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읽고 쓰다

소설 [파이 이야기] 얀 파텔

2023.03.02~09,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펴냄, @밀리의 서재

by 동참

책 읽는 내내 실감(實感)이라는 단어를 계속 떠올렸다. '실감난다'는 표현은 이런 이야기에 어울린다. 내겐 꽤 오래 전 영화로 먼저 접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도, 본 뒤에도 대체 원작 소설이 어떻길래 이런 엄청난 영화를 만들어 냈을까, 많은 영화 감독들이 탐을 냈다는데, 대체 어떤 부분이 그들의 창작욕을 자극했을까 궁금했었다. 이 글은 영화와 소설을 모두 본 후의 짦은 소감이다.


주인공인 파이의 이름은 '피신 물라토 파텔'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피신)이 오줌이라는 뜻의 'phishing'과 발음이 비슷하다며 항상 놀림을 받는다.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파이'라고 지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선생님께, 학우들에게 알렸다. 이름은 일종의 구역이자 세계다. 그런 그가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에 모두 심취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점을 보면 난리라도 난 것처럼 군다. 얼굴을 붉히고 숨을 몰아쉬면서, 화를 내며 말을 쏟아낸다. 얼마나 분노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 단호함이 겁난다.

나는 작가가 '믿음'이라는 마음 혹은 행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무언가를, 특히 신성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고. 믿는다는 행위의 핵심은 단호함이나 흔들리지 않음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의심이 아닐까. 진짜 믿음이란 의심하고 또 의심하되, 번뇌하고 또 번뇌하되 흔들리며 피어나는 꽃과 같은게 아닐까.


동물과 종교, 그건 파이의 대학 전공이면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2개의 큰 축이다. 파이는 동물원에서 나고 자랐으며 종교적인 감수성이 충만했다. 자연의 집약체라 할 동물원의 모습은 오히려 영화에서 훨씬 생생하다. 파이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동물의 위험함을 가르친다며 작은 양을 호랑이에게 내어준다. 호랑이는 어린 파이가 보는 앞에서 양을 잡아 먹는다.


어린 파이는 곧 엄청난 시련에 닥친다. 부모님과 형(라비)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던 중에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가 좌초된 것이다. 파이는 구명보트에 던져져 살았고 나머지 가족을 실은 배는 깊은 해구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가슴에 품기에는 얼마나 지독한 일인가! 형을 잃는 것……. 함께 나이 드는 경험을 하고, 형수와 삶의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를 칠 조카들을 선사해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주고, 가지를 받쳐주는 기둥처럼 나를 든든히 받쳐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 머리 위의 태양을 잃는다는 것.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나는 방수포에 누워서, 양팔에 얼굴을 묻고 밤새 슬퍼하며 울었다. 하이에나는 밤새 얼룩말을 먹었다.

파이의 악전고투는 잔인하고 처절하다. '밤새 얼룩말을 먹는' 하이에나에서 벗어날 수도 가까이 갈수도 없다. 구명보트라는 아주 좁은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이야기 전체에 크게 두드러지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이에나는 얼룩말을 먹고 곧 오랑우탄을 죽이고 그런 하이에나를 호랑이가 잡아먹는다. 파이에게는 본능적으로 살아남는게 중요했다. 당장의 생존, 그 유일한 당위가 이야기의 요체다.


얼굴에 단호하고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그 순간 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으로 보면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나도 거기 속한다—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을 그저 멍청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다수는 포기할지도 모른다. 희망은 오간 데 없고 죽음이 외려 편한 선택처럼 보일 지경이다. 소년은 망망대해 위 구명보트에서 오히려 거대한 공포인 호랑이 '리처드 파커'로 인해 삶의 의지를 찾는다. 거대한 공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아무런 짐도, 공포도, 번뇌도 없으면 그건 최고의 삶인가, 저자는 묻는다.


리처드 파커를 길들여야 했다. 그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문제나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나의 문제였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또 비유적으로도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터였다.

아마 이 이야기의 성패는 여기 달려 있는 듯 했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작중 인물이 이를 얼마나 '현실적으로' 맞닥뜨리느냐가 중요할 터였다. 나는 저자가 성공하고 있다고 느꼈다. 문장의 길이는 수시로 변했다. 간단한 원리지만, 긴박할 때는 짧게, 고단하고 절망적인 심정을 다룰 때는 길게. 아마 문장의 길이는 소년의 감정 변화와도 맥이 닿아있다. 문장의 길이로도 이야기의 실감을 완성한다. 대체 어떤 경험과 상상이 이런 글을 쓰게 하는가. 나는 수시로 감탄했다.


조난기의 초반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파이는 점점 구조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서,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 집중한다. 물고기를 잡고 어쩌다 바다거북과 돛새치 등을 잡아 허기를 채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죄다 말하겠다. 여러분에게 비밀을 털어놓겠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절망을 홀로 안고 사는 것보다 공포를 둘이 껴안는 것이 낫다고 한다. 파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문득, 삶에서 너무 많은 선택의 여지들이, 그 가능성들이 불행을 자초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알아차렸다—고통과 고통 사이에서. 내 고난이 커다란 구도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내가 겪는 고통이 있는 모습 그대로 보였다. 유한하고 미미했다. 그리고 난 아직 존재했다.

