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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너의 소풍 나의 소풍

내가 추억하던 설렘 가득한 소풍은 이제 없다.

"엄마, 나도 김밥 먹고 싶어. 나도 소풍 때 김밥 싸주면 안 돼?"

"네가 싸, 그럼."

"다른 친구들은 김밥 싸오는데..."

"김밥보다 이 주먹밥이 훨씬 예뻐! 삼색으로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거 같아? 엄마나 되니까 이렇게 해주는 거야.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뭘 모르던 나의 도시락은 삼색 떡이 되어있었다.




삶은 달걀의 노른자만 따뜻할 때 꺼내 체에 내려 고운 가루로 만들어주고, 당근을 아주 잘게 갈아서 물기를 제거해 뽀송뽀송하게 만들어주고, 오이 역시 같은 방법으로 준비한다. 한 입에 쏙 들어갈 크기의 꼬수운 내 가득한 주먹밥을 삼색 재료에 굴려준다. 색색별로 예쁘게 담아준다. 이게 삼색 떡의 레시피다.


영양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엄마는 떡갈비나 닭다리 같은 단백질을 꼭 넣어주었고, 물기를 꼭 짠 김치도 늘 함께했다. 점심시간 가방을 열면 그 안은 굉장히 다채로웠다. 그새 발효를 시작한 김치는 물이 더 흘러나오고 있었고, 단백질원에는 김치 맛 소스가 얹어져 맛의 깊이를 더했다. 사고의 한계가 고작 9-10년뿐이던 그 시절, 나는 도시락이 늘 못마땅했다. 나도 친구들처럼 김치 없이 다른 반찬 없이 김밥만 가볍게 들고 가고 싶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아이의 소풍날이다.


부모가 되고서 소풍은 지난봄이 처음이었는데, 알림장을 대충 훑어본 나는 큰 실수를 범하고야 말았다. 스쿨버스 탑승 10분 전 도시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오른손으로 김 주먹밥을 섞고, 왼손으로 팬을 돌려가며 홀로 '냉장고를 부탁해'를 찍었다. 엄마가 10년을 주방 바닥에서 일했는데, 딸내미 도시락에 김 주먹밥과 구운 소고기에 버섯볶음이 전부였다.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 어린이집에서 요리하는 엄마라고 알고들 계실 텐데 도시락 보고 웃으시겠지 '


그래서 가을 소풍에는 정말 제대로 해주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핼러윈 도시락을 검색했다. 캡처 14장을 했지만 뭔가 부족한 마음에 자꾸 더 뒤적뒤적거리다 한 시간을 보냈다. 커피 반 잔 원샷하고, 장바구니 3개 챙겨 마트로 떠났다. 노란빛 대기업 마트는 48분을 달려야 갈 수 있어서 월 행사 중 하나다. 이런 게 시골 생활의 별미지 뭐. 마트에서 11만 원을 결제했다. 옷이나 액세서리 산 것도 아닌데 이 뿌듯함 무엇? 이미 이 행위들로 나는 너무나 근사한 엄마가 된 듯한 기분에 어깨가 내내 들썩였다.



 

새벽 3:47의 모습


급하게 다녀온 서울, 내려온 지 8시간 된 지금은 새벽 3시 47분. 김을 오리고 있다. 그놈의 김 펀치! 사야지 사야지 맨날 생각만 하다가 결제로 이어지지 않았는데 꼭 이런 순간이 생긴다(나의 결제에는 늘 이유가 있다는 걸 남편이 알아야 할 텐데). 유령, 호박 모양으로 치즈를 만들고 김으로 눈도 입도 달고 제법 느낌이 난다. 1일 1 에그 하는 5세를 위해 뜨거운 달걀말이를 김발로 하트 모양 만들다 손도 데었다(하트 달걀말이 틀 역시 장바구니에서 일 년째...). 좋아하는 당근으로 꽃을 만들다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 왜 이렇게까지 해? '


그냥 김밥, 유부초밥에 소시지 주면 되는데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소풍이 도시락 대회도 아니지 않나. 이 시간에 못 잔 잠을 자거나, 밀린 일을 하는 게 더 맞지 않는가. 가위질하던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가 혼자 꿍시렁꿍시렁 거리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다 웃음이 났다.

아, 엄마...


엄마는 남들과 같지 않은 특별한 도시락을 해주고 싶었던 거다. 같은 회사의 게맛살, 비슷한 모양의 햄, 뻔한 노란 단무지가 들어 간 김밥이 아닌, 아무도 담아오지 않았을 하나밖에 없는 도시락을 주고 싶었던 거다. 그녀만의 표현이고 사랑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이 어리석은 엄마 5년 차는 큰 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전화라도 걸어야 하나 스치던 생각은 이내 사라졌다. 표현에 무딘 돌멩이 같던 장녀는 이제 쉬이 들어 올릴 수 없는 현무암에 가까워졌다.




밤을 새워 만든 핼러윈 도시락


행여 새지 않을까 다시 한번 새빨간 뚜껑을 힘 있게 돌렸다. 간식주머니와 물통을 가방에 넣어준 뒤, 두 겹 세 겹 입히고 양말이 말리지 않았는지 바지 밑단을 들춰본 후 신발을 신겼다. 마스크 한 번 체크하고, 묶은 머리카락을 눈으로 스쳐가며 현관을 나섰다.


노란 버스가 저 멀리 오고 있다. 잔뜩 신이 난 발소리, 흔들리는 가방.


" 소풍 잘 다녀와, 엄마가 오늘 네가 좋아하는 핼러윈 도시락 쌌어! 어때 기분 좋지? "

" 아니, 기분이가 좋지 않아요. "

" 왜? 핼러윈 좋아하잖아? “

" 엄마가 음료수를 안 넣어줬잖아, OO는 기분이가 안 좋아 "


꼭 너 같은 딸 낳으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빙빙 맴돈다.




히뽀의 다섯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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