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9매)
꿈에서 고래를 보았다. 고래는 컸고 죽어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죽어 누워 있었다. 생명이 빠져나간 포유짐승은 놀랄 만큼 크고 무거워서, 바닷물에 채 잠기지도 않았고 파도에 밀려가지도 않았다.
나는 모래톱에 서서 물속에 누운 그 압도적인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연한 분홍색 같기도 하고, 연한 파랑색 같기도 했다. 물은 짙은 검은색 같기도 하고, 짙은 하얀색 같기도 했다. 아니다. 물이 분홍빛이며, 동물이 검은빛인가? 연한 동물(動物)은 움직이지 않았으며 움직이는 것은 짙은 물이었다. 그러니 살아있는 것은 물뿐이었다.
장대한 몸뚱이에 달겨들어 부딪는 파도 사이로 허옇기도 하고 누렇기도 한 배가 비스듬히 보였다. 운동화 속으로 모래가 들어와 발바닥이 깔깔해졌다.
점심에 눈을 뜨고 오후가 지나 저녁이 될 때까지도 고래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신발 안으로 스며든 모래의 불편한 감촉이 여직 생생했다. 평소 같았으면 꿈은 이불을 비집고 나오는 순간 날아가 버렸을 텐데 계속 생각이 났다.
고래를 보러 가야겠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그런데 고래를 어디서 봐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동물원에 고래가 있던가? 그런 장소에 발을 디딘 기억이 까마득해서 동물원이 어떤 곳이었는지 기억을 되살리는 것부터 해야 했다. 저 아래 깊이 잠긴 추억 같은 걸 건져내어 되새겨 보니, 동물원에서는 돌고래밖에 못 본 것 같았다. 아주 오래 전에 해양박물관인지 뭐 그런 데서 박제 같은 걸 본 것 같긴 한데……죽은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살아 숨쉬는, 헤엄치며 지느러미를 철썩이는 고래가 보고 싶었다.
고래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하지는 않았다. 바다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지 않았고, 수족관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고래를 어디서 볼 수 있는지 검색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고래가 보고 싶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생각만 했다. 어쩌면 실은 그게 가장 좋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고래란 녀석은 실물보다 내 상상 속 형상이 더 아름다울 것이었다. 많은 것이 그렇듯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정말 그랬다. 고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지낸 시간이 이제 제법 길었다. 신생아였다 해도 그간 기는 것 정도는 슬슬 익히지 않았을까. 갓 태어난 생명이 힘을 길러 몸을 가누는 그 대단한 세월 동안 나는 그저 산소를 소모하고, 음식물을 소진시키고, 변을 싸질렀다. 생산하는 것이라곤 폐기물과 탄소뿐. 그렇게 살았다, 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삶이 아니었다. 나는 산 것이 아니었다. ‘살았다’는 동사는 거기에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 가치 있고 찬란했다. 내가 보낸 시간은 생(生)이라 일컫기에 충분하지도, 적절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나는 생명도 아니었다. 우연적으로 결합한, 무의미한 유기물의 덩어리. 나는 그냥 그런 덩어리였고 지금도 그렇다.
누구에겐 길고 누구에겐 짧을 삼십 몇 년의 인생을, 그저 그런 덩어리로 존재하기 위해 살아온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일까? 결과적으로 나는 그런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다가 배가 고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신은 없었다. 배가 고픈 게 맞는지, 아닌지. 무언가 먹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런 확신도 없이, 무엇도 결정하지 못한 채 그저 비척거리며 방의 문지방을 건너 거실로 나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탁 위에 엄마가 남긴 메모지가 조용히 옹크리고 있었다.
‘저녁 먹고 들어올게. 김치찌개 끓여 놨으니 냉장고에 스팸이랑 해서 챙겨 먹어.’
