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사회문화재단 안찬수 이사 인터뷰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중
대학로의 두 평 남짓한 오래된 사무실에서 시만큼 견고한 언어의 집은 없다며 아껴 읽던 윤동주의 시 ‘사랑스런 추억’을 한 글자씩 눌러 적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분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수십 년 소의 각을 뜬 포정이 어느 순간 기술을 넘어 도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기적의도서관 건립, 희망의 학교도서관 만들기, 북스타트 운동, 책날개 입학식, 독서동아리 지원 등으로 평생을 함께 책 읽기를 권하고, 행하고 계신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안찬수 이사님을 만나보았습니다.
Q.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어떻게 생겨났나요?
A. 도서관은 입시나 시험을 준비하는 독서실이 아니고 정보를 활용하고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토론하고, 지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 기관이라고 생각해요. 삶의 문제가 도서관을 중심으로 공론화되고 해결되고 그래서 모두의 삶이 좀 더 나아지길 바라는 거지요.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태동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 아주 간략하게 “서구에서는 큰 도시마다 도서관이 없는 곳이 없고, 누구든지 도서를 열람할 수 있다. 파리 국립도서관은 소장 도서 수가 200만 권에 달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항상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적혀 있어요.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영국 등에서는 최초의 공공도서관이 개관을 한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한참 늦죠. 조선시대에 규장각과 같은 기관들은 있었지만 근대의 도서관이라고 볼 수는 없었어요. 근래에 전국 곳곳에서 도서관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고 있는데,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도서관 운동이 본격화된 건 3.1. 운동 이후의 일이에요. 식민지하에서도 우리의 도서관을 갖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다가 1950년대 초기에 학교도서관의 선각자들이 마산을 비롯한 경남 권역, 그리고 인천의 제물포 고등학교에서 조금씩 활동을 하셨어요. 이후에 민주화운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풀뿌리 문화 운동으로 함께 책을 권하고, 읽는 운동들이 생겨났죠. 우리 재단도 이런 책 문화 생태계의 역사 속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어요.
Q. 구체적으로 어떤 흐름에서 시작된 건가요?
A. 90년대 초반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각 지자체에서 했던 사업은 주로 도로 닦기, 청사 짓기, 지역 축제 열기 등이었어요. 이런 사업은 경제적인 성과는 이루었을지언정 사람답게 사는 세상,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다고는 볼 수는 없었어요. 당시 시민단체의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공공도서관 450여 개의 도서구입비 총액이 미국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 예산 하나보다 작았어요. 충격적이죠. 또 서양은 인구 만 명당 하나 꼴로 도서관이 있는데, 우리는 십만 명 당 하나 정도 있었거든요. 그마저도 당시 도서관은 입시 교육의 부속물처럼 여겼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도서관처럼 누구나 책을 열람하고,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만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죠.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를 하려면 건물을 짓고, 도로를 닦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시민을 사회가 기르고, 그 시민들의 각성으로 민주적 체제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요. 그 토대는 당연히 읽고, 쓰는 일이겠지요. 문해력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하려면 책 읽기는 필수예요. 그런 생각으로 2001년에 시민들이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을 시작했고, 책을 읽어서 만들어진 기금으로 책읽는사회만들기재단이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죠.
Q.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A. 우리가 주로 했던 일은 사회적․공익적으로 꼭 필요한 일에 대한 문제제기였어요. 주창 활동이라고 하죠. 정부에 10년 내 공공도서관 천 개 만들기나 도서구입 예산 확보하기 등의 제안을 하고 독서운동 캠페인을 펼쳤죠.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김영희PD였고요. 방송과 결합하니 파급력이 어마어마했어요.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캠페인으로 책을 굉장히 많이 팔았고, 출판사와 저자들 중 그 돈이 의미있게 쓰이길 원하는 분들이 모여 기금을 모았어요. 모두 시민들이 책을 읽음으로써 생겨난 돈이기 때문에 재단을 설립해 기적의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죠. 2001년 순천 기적의도서관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6개의 도서관을 건립했어요. 순천을 지을 때는 재단에서 90%를 감당해서 지었어요. 그 이후엔 8대2, 6대4 정도로 순차적으로 줄여나가다가 요즘은 공공의 재원에 시민사회의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더하는 방향으로 짓고 있어요. 또 후원금으로는 기적의도서관 건립뿐 아니라 학교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을 지원하고 있고요. 여전히 대한민국엔 공공도서관을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 많아요. 도서관을 짓는 동안 아이들이 다 커버릴 것 같아 우선 아이들이 좋아할 책꾸러미를 선물하기도 해요.
Q. 학교도서관과도 인연이 깊으십니다.
A. 학교도서관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었어요. 학교가 죽으면 마을이 죽어요. 특히나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 혹은 그보다 작은 읍면 단위의 마을은 거의 절대적이에요. 차로 3~40분을 가야만 도서관을 갈 수 있는 마을도 굉장히 많아요. 학교도서관은 가르침과 배움의 중심이라는 말이 있어요. 외국의 학교를 탐방했을 때, 저 말이 살아있는 문장이라는 것을 보았어요. 초등학교 교육과정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책이 없으면 안되게 설계를 해 놓았더라고요. 그러니 학교도서관이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고, 모든 교사는 책 전문가예요. 그러나 우리의 학교는 박제된 표어에 불과한 경우가 많죠. 학교도서관이 구석진 곳, 발길이 닿기 어려운 곳에 있거나 있어도 운영할 인력 없이 닫혀있는 경우가 허다하죠. 저는 학교도서관에서 따뜻하게 맞아주는 선생님이 있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책 한 권을 읽었던 기억을 가진 청소년들이 성장한다면 바로 그 지점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에겐 그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이 모두 소중해요. 교육정책의 한 부분이 아니라 한 명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어떤 미래를 그려나갈 것인가가 가장 중요해요.
