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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Oct 05. 2022

01. 그땐 몰랐지.

2014년의 기억






 반수에 성공했다. 수능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고, 서울대는 아니지만 꽤 좋은 학교에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대학교에서 캠퍼스 라이프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었기 때문에 21살의 나는 아주 신이 나 있었다. 동기들과 어울려 학교 앞을 누비고, 동아리도 들고, 선배들과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 나는 꽤 사회성이 좋은 편이었고 동기들보다 한 살이 더 많은 탓에 약간의 어른스러운 행세도 하며 사람들과 곧잘 어울렸다. 동기들은 날 멋있게 생각해주었고 선배들은 날 예뻐했다. 그땐 참 꿈이 많았다.


 아주 바쁘게 살았다. 학교가 끝나면 과외를 하러 갔고, 과외가 없는 날엔 친구들을 만났다. 주말엔 카페에서 알바를 했다. 일주일이 스케쥴로 꽉꽉 들어차있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사실 그때 조금 덜 바쁘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즐기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나는 차마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빠가 운영하던 학원은 계속해서 학생이 줄고 있었고 나는 그 상황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나에게 들어간 비싼 학비와 학원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서, 성인이 된 나는 당연히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번 돈으로 밥을 사먹고, 놀고, 또 저축했다.


 당연히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대학교를 입학할 때부터 로스쿨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나에게 학점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높은 학점을 받아내야만 했다. 결국 잠을 줄였다. 어쩌다 생긴 쉬는 날엔 학교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나갔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나를 굴리고 굴렸다. 그게 어떻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덮칠 줄도 모르고.


 그즈음 엄마, 아빠의 다툼이 잦아졌다. 둘 다 아주 신경질적이고 예민했다. 그때 아빠는 갑상선 호르몬이 과다분비 되는 갑상선 항진증으로 인해 많이 예민한 상태였고, 엄마도 갑상선에 이상이 있었다. 하지만 둘이 그렇게나 부딪혔던 것이 신체적 병증의 탓도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큰 소리를 내며 싸울 땐 조금 불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냥 중년의 부부들이 그러하듯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때에 엄마, 아빠의 갈등은 사실 나에겐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신경 써야할 ‘내 일’이 너무 많았다. 내일을 위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웃긴 말이지만 그때엔 나도 나 먹고 살기 바빴다. 엄마가 갑상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조금 울었다. 그러고 말았다. 예후가 좋은 암이었고, 항암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사실을 핑계 삼아 나는 안도하며 내 일에 집중했다.


 사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건 엄마의 수술 날 뿐이다. 엄마의 수술 날짜가 내 수업시간과 겹쳤고 나는 교수님께 양해를 구했다. ‘어머니의 암 수술이 예정되어 있는데 혹시 결석을 해도 되겠냐.’고.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상황 설명을 하고 결석을 한 후 출석 점수를 까이면 되는 일인데 고등학교 생각에 젖어 있던 나는 ‘무단결석’을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출석 점수가 까이면 로스쿨을 못 갈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혼자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있던 그 시간에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엄마가 ‘수업이 중요하지.’라고 했던 말을 곱씹으면서. 그렇게 괜찮다고 자위하면서.


 엄마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덕분에 나는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아직도 엄마 목에 있는 짙은 수술자국을 볼 때면 그때 생각에 찜찜해지곤 한다. 그때 그냥 학교를 가지 않고 엄마 옆에서 엄마 손을 잡아줬다면, 엄마의 흉터가 금방 낫지는 않았을까? 남들처럼 금방 아물지 않았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선택지를 떠올릴 수 없었고,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 되었다. 그렇게 내 마음에 큰 돌덩이를 하나 얹었다.


 하지만 그때엔 그게 나에게 마음의 짐이 되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안 좋아진 집안의 경제 상황과 엄마의 병은 나에게 더 큰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잘 해야만 했다. 내가 꼭 변호사가 되어 돈을 잘 벌어서 집안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돌볼 새 없이 그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2017년 어느 날. 세상이 나에게로 와르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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