속이 텅 비었는데도 갑자기 부대끼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가 배를 콕콕 찌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뱃속을 찌르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거슬렸다. 어쩌면 누워 있는 동안 벌레가 뱃속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자는 동안 들어갔든, 그냥 있는 동안 들어갔든, 나는 몰랐을 것이다. 그것을 쫓거나 막지도 않았을 것이다. 살아있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어렵지 않게 들어갔을 거다. 입을 통해, 귀를 통해, 아니면 눈을 통해. 기다란 지네 같은 것이 들어가 나의 내장을 수많은 다리로 쿡쿡 찌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알을 까서 새끼를 쳤는지도 모른다. 그 새끼들은 근친상간을 해서 또 알을 까고, 그 새끼들은 근친상간을 해서 또 알을 까고, 그 새끼들은 근친상간을 해서 또 알을 까고. 그렇게 해서 지네 마을이 내 뱃속에 생겼는지도 모른다. 우글우글. 쿡쿡, 쿡쿡. 우글우글. 쿡쿡, 쿡쿡.
엄마는 어딜 간 걸까. 예전에는 장 보고 오겠다든가, 구역예배 하고 온다든가, 미연 아줌마 만나고 온다든가,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식사하고 오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린 지가 꽤 되었다. 나가서 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별 불만은 없었지만 엄마는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는지 남자를 만나는지, 나가서 뭘 하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나로서는 오십대 후반의 중년이 새로운 연애 상대를 찾을 때는 어디로 가서 뭘 하고 노는지, 도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하기야 나였어도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 광합성을 하고 산소를 내뿜는 창가의 스투키보다 못한 덩어리에게 말이란 걸 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빠가 집을 나간 지 일 년이 좀 넘었다. 이번이 네 번째였다. 처음에는 충격적이었고 두 번째엔 상처받았으며 세 번째에는 실망했지만 이제는 솔직히 별다른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았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여전히 가출이나 하며 사는 모양이 한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그 정도였다. 이번에는 가출한 지 오래지 않아 바이러스가 번지기 시작해서, 돌아다니다 확진자라도 되면 나라에서 어떻게든 먹여주고 재워주기는 하겠구나 싶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엄마는 아빠 생각을 할까? 아주 많이 할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안 할 것 같기도 했다.
휴대폰 알림 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의식적으로 화면에 시선이 먼저 갔다. 문자 메시지 미리보기가 눈에 들어왔다.
‘고객님의 이번 달 대출금리는…’
더 보지 않고 화면을 껐다. 이번에 이자 낼 돈은 어디서 구하지? 재취직은 진즉에 실패했고, 기껏 구한 동네 카페 아르바이트도 개 같은 전염병 때문에 잘린 지 오래였다. 편의점 알바 자리 하나 구하기가 녹록치 않았다. 손을 벌릴 만한 친구는 몇 되지도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이미 빌릴 만큼 빌렸다. 염치나 자존심 따위는 땅에 짓밟히다 못해 지구 내핵을 뚫을 정도로 팽개쳐 버렸지만서도, 정말 이 이상 엄마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수가 없었다. 진짜 몸이라도 팔아야 되나?
귓속으로 정신이 찢어발겨지는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머리와 가슴 사이에 있는 무엇, 생각이라기엔 너무 감정에 젖어 있고 마음이라기엔 다소 이성적인 무엇이 아득히 깊은 어딘가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인지는 모르나 깊고 깊은 저 아래로. 숨을 쉬려고 애쓰면서, 천장을 노려보며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천장 구석 모서리 부분에 아이보리색 도배지가 약간 울기 시작한 자국이 보였다. 어제 새벽에 들었던 명상 가이드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안 되겠다.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빨간색 알림이 떠 있는 문자 앱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유튜브를 켰다. 어, 뭘 틀어야 하지? 십 분 명상? 마음이 진정되는 음악? 그딴 씨발 것들, 너무 많이 들었다. 내 방 침대에 누워 이불로 몸을 휘감았는데도 끊임없이 추격해 오는 추락의 감각. 떨어지는 정신. 명치를 마구 두들겨 대는 심장. 뱃속을 찌르는 수억 마리의 지네들. 고막을 흔들어대는 파열음. 단단한 사각형의 기계를 부서져라 쥔 채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입 안쪽을 세게 물면서 눈을 감았다 떴다. 피 맛이 났다. 이명이 조금 멀어졌다.
다시 휴대폰 화면을 보고, ‘고래’라고 검색했다. 무의식중에 친 거였다. 검색 목록 상단에 내셔널지오그래픽 영상이 떴다. 먹이를 먹는 혹등고래, 사냥하는 혹등고래, 공격당하는 혹등고래……그냥 고래라고만 쳤는데 대부분 혹등고래 영상이었다. 꿈에서 본 그것은 혹등고래였을까.
