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위에 불시착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놓은 것들

by 물풀

어쩌다 보니 여기에 내가 있다.

어떤 힘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알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다.




넌 왜 자꾸 섬에서 살아

얼마 전 16년 만에 연락이 닿은 동기가 던진 말에 머리가 뎅 하고 울렸다. 그렇다. 그 사이 내가 거쳤던 곳을 모르는 그 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이 런던이었으니까. 그때 살고 있던 곳이 섬나라 영국이었다. 그리고 내 몸은 흐르고 흘러 또다시 섬에 머물러 있다. 떠나기로 기약한 날이 한참 지났지만 아직은 더 있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이런 마음은 고향도 아니면서 향수를 느끼는 런던을 떠난 후 처음이다. 비슷한 점도 별로 없는데, 일부러 섬을 찾아 움직인 것도 아닌데, 어쩐지 마음은 닮은 구석 하나 없는 두 섬 사이를 서성인다.

여기는 제주. 서쪽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 살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8월 말, 이 섬의 도민이 되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집을 떠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땀 닦기’였다. 아저씨들의 손길이 닿은 모든 물건에는 새까만 구정물이 지문자국으로 남았고, 땀을 얼마나 떨구었는지 바닥이 흥건했다. 그 흔적을 닦으며 짜증보다는 오죽했으면 하는 미안한 마음이 더 컸을 만큼 그렇게 더웠다.

그날 밤. 하루 종일 틀었던 에어컨을 멈추었다. 제주의 상쾌한 공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도시와는 다를 살랑살랑 시원한 공기도 조금 기대하면서. 그러나 창을 열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숨 막히는 젖은 공기에 짙게 배인 똥. 냄. 새.

난생처음 맡아보는 해괴한 암모니아 냄새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거친 숨 고르는 말처럼 나도 모르게 입술이 푸르르릉 튕겼다. 간혹 시골길을 달리다 맡게 되는 구수한 고향의 향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고 배가 너무 아파 어쩔 수 없이 들어갔던 푸세식 똥간 냄새도 아니고, 푹푹 찌는 여름날 쓰레기 수거차가 흘리고 간 음식쓰레기 국물 웅덩이 냄새도 아니었다. 혹시 무슨 일이 났나 현관 밖을 나가보았지만 동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냄새지? 설마 매일 이런 건 아니겠지?

오래지 않아 집 주변에 돼지 축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계 자연유산 제주에 오면 피톤치드 가득한 청량한 숲 향기를 마음껏 마시게 될 줄 알았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가장 먼저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고 공기청정기를 돌리는 모닝 루틴이 지겨웠다. 아파트 창문 꼭꼭 닫고 창문을 열 수 있는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생활을 벗어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마음 편히 들여 마실 공기였다. 도시만 벗어나면 여기서 해방이라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심지어 이른 아침에는 매캐한 농약 냄새가 스멀스멀 마을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지, 여기 농촌이었지.

하루는 똥냄새가 나지 않아 신나게 문을 열고 밤공기를 만끽하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딸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악 엄마 엄마 엄마! 일루와 봐!! 큰일 났어!!

이 정도쯤은 익숙한 호출이다. 세탁실에서 일하던 손을 여전히 움직이며 “알았어~ 다친 건 아니지? 이것만 하고 금방 갈게~” 심드렁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다급한 비명을 잠재우려고 했다. 그런데 비명이 잦아들지 않고 우당탕탕 더 소란스러워졌다. 어쩔 수 없이 출동.

꺄아아아악~!!!

이번에는 나의 비명이었다. 분명 모기장 달린 창문은 빠짐없이 닫혀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날개미 군단이 통째로 우리 집 거실로 이사를 왔다. 천장과 바닥 그리고 벽 심지어 커튼과 가구도 빈 틈 없이 새카맣게 메꾸고 있었다. 온 집안에 들러붙은 이 낯선 생명체들 어떻게 우리 집에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항상 아이에게 말했다. 벌레도 집이 있고 길을 잃기도 한다고. 우리가 그들이 살던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있으니 실수로 들어와도 너그럽게 내보내 주자고. 그들의 집을 빼앗은 건 우리라고. 생명존중 사상을 열심히 설파하는 자애로운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이 순간만은 다 필요 없었다.

일단 죽여어! 다 죽여!!!

당장 내 눈앞에는 없어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


그 이후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생명체와의 조우는 계속됐다. 외계 생명체 같은 것은 아니고, 책에서는 봤지만 우리와 공존할 거라 생각지 않았던 존재들 말이다. 마당에 뜬금없이 나타난 도마뱀이나 플라나리아(교과서에서 분명 봤는데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검색해서 알아냄)부터 창가 유리에 다닥다닥 붙어 저녁 먹는 우리 가족을 구경하는 반딧불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들어왔나 싶어 왠지 현관문 잠금장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했던 기괴한 노루의 울음소리, 그리고 산책 좀 해보려다 서로 놀라 꽥 소리 지르고 냅다 푸드덕거리며 줄행랑친 꿩까지. 불시에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어도 이들과의 마주침이 싫지만은 않다. 집 밖을 나서며 ‘레몬이(자주 놀러 오는 길고양이)가 오늘은 밥을 남겼네’ 하며 두리번거리고, 운전을 하다 해안도로를 지나가면 ‘오늘은 돌고래를 만나려나’ 목을 쭉 빼게 된다. 봄이 되면 달래와 고사리를 만나려고 고개를 땅에 박고 걷질 않나 여름이 되면 바닷속에 머리 박고 바위 사이를 뒤지질 않나, 온통 새로운 만남 투성이다.

사람들끼리만 부대끼며 살아 본 도시의 딸은 다양한 생명체와 어울려 사는 외딴섬 노지의 일상이 짜릿하고 화려하게만 느껴져 자꾸만 밖으로 나간다(아무리 그래도 뱀과 지네의 출현은 달갑지 않지만).



얼마나 더 있다 돌아올 거야?
백 년!

애당초 온 가족이 일년살이를 계획하고 이 섬에 들어왔지만, 아빠가 일 때문에 육지로 복귀해야 했을 때도, 집의 연세 계약이 끝났을 때도,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눈치가 보일 때도 우리의 제주살이를 중단하지는 못했다. “프러포즈받은 적도 없는데 눈 떠 보니 결혼식장에 서 있더라고요.” 흔한 신부 인터뷰 내용처럼 특별한 결심 없이 이곳에서의 일상을 중단할 이유가 없어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일 년 후 떠나기로 한 계획을 철회한 데는 아이의 입김이 가장 쌨다. 외동딸 하나 키우는 우리 부부에게 아이의 의사는 영향력이 너무 커서, 제주도에 백 년을 살다 아빠가 있는 서울에 돌아가겠다는 아이의 말에 두드리던 계산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렇게 엄마와 딸은 제주에 남았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지금 당장 하늘을 보라는 지인의 전화가 왔다




미오의 두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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