Q. 그래서 학교도서관 지원 사업에 많은 애를 쓰셨군요.
A. 희망의 학교도서관 재단장 지원 사업은 정말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았어요. 신청서를 받고는 2~3주 정도를 침낭을 싸서 신청한 학교를 다 돌아보았어요. 그 당시엔 네비게이션도 없었고요. 지도만 보고 물어물어 찾아갔죠. 그 중 기억에 남는 학교가 여럿 있어요. 가평의 상면초등학교 청우도서관이 우리가 만든 1호 학교도서관이에요. 청우 도서관은 상면초에 재직하셨던 이인순 선생님께서 퇴직 후 퇴직금을 기부해서 만든 도서관이었어요. 이인순 선생님의 호를 따 청우 도서관이라 이름 지었어요. 방문했을 당시 시설이 많이 낙후되어 있었고, 자료 또한 많지 않았어요. 농촌의 제자들을 위해 선뜻 퇴직금을 내놓으신 뜻이 너무 아름답고 기릴 만하다고 생각되어 1호로 선정하고 공사를 시작했죠. 교실 두 칸밖에 안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다락과 무대를 만들어 영화를 감상하거나 작은 예술 행사를 할 수 있게 했어요. 개관식을 할 때도 마치 축제처럼 전시도 하고 공연을 하셨어요. 최근에 축령산을 갔다가 문득 생각이 나 방문했는데, 현재 근무하시는 사서 선생님께서 저를 알아보시더라고요. 개관식 당시에 둘째의 학부모로 참석하셨다고요. 아이들은 모두 컸고, 그 사이에 사서 자격을 얻어 상면초에 발령을 받으셨던 거예요. 대단한 인연 아닌가요? 하하. 여전히 도서관은 학교의 중심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Q. 독서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유가 있나요?
A.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람직한 인성이에요. 현재 우리 교육의 모습은 슬픕니다. 시골의 마을버스를 예를 들어 볼게요. 이 버스는 읍내로 향하고 있어요. 새로 개봉하는 영화를 보러 가는 중고등학생이 가득 타 있죠. 웬 할머니가 버스를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손을 흔들어 세워요. 타지에 사는 자식에게 택배를 보내려고 고춧가루, 말린 나물, 쌀 등을 잔뜩 싸가지고요. 기사가 버스를 세우자 버스에 탄 학생들이 기사를 향해, 낑낑대며 버스를 타는 할머니를 향해 욕을 해요. 큰소리를 치고 누구든 한 대 칠 것 같은 험한 분위기가 버스에 맴돌아요. 제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이에요. 정말 그 버스 안처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세대 간, 젠더 간 서로 공감하지 않고, 심지어 혐오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바람직한 인성을 갖추기 위해서 책 읽기가 꼭 필요하죠. 책 읽기는 일면식 없는 할머니를 마치 나의 할머니, 옆집 할머니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줘요. 그러면 버스에 탄 사람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줄 수 있어요. 학생들은 내 할머니가 아닌데도 나의 할머니라 생각하고 기사가 버스를 세우자마자 입구로 걸어 나와 할머니의 짐을 하나씩 들어 올려주고, 할머니 자리를 마련해줘요. 독서는 이런 인간됨을 만들어줘요.
한 학생이 빈 그릇이라 생각하면, 현재 교육은 그 그릇을 채우는 방식의 교육이에요. 특히 사교육은 너무 심각하죠. 언어, 수학, 영어, 미술, 음악 등등을 빈 그릇에 물 붓듯이 넘치도록 채우려고만 해요. 하지만 진짜 교육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이 가진 질문을 끄집어내어 주는 것에 있거든요. 책 읽기는 내 안에 있는 질문을 끄집어내줘요. 서로 듣는 독서를 통해 가능한 거죠.
Q. 그럼 어떤 책이든 내 안의 질문을 끄집어내어 주는 건가요?
A. 저는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공공도서관이나 학교도서관에서 특정 정치색이 있다거나 선정적이라거나 하는 이유로 책을 없애기도 했어요. 그것은 독자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라고 생각해요. 독자가 되는 시작은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것부터라고 생각해요. 때에 따라서는 선택에 실망스러운 경우도 생기겠지만 자신의 선택이니 자신이 책임질 수 있어요. 그리고 도서관은 자유롭게 자신의 취향과 관심에 맞는 책을 선택할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곳이어야 하고요. 제가 생각하는 도서관 정신은 독자로서의 모든 판단을 믿는 거예요. 책 읽는 모두가 주인공이고, 그들 마음에 질문이 있고, 판단력이 있어요. 그 누구도 대신 판단해 줄 수 없어요.
Q. 마지막으로 이사님께서는 어떤 꿈을 꾸시나요?
A.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질문 하나를 품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삶이 그 단순하지만 거대한 질문을 풀어나가는 과정이기를 바라요. 책 읽기가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창조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여야 해요.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박사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 한 문장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했다고 해요. 그것은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라는 문장이었어요. 이 문장을 궁리하다 중간자의 존재를 예측하고, 연구 끝에 입증까지 해낸 업적을 이루었어요. 동양의 세계관과 현대물리학의 기가 막힌 접목이죠. 이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궁금증으로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그 앎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가능성을 찾기를 바라요. 그 과정에서 책의 세계가 열릴 거라 믿어요.
2022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