고래가 바다에서 헤엄치는 동영상을 보면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빽빽한 영상 목록을 보니 뭘 보려고 했는지 알 수 없어졌다.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막연하게 스크롤을 내리다 생각지도 못한 걸 봤다.
<잠이 솔솔 오는 고래 소리 3시간 연속(숙면가이드, 백색소음, 바다소리)>
영상을 클릭하자 정말 바다 아래서 들릴 법한 일렁이는 물소리와 포유동물의 깊은 울음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거품이 보글거리는 것 같았다가, 해안가의 바람 소리 같았다가.
서글픈 단소 소리 같았다가, 낮게 웅얼대는 바순 같았다가.
고장 난 마이크 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건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감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이어폰을 낀 채 휴대폰을 곁에 놓아두고 눈을 감았다.
“지인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집중력을 흩뜨릴 수 없었다. 고운 우유 거품 위에 말린 감귤칩, 청귤칩, 레몬칩을 핀셋으로 집어 하나씩 조심스럽게 얹었다. 그리고 잘라 둔 로즈마리도 예쁘게 올린 뒤 시나몬 가루를 톡톡.
“휴, 됐다. 어때? 이번 시즌 시그니처 메뉴야.”
맞은편에 앉은 그는 내가 내어놓은 시트러스 카푸치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사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성근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고 차(茶)에도 관심이 없었다. 겨우 좀 마시는 거라곤 초콜릿 음료나 스무디 정도였다. 여자친구가 카페 사장이 되면 없던 관심이라도 생기려나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랑 진짜 결혼 안 할 거야?”
그걸 왜 또 물어봐? 입술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말을 간신히 붙잡았다. 뒤따라 나오던 한숨도 삼켰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방금 완성한 예쁜 카푸치노를 다시 보았다.
“아예 안 한다고 한 게 아니잖아. 지금 시기가 안 좋다는 거지.”
“좋은 시기는 언젠데?”
“내가 이 카페에 사활 건 거 알잖아. 저축도 다 썼고, 결혼하려면 또 어디서 대출 끌어오든, 카드론 받든 해야 되는데? 아직 카페 자리도 다 안 잡혔고.”
“식은 그냥 적당히 소박하게 올리면 되지.”
“자기야.”
이미 끝난 이야기를 틈만 나면 되풀이하는 게 지치지도 않는 걸까. 결혼을 왜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같이 사는데. 얘가 여자였더라면 임신이라도 했나 싶었을 거다. 이렇게 보챌 때마다 임신했냐는 농담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심각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성근은 대꾸 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기분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그는 무뚝뚝하게 집에서 봐, 한 마디를 남기고는 카페를 나갔다.
왜 저렇게 안달을 내는 거지? 혹시 부모님이 어서 결혼하라고 재촉하시는 걸까? 동거하겠다고 말씀드리러 찾아뵈었을 때는 두 분 모두 선선히 동의하셨고 내내 웃는 낯이었다. 부모님이 다 계시는 것만 해도 부러운데 예쁜 여동생까지 있었다. 다들 별것도 아닌 일에 까르르 웃었다. 우리 집과는 너무 달랐다. 결혼해도 좋을 것 같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단지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뿐이었다.
눈을 뜨니 창밖이 검었다. 잠이 솔솔 오는 고래 소리라더니 정말이었다. 이렇게 수월하게 잠들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보니 시간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무언가 메시지가 와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거실로 나와 보니 백열등 불빛만 환했고 인기척이 없었다. 엄마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무얼 좀 먹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다지 식욕이 일지 않았다.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에서 빛이 났다. 안 보고 싶었는데 무심코 화면을 보고 말았다. 알림을 죄다 꺼 버리든지 해야겠다. 이 생각도 진즉부터 했지만 아무 것도 안 한지 몇 달째다.
‘왜 답장이 없어? 벌써 자?’
민석이었다. 타이밍 한번 정말 귀신같다. 얘는 희한하게도 엄마가 집에 없을 때를 기막히게 맞춰서 연락한다. 어쩌면 엄마가 집을 비우는 빈도가 그만큼 잦아진 건지도 모르겠다. 메시지를 무시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스마트폰을 들었다.
‘깜박 잠들었어’
답장은 금세 왔다.