그래서 파이의 깨달음은 힘이 있다. 커다란 절망에 부딪혀 감내하고 그 고통마저도 껴안고 나자 리처드 파커와 구명보트에 단둘이 남겨진 상황조차도 미미하고 유한한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신의 모자는 언제나 올이 줄줄 풀렸다. 신의 바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신의 고양이는 계속 위험스런 존재였다. 신의 방주는 감옥이었고. 신의 넓은 땅은 천천히 날 죽이고 있었다. 신의 귀는 잘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파이는 이 와중에도 신성을, 종교를,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으려 부단히 애쓴다. 비록 신의 은총은 아직 파이에게 와닿지 않아 사랑을 유지하는게 지독하게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신을 믿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고, 깊은 신뢰를 갖는 것이고,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라고도 한다. 한번 사랑을 놓아버리면 거기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까봐 사랑을 놓을 수 없었다고도 고백한다.


상반되는 것 중 최악은 권태와 공포다. 우리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다. 바다가 주름살 하나 없다. 바람의 속삭임조차 없다. 시간이 영원까지 계속될 듯하다. 어찌나 권태로운지, 의식불명에 가까운 상태로 빠진다. 그러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감정은 광풍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두 상반되는 것조차 명확하게 남지 않는다. 권태 속에는 공포라는 요소가 있다. 눈물을 터뜨린다. 끔찍함이 당신을 가득 채운다. 비명을 지른다. 일부러 자해를 한다. 한데 공포의 손아귀—최악의 폭풍우—속에서도 당신은 권태를 느낀다. 그 모든 것과 함께 깊은 나른함을 느낀다.

파이가 만약 리처드 파커 없이 장장 277일을 태평양에서 버틸수 있었을까. 글쎄, 알 수 없다. 파이는 공포만큼이나 '권태'가 위험했다고 말한다.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이며 지독한 권태 속에서도 공포를, 공포 속에서도 권태를 느낀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파이의 고백은 그래서 와닿는다. 공포와 두려움은 그 앞에 마주 서서 포옹하는 순간, 삶의 목적과 희망으로 치환된다.

살인마같은 해초섬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 '이 살인마 같은 섬에서 육체는 편하고 정신은 죽은 쓸쓸한 반쪽 인생을 사느니, 내 삶을 찾아서 여길 떠나 죽는 편이 낫겠다'고 파이는 생각한다. 파이는 끝까지 살고자 한다. 비록 육체는 고단하고 지치고 험난할 지언정 끝까지 제대로 살아있고자 한다.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삶은 결국 '입(먹는 것)과 배설'이라고 어느 소설가가 말했다. 그저 숨쉬고 먹고 자는 생존이라면 해초섬에 머물렀어야 했다. 파이는 해초섬에서 마치 스며들듯 녹아 사라지느니 비록 엄청난 공포와 권태지만, 그럼에도 그 사이를 오가는 추가 되기를 선택한다.


영화 'Life of Pi' 포스터

영화와 글, 선후가 무엇이 되었든, 둘 다 볼 때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다. 저자가, 혹은 감독이 어떤 것을 누락했고 무엇을 부각했는가. 나는 파이의 종교에 대한 고민이 누락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 영상화 하기도 어려웠을 듯 하고 괜한 논란만 부추겼을 것이다. 소설을 영화로 옮길때는 부득이 잔가지를 쳐내고 중점이 되는 내용만 남겨놔야 할 것이다. 화는 대사나 장면의 중간(pause)마다 보는 이가 '알아서' 내용을 짐작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이를테면 돛새치를 잡는 장면이나 해초섬과 같은 장면에서는 하릴없이 영화의 장면을 떠올렸다. 아마 책으로만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장면이 대체 어떤 식으로 머릿속에서 재현될지가 꽤 궁금해진다.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하였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중요하지도 않다. 그저 실감만이, 이야기를 사실처럼 보이게 하는 그 실감과 묘사만이 이 책을 대단하게 만든다. 파이가 277일을 버텨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물과 식량이 아닌 '희망' 때문이었을게다. 아이러니하지만 포식자인 리처드 파커의 존재는 의지와 희망이 되었고 파이가 바다에서 살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말이에요.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당신들은 무덤덤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붙박이장 같은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했다. 직장은, 회사는 무덤덤하고 확실한 세계다. 우리는 '더 높거나 더 멀리' 있는 목표를 위해 일한다. 그리 놀랍지 않고(놀라울 일이 발생하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 붙박이장 같아서 메마르고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런 삶과 이야기 속에서 건조하게 박제가 되어 간다. 나에게 이 이야기는 그저 흥미진진한 조난기라고 결론짓기엔 보다 울림이 깊고 높았다. 책을 통해 종교도, 문화도 전혀 다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에 가깝다. 고작 '나'라는 울타리에서 나는 얼마나 안온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영화를 통해 결말까지 알고 있었지만 책을 통해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파이의 절망과 고통과 그럼에도 놓지 않았던 희망과 신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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