 정보를 빠르게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의사결정자들도 마찬가지겠다 싶었다. 보고가 길어질수록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단 하나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들은 하루에도 수십 건의 보고를 듣고 의사결정을 진행한다. 결론을 듣기 위해 긴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긴 보고나,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찾게 만드는 보고는 인내심을 시험한다. 



 뇌과학에 따르면 결정하는 힘은 뇌의 에너지를 엄청나게 많이 사용하는 일이라고 한다. 결정력은 한정된 자원이라고 한다. 업무의 막바지쯤 가서는 특히 그들에게 결정할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마치 헬스장에서 근육 운동을 할 때 마지막 세트 쯤에 근육이 지쳐 무게를 들어올릴 힘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결론부터 말하는게 좋겠다. '무엇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할 지 찾게 만들지 말고, '어떤 결정'만 내리면 된다고 떠먹여 줘야 한다. 



'판매 중인 식품 A에서 이물질이 검출되었네요. 이유는 이물이 너무 작아서 거름망을 통과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요?'


위와 같이 간결하게 몇 문장으로 요약해서, 하고자 하는 말과 결정 내려야 할 상황의 범위를 정해주면 좋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우선 판매 중인 상품은 모두 회수해서 전수검사를 진행해 주시고, 공정에서 거름망을 더 촘촘한 것으로 교체해주세요.

 

그 뒤에는 간결하게 상황설명을 덧붙이거나 들어오는 질문들에 대답하며 설명을 이어가면 된다. 그런 영업사원과는 일도 술술 잘 풀리고, 업무 진행도 빠르다. 당연하게 성과도 잘 난다. 반대의 사람과는 진이 빠지기 때문에 전화도 미팅도 꺼려지게 된다. 





두 번째, 숫자로 이야기 하자.


 잘 팔립니다. 상당히 좋습니다.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대답은 사실상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를 하나도 주지 않은 것과 다름 없다. 무언가를 질문했을 때 이런 대답이 돌아오거나, 의사결정을 위해 어떠한 근거도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상대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의 실력과 연관짓게 된다. '일을 못하는 사람이군.' 



 수치와 숫자로 말하면 훨씬 더 임팩트 있고 간결하다. 내가 오늘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상품은 단백질 음료다. 용량은 200ml, 가격은 2,980원. C마켓에서 한 달 매출이 1천만원 정도 한다. 당신 마켓에 이게 없는 걸 확인했다. 괜찮으시다면 상품의 컨셉과 특징 등에 대해 부가설명 드리겠다. 


 얼마나 깔끔한가. 미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제 나는 결정하고 제안한다. "차별화로 제로슈가 컨셉도 가능한가?" "페트병으로도 제작할 수 있는가?" 협력업체의 담당자는 대답한다. "페트병도 가능하다. 다만 최소생산물량이 10만개 증가한다." "제로슈가로 제작시 원가는 10% 비싸진다. 진행하시겠느냐?" 보고와 미팅은 이렇게 진행되는 게 합리적이다. 


 영업담당자들 입장에서는 나를 설득시켜야 하니 당연히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말이 길어진다고, 부연설명이 많아진다고, 숫자 없이 추상적인 어필이 가득하다고 고객이 설득되진 않는다. 상대를 답답하게 만들고 그와 일하는 것을 지치게 만들 뿐이다. 숫자와 수치를 통해 간결하게 제안하고, 상대의 의사결정을 돕는 사람이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숫자로 말해야하는 건 MD뿐만이 아닌 것이다. (이전 브런치 글 '이것도 못하면서 네가 MD야?' 참조)





마지막 세번째. 선택지를 주어 직접 결정하게 해라.


 광범위한 조건을 주고 의사결정을 요구하거나 그저 상황만을 설명한 후 어떻게 할까요라며 묻는 건 그다지 좋은 제안이 아니었다. 위의 단백질 음료 사례로 돌아가보자. 


A 사원 : MD,님, 단백질 음료 맛은 초코맛, 바나나맛, 고소한 맛 어떤 걸로 결정하시겠어요? 

B 사원 : MD님, 단백질 음료의 매출은 초코맛이 50%, 바나나맛이 30%, 고소한 맛이 20% 정도 입니다. 초코로 먼저 시장 반응을 살핀 후 확대하면 안전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 사람 중 어느 사람과 일하고 싶은가, 어느 사람의 제안을 수락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B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B는 선택지를 주고 의사결정의 범위를 좁여줬다. 수동적으로 의사결정을 요구하는 모습보다 적절한 근거를 통해 선택지를 제시하는 모습이 훨씬 유능해 보인다.


 영업의 성과 역시 A보다 B가 좋을 수밖에 없다. 나의 결정을 요청하는듯 보이나 사실상 그는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의 범위를 한정해버린 상태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간 셈이다. 나는 자연히 다른 선택지 대신 그가 내민 조건들 안에서만 고민하게 된다.


 이런 제안 방식은 간결하고 효율적이며, 상대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서 설득의 성공 확률을 높인다. 난 의사결정의 에너지와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주도적으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효용감을 느낀다. 영업담당자는 유능하다는 인식을 줌과 동시에 본인 제안의 수락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영업 할 때 뿐만 아니라 문제상황과 이에 대한 해결책을 보고해야 할 때도 같다. 상황만을 설명한 후 포괄적으로 의사결정을 기다리는 것과 나름의 해결책과 선택지들을 제시한 후 결정을 요청하는 건 다르다. 너무 당연하게도 후자의 보고자가 훨씬 더 유능해 보일 것이다. 전자의 보고자는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라는 짜증 섞인 대답을 들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주의할 점은 해결책을 너무 명확하고 단정적으로 한 가지만 단언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상대가 한 가지 제안을 강력하게 어필하면 일단 의심부터 한다. '왜 초코맛을 미는 거지? 저게 원가가 더 싼가' '초코맛의 재고가 많이 처져서 초코맛을 일부러 더 어필하는 건가?' 내게 손해가 되고 그에게 이익이 되는 제안을 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일단 부정적인 태도로 그의 의견에서 반박할거리나 문제점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는 보고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종종 통보식의 보고에 불쾌감을 느끼거나 내가 제안한 해결책에 일단 꼬투리부터 잡는 상급자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지를 주며 상대에게 결정을 내리게 하는 거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더 좋은 선택지, 혹은 내게 더 유리한 선택지 쪽에 조금 더 매력적인 근거를 배치해서 설명하는 거다. 이런 방식은 상급자에게 선택지를 주었고 그가 직접 결정 내리게 했기 때문에 두루뭉술한 보고의 무능해보임도, 통보식 보고의 위험도 피해갈 수 있다. 그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해결책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일방적인 질책을 피해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영업도 보고도 대화도 나는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듣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 우리는 결국 모두 말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만 하는 과업들을 짊어지고 산다. 나는 MD로 일하며 운 좋게 듣는 사람이 되는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듣는 사람을 배려할수록 결국 나에게 말할 기회가 더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내 말이 오히려 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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