‘나 내일 연찬데 고기 먹을래? 내가 쏠게’
‘별로 안 당겨’
그렇게 보내고는 딱 2초 고민한 뒤 한 마디 덧붙였다.
‘심심하면 오든가 집 비었어’
민석은 이십오 분 만에 도착했다. 밤 시간이라 도로가 막히지 않으니 어지간히 달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이십오 분 동안 양치하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다가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꼴에 씻기도 하네.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민석은 바깥 공기를 몸에 덕지덕지 묻힌 채 들어왔다. 패딩에서 날려 오는 공기가 너무 차 콧속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화장을 하든 말든, 집에서 뭘 입고 있든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영양가 없는 안부 인사를 성의 없이 주고받다가 섹스를 했다. 민석과 하는 느낌은 늘 비슷했다. 아주 나쁘지도 아주 좋지도 않았다.
“살이 더 빠진 것 같네, 누나.”
“그런가.”
“고기 먹자고 한 거 빈 말 아니었는데.”
“나도 안 당긴다는 거 빈 말 아니었어.”
민석은 침대에 누운 채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가슴 위에 돌이라도 얹은 듯 무거운 한숨.
“누나.”
“왜.”
“성근이 형, 결혼한대.”
몸에서 나 자신이 밀려난 듯, 육체를 상실한 감각이 엄습했다. 뇌 속에 엉겨 떠다니던 생각들이 흰 페인트로 덧칠한 것처럼 싹 지워졌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가 지나서야 내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렸다가 동요한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억지로 입술을 닫고 속으로 숨을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해야 되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민석의 손이 내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 때문에 어깨가 굳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씨발 새끼.”
민석은 한 번도 내 앞에서 전 남자친구인 성근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출사 모임에서 만난 우리는 다 같이 아는 사이이긴 했지만 셋이서 자리를 함께 한 적은 없었다. 그와 내가 헤어진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나는 그가 성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고, 그도 내가 성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다. 네 음절의 욕설이, 내가 처음으로 듣는 성근에 대한 민석의 코멘트였다.
“그 새끼 누나 돈 아직도 안 갚았지?”
그런 건 좀 물어보지 말지.
“별로 큰돈도 아닌데 뭐.”
“인간으로서 도리가 있지. 누나 사정도 다 아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됐어, 그만 얘기해.”
날카롭게 대꾸하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날 선 내 목소리를 내 귀로 들으니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정말이지 아직도 한참 멀었다.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드라이브 갈래? 바람도 좀 쐬고.”
민석이 가만히 누워 있다가 불쑥 말했다. 괜찮은 애다. 왜 여자친구를 안 만드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물어본 적은 없었다. 난처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내가 알 수는 없다. 한때는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매력이 있었더라면 내가 좋아했을 거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비우고 싶어졌다. 이 쓸모없는 머리통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생이 없는 덩어리로 족했다. 그저 본능뿐인 유기물 덩어리.
옆에 있는 남자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손을 더듬어 돌출된 성기를 잡았다. 나는 그의 것을 잡지 않은 손으로 내 것을 문지르면서, 남자의 귓가에 대고 약간 과장해서 가쁜 숨소리를 냈다. 그러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그렇게 했다. 집중하고 싶었다. 상태가 영 좋지 않은 날은 섹스를 하면서도 자꾸만 딴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괜찮은 편인 것 같았다.
섹스라도 하면 조금 나았다. 진탕 마시고 난 대가로 숙취가 찾아오듯, 하고 난 다음날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질 때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 성기에 남의 성기가 삽입되어 있을 때는 조금이나마 나은 기분이었다. 약간은 살 만한 느낌이 들었다.
민석은 새벽 세 시 즈음해 돌아갔다. 나는 멍하니 누워 있다가 수면유도제를 먹고 유튜브로 혹등고래 소리를 들었다. 일렁이는 물과 바다 속에 부는 바람. 바람이 일으키는 물거품. 울다가 속삭이다가 웅얼거리다가 노래하는 고래, 고래들. 움직이는 물. 움직이는 바람. 움직이는 포유류. 그것들, 살아있는.
아, 오늘도 일어나고 말았다.
