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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Oct 06. 2022

02. 어느 날 갑자기 上

세상이 나에게로 무너졌다.






 나는 그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와 늦은 밤 소파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나 여기 좀 만져 봐 봐.”



 엄마가 이상하다는 듯 한쪽 가슴을 계속 만지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손을 뻗어 엄마가 가리킨 쪽을 만지작거렸다. 안에 우둘투둘한 혹이 있었다. 손으로 만져졌다. 그날 나는 밤새도록 인터넷 검색을 해댔다. ‘가슴 혹’, ‘우둘투둘한 가슴 혹’,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유방암’, ‘유방암 증상’ 같은 것들도 찾아다녔다. 혹의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우둘투둘하게 느껴지면 암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리고 손으로 만져질 정도라면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라고도 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무서웠다. 그날 밤 나는 엄마가 평생 내 옆에 있지 못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실감했다.




 동네의 유방 전문병원에 함께 갔다. 무서우니 함께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가 무섭다고 나에게 말을 하는 건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별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엄마와 손을 잡고 병원을 갔다. 엄마가 검사를 하고 나오는 동안 다리를 떨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암 이래....”



 그 짧은 말을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리고 엄마는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무서워....”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았다. 나까지 울면 엄마가 무너질 것 같았다. 엄마는 엄마가 맞이한 두 번째 암에 이미 무너져있을지도 몰랐다. 나라도 꿋꿋해야 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엄마. 괜찮을 거야.”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 뒤로는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하던 카페 알바를 그만뒀다. 언제 엄마와 함께 병원을 가야 할지 몰랐으니. 사장님이 매우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의 첫 번째 암 수술 때 함께 해주지 못했던 게 두고두고 마음에 쓰였기 때문에 이번엔 엄마 옆에 있고 싶었다.


 곧 엄마가 항암을 시작했다. 항암으로 먼저 암의 크기를 줄이고 수술을 하는 스케줄이었다. 다행히 엄마의 몸이 새로 나온 표적치료제에 적합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그 표적치료제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이 시작된 덕분에 우리 집은 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항암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밤중에라도 열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바로 응급실에 가서 격리 병실에 들어가야 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였던 것 같다. 아빠가 운전을 하고 나와 엄마는 뒷자리에 앉아 병원으로 향했다. 그 멀지 않은 길을 가는 도중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너무나도 무서웠다. 병원에 도착하면 아빠 대신 딸인 내가 엄마와 병실에 함께 들어갔다. 그렇게 엄마의 열이 내리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항암 내내 엄마의 가슴에는 정맥주사관인 ‘케모포트’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항암 약제가 너무 독해서 일반 혈관 주사 방식으론 혈관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걸 삽입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어렵기에 엄마는 케모포트를 달고 생활했다. 엄마 가슴팍에 달린 그 장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애써 그 부위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걸 보면 엄마 앞에서 울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는 것을 끊임없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 엄마도 조금만 더 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고. 어렵지만 힘을 내서 항암을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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