창밖으로 해가 뜨고 눈꺼풀 사이로 어렴풋이 빛이 들면 손끝이 차게 식는다. 잠에서 깨어나 버렸다. 돌이킬 수가 없다. 도로 눈을 감고 방금 전의 그 고요하고 검디검은 세계로 돌아가려 애쓴다. 그러면 떨어진다. 떨어진다. 바닥이 없는데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더 아래로. 간신히 다시 눈을 뜨면 쾅, 떨어진 듯 가슴이 쿵쿵대면서 짓눌리는 감각. 내던져졌다. 공기가 무겁다. 잠시나마 고요한 곳에 있었는데, 어디 어둡고 깊은 곳에 잠겨 있었는데, 누군가가, 무언가가 날 꺼내서 이리 던져버렸다. 산소가 부족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숨이 막힐 리 없다. 쿵쿵, 쿵쿵. 계속 가슴이 뛴다. 눈 뜨기가 두려운 건 빛 때문이다. 밤새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날카로운 빛이 왈칵 덮쳐온다.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수천 개의 유리조각에 찔린 듯 꼼짝할 수가 없다.
뻣뻣하게 굳은 몸은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조금씩 녹는다. 몸이 녹기 시작하면 심호흡을 해야 한다. 그때 숨길을 잡아내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열심히 숨을 쉰다.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그 짓거리를 얼마간 하면 조금 괜찮아진다.
씨발, 왜 사는지도 모르겠는데 숨은 존나게 열심히 쉰다.
지난밤에 섹스를 두 번 해서인지 고래 소리를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몇 시간이나마 잤다.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나오니 거실에 엄마가 있었다. TV에서 쿵짝쿵짝 흘러나오는 트로트에 어찌나 집중하고 있는지 나의 존재는 눈치조차 채지 못한 듯싶었다. 화장실에 갔다 나오니 화면은 광고로 전환되어 있었다. 엄마는 그제야 나를 보았다.
“김치찌개 왜 안 먹었어? 이번에 맛있게 끓였는데.”
“생각이 없어서.”
“으휴, 밥은 먹고 살아야지.”
이 나이 먹도록 노모가 끼니 챙겨주는 몸뚱이가 뭐 이쁘다고 밥을 먹여.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제 누구 만났어? 묻고도 싶었지만 참았다. 늙어가는 모친에게 얹혀사는 주제에 기분까지 상하게 할 자격이 있을 리 없으니까.
엄마는 내 대출금이 얼마인지 몰랐다. 창업을 하면서 대출을 받았다는 것은 지나가듯 말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성근이 내게 돈을 빌려간 것도 몰랐다. 심지어 그건 내 명의로 빌렸던 우리 집에서 그가 짐을 빼고 나간 뒤 몇 달이 지나서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내가 몇 시간 전에 알게 된, 그 개자식이 결혼한다는 소식도 들었을 리 없었다. 엄마는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섭섭할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모르는 게 나았다.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속 편한 일이 더 많다.
엄마가 강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이미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군고구마를 두 개 먹었다. 내가 고구마 껍질을 벗겨 꾸역꾸역 입속으로 밀어 넣는 걸 본 뒤 엄마는 TV 앞으로 돌아갔다. 트로트 음악 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보고 찾아왔어요. 기대했는데 진짜 맛있어요. 야, 파운드 케이크 예쁜 거 봐! 가게 분위기 진짜 좋아요. 커피 너무 맛있는데. 꼭 또 올게요. 다음에 또 오자. 찾아올 만하네.
주황색 탁구공을 물속에 넣으면 손으로 아무리 눌러도 동동 떠오르듯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거지하면서도 동동, 에스프레소 머신 청소를 하다가도 동동, 내일 팔 쿠키 반죽을 만들다 동동, 컵 홀더에 가게 스티커를 붙이면서도 동동. 노래 한 곡에 꽂혔을 때처럼, 좋아하던 사람에게 눈이 예쁘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처럼 오늘 들은 칭찬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또 재생되었다. 그렇게 칭찬을 모으고 모아 머릿속에 샘물처럼 고이 저장해 두고 그 속에서 신나게 멱을 감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가게를 죽 둘러보았다. 손님이 떠난 가게에는 조용히 음악만 흘렀다. 가장 평화롭고 안온한 순간. 뜨거운 커피에서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그것, 노릇노릇 빵을 굽는 오븐에서 흘러나오는 그것……바로 그것이 우리 가게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것을 흡 하고 가슴으로 들이마시면서 역시 회사를 관두길 잘했어, 하고 한 번 더 생각했다.
심혈을 기울여 골랐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리듬에 어깨를 들썩이며, 내일 아침 메뉴인 토스트 재료를 손질하는데 갑자기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쳐다보니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덩치 큰 남자였다면 무서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보다 손바닥 한 뼘쯤은 작아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끼고 있던 니트릴 장갑을 벗고 걸어가 한쪽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오늘 마감했는데요.”
“아, 영업 끝났어요?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여자는 귀염성 있는 목소리로 칭얼대듯 말했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에 묘하게 들뜬 말투.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여자가 한쪽 팔에 비스듬히 걸고 있던 자그마한 토트백에서 물건이 와르르 쏟아졌다.
“으아, 또 쏟았어. 죄송해요……힝.”
여자는 비틀거리면서 쪼그려 앉더니 온갖 화장품과 잡동사니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대신 물건을 주워서 그의 가방 속에 넣어주었다. 여자가 고맙다고 인사하며 일어나는데 우리 가게 조명에 비친 얼굴이 발갰다. 나는 문을 열었다.
“음, 잠깐 들어오실래요? 술이 덜 깨신 것 같은데.”
“진짜요? 그래도 돼요? 고맙습니다아.”
그녀는 그래도 되냐고 물으면서 이미 들어와 있었다. 환한 데서 보니 나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젖살이 통통했다. 나는 머신 쪽으로 걸어가며 슬그머니 웃었다.
“오픈하신지 얼마 안 됐죠? 처음에 생겼을 때 진짜 와 보고 싶었는데, 제가 얼마 전에 첨 입사했는데 회사가 너어무 바쁜 거예요. 배울 것두 많고…아, 신입이라서 아직 교육 중이니까 일 땜에 바쁜 건 아닌데, 어, 동기끼리 술자리도 갖고 선배들도 밥 사주시구 그러다 보니까요, 진짜 께에속 오려고 했는데 맨날 실패했어요.”
“그러셨구나. 오늘도 뒷풀이 하셨나 봐요.”
“아, 오늘은 친구들 만났어요. 근데 진짜 제가 여기 오픈 공사하실 때부터 봤는데에, 카페 너무 이뻐요. 저 인스타 팔로우도 하고 있거든요. 다음엔 진짜 영업시간에 올게요. 꼭이요.”
진짜예요! 한 번 더 덧붙이며 힘을 주는 눈빛이 제법 비장했다.
“그래주시면 좋죠. 주말에 시간 되시면 오세요.”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내밀었다. 여자는 차가운 걸 들었다. 술을 마셨으니 찬 게 당길 만도 했다. 나는 남겨진 따뜻한 커피를 들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자는 커피를 쭉쭉 마시며 이십 분 정도 종알거리다가 갔다. 돈은 받지 않았다. 영업시간도 아니었으니까. 대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니 그녀가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갈 때엔 그 어린 뺨의 붉은기가 약간 연해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 덕에 퇴근이 늦어졌다. 매장의 불을 끄고 나오니 거의 자정이었다. 몸이 지쳐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반달이 아름다웠다. 나는 하얗게 빛나는 달을 보며 집을 향해 걸었다.
“엄마, 동해 바다에 진짜 고래가 있어?”
고구마가 담겨 있던 그릇에는 고구마 껍질만 맥없이 남았다. 노랗고 통통한 심지에서 무자비하게 뜯겨져 나와 초라하게 남은 보라색 쪼가리들. 의미를 상실한 잔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엄마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대꾸했다.
“없지 않나? 있으려나? 글쎄다. 모르겠네.”
“그 노래 누가 불렀더라?”
“어떻게 그걸 까먹니? 송창식이잖아.”
맞다. 송창식이었다. 왜 그런 노래를 부른 걸까? 왜 하필 고래일까.
“늬 아빠가 송창식 좋아했는데.”
식도를 넘어간 지 한참 된 고구마가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조차 억지로 넘어가는 마뜩찮은 느낌. 속이 약하게 미식거렸다. 역시 고구마를 괜히 먹었나 보다.
“엄마, 어제 어디 갔다 왔어?”
별것 아닌 양 물었다. 엄마 쪽을 보지는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어 무서웠다.
“어디 갔다 오긴. 엄마가 뭐 갈 데가 어딨겠어.”
약간 힘이 빠진 목소리로, 석연찮은 되물음이 돌아왔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패널들의 웃음소리와 호들갑 떠는 감탄사 더미를 밀어내던 텔레비전에서는 다시 트로트 음악이 쿵짝쿵짝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릇을 들고 조용히 일어나 고구마 껍질을 음식물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고구마를 잃어버린 고구마 껍질 조각들은 썩어가는 바나나 껍질과 생선뼈 위로 떨어졌다. 냄새가 역했다. 얼른 음식물쓰레기통 뚜껑을 닫고 방으로 돌아갔다.
문득문득 사라지고 싶다. 아니, 사실은 종종.
스마트폰 화면에 엄지와 검지를 대고 모으면 이미지가 쪼그라들듯, 몸을 한껏 웅크려 머리를 양 다리 사이에 넣고 작아진 나를 쪼그라뜨리고 또 쪼그라뜨려서, 엄지손톱보다 더 작게, 걷다가 우연히 발로 차고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조막만한 돌멩이, 아니 돌조각 부스러기만큼 조그맣게 줄여서, 발로 콱 밟아 없애버리고 싶다. 그렇게 사라지고 싶다. 마치 세상에 원래 없었던 양.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것에 실패했다. 회사를 그만둔 시점에서 사회의 레일에서 탈선했고, 역병이 터져 인생을 걸었던 꿈에 버림받았으며, 평생을 약속하던 이는 떠난 데다, 돈까지 전부 잃고 빚더미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과 살던 집도 반납하고 어머니의 집으로 기어들어왔다. 이 모든 게 내 잘못은 아니기도 하고 또 전부 내 탓이기도 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내 잘못이든 아니든 어쩌겠어.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뭐가 됐든 내 현실은 구역질나는 시궁창에 처박혔다. 답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솔직히 이제 와 그깟 게 중요한가 싶기도 하다. 정신 건강, 하, 웃기지도 않아.
그렇지만 내가 죽으면 엄마가 슬퍼하겠지.
느닷없이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 조그만 근육 덩어리가 가슴을 세차게 때리는 감각이 흉통으로, 명치로, 손끝으로, 턱밑으로, 귓속으로 느껴졌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허공에 매달린 듯, 떨어질 듯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내장의 지네들이 다시 꿈틀거린다. 침을 꿀꺽 삼키고 고래 소리 영상을 튼 다음 눈을 감았다.
나는 언제든 잠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잠을 위한 방을 쓸고 닦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화병에 꽃까지 꽂아두고, 예쁜 유리잔과 좋은 술까지 내어 놓는다. 필요하다면 침대도 정돈하고 끈만 달린 속옷도 입을 수 있다. 잠이 저 문을 열고 찾아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두 팔 벌려 몸을 겹칠 것이다. 잠이 다시는 떠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기쁜 마음으로 문에 빗장을 걸겠다. 그러나 잠은 쉬이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다.
나는 잠을 위해 정리한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생각 속의 생각 속의 생각 속의 생각에 휘감겨 떠내려간다. 생각의 물길을 따라 흘러가면 바다로 가 닿는다. 검고 어두운 바다. 쓰나미가 밀려들고 회오리가 휘몰아치는, 이따금 고요하기도 한 바다.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깊고 깊은 심해로 내려가면 고래가 있을 지도 모른다.
바닷가 모래톱에 서서 보았던 고래의 시체는 누가 죽인 것일까? 언제 죽은 것일까?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죽였는지도 몰랐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달리 누가 있겠는가? 내 기억에는 없다 해도.
귓속을 파고드는 고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슴 위쪽,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하는 것을 삼켜 넘긴다. 그것을 온몸으로 꾹꾹 누른다. 의식을 그러모아 바다 밑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단소 소리 같기도 한 포유동물의 울음에 귀를 기울인다. 온 힘을 다해.
꿈에서 비가 왔다. 바다에 내리는 비는 도시에 내리는 비와는 다르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된 빌딩, 시멘트 도로 위로 내리는 도시의 비는 가만가만 떨어지고 을씨년스럽다. 쉴 새 없이 물결치는 수면 위로 내리는 비는 야성적이고 뜨겁다. 평생 도시 비만 맞아온 나는 바다에 내리는 비가 낯설다.
바다 한가운데 쓰러져 있던 고래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간 걸까. 죽어 있었는데 누가 치웠을까. 시체가 자취를 감춘 바다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검은 바다와 백사장과 그 위에 선 나뿐이다. 아니, 흰 바다와 검은 모래밭인가. 바다가 검은 것인지 육지가 검은 것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다. 하늘에 갈매기 한 마리, 모래 위에 조그만 게 한 마리 없지만 꿈속의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꿈속의 나는 바다의 비를 맞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다. 아니, 비가 아니라 해수인가. 내리는 것은 구름의 물인가 바다의 물인가. 그도 아니면 백사의 모래인지도. 아니, 백사가 아니라 흑사의 모래인가.
모래에 서서 고래를 찾던 나는 어느 새 바다에 홀로 떠 있다. 구명조끼도, 튜브도 없이. 양 팔을 첨벙대 보지만 무겁디무거운 몸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사지를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소용없다. 물속은 희뿌옇고 캄캄하다. 입과 코, 귀, 눈꺼풀 속까지 검은 물이 세차게 넘어온다. 온힘을 다해 버둥거리지만 내 몸은 이미 검은 물로 꽉 찼다. 그리고 가라앉는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더 아래로.
눈을 뜨니 창밖이 환했다. 이번엔 또 몇 시간을 잔 거지. 스마트폰을 들어 보니 오전 열한 시 오 분. 일요일이었다. 잠깐…일요일? 민석이가 왔던 날이 목요일 밤이었던 것 같은데 그새 일요일이 된 건가? 시간이 어떻게 가는 거지? 어제는 뭘 했더라?
부스스 일어나 비척비척 방문을 열고 나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탁 위에 쪽지도 없었다. 휴대폰을 다시 보았지만 엄마가 남긴 메시지는 없었다.
엄마는 어딜 간 걸까? 나를 버려두고 도망친 걸까? 누구에게 갔을까? 미연 아줌마는 아닐 것이다. 남자친구? 정말 엄마한테 내가 모르는 남자친구가 생긴 걸까? 그런 게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런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가로막고 있던 구석진 골목으로 생각이 뻗어나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나는 무력하게 양팔을 늘어뜨리고 내 의식이 달아나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니까…계속해서 도망가는 아빠한테로, 엄마도 가 버린 거다. 달아난 것이다. 당연하다. 자식 따위, 자식이라 해도, 생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은 내버리는 게 이치에 맞다. 남은 것이라고는 입속의 이명과 가슴속의 비명과 두개골 속의 눈물과 방광에 고인 약간의 위액, 발목뼈에 찬 오줌. 생 없는 유기물 덩어리. 뱃속에 지네가 들끓는 부동물(不動物).
쿵쿵쿵쿵쿵쿵쿵.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목 뒤로 식은땀이 조금 났다. 엄마를 찾아야 해. 심장이 얼마나 거세게 흉통을 때려대는지 팔다리까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태풍 같은 요동에 쓰러질 것 같았다. 발을 떼어 내딛었다. 걸었다. 엄마를 찾아야 해. 엄마를 잡아야 돼. 걸었다. 날 버리지 마. 엄마.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품고 현관을 향해 걸었다. 금속으로 된 현관문이 차차 가까워졌다. 이제 현관 턱을 밟고 내려가 신발을 신고 저 손잡이를 돌리기만 하면 되었다. 두 발짝만 걸으면 바깥이었다. 턱만 밟고 내려가면…. 그때 불현듯 귓속으로 우웅웅웅, 소리가 들려왔다. 고래 울음소리였다. 엄마. 날 버리지 마. 내 심장 소리였나? 우웅웅. 쿵쿵쿵쿵쿵. 우웅웅웅. 쿵쿵쿵쿵쿵. 우웅쿵웅웅쿵쿵쿵웅쿵쿵우웅웅웅웅. 웅웅웅웅우우우쿵쿵쿵쿵쿵. 고래 우는 소리와 심장 소리가 번갈아 들려오더니 이내 연달아 한꺼번에, 터질 듯이 울려왔다. 귓속이, 머릿속이, 가슴속이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 북. 북. 부우우우욱. 부우우욱.
나는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