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비둘기 Feb 06. 2023

(9) 마주하다





윤정은 환하게 웃으며 정윤을 맞았다.

“꺅! 이제 왔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지금 아무도 없어. 완전 잘 됐지!”

그녀는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더니 정윤의 손을 잡고 집을 여기저기 안내했다. 그는 방이 다섯 개나 되는 아파트는 처음이었다. 원룸이라 보여줄 것도 없었던 정윤의 집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기는 안방이고 그 맞은편은 엄마 서재, 여긴 보면 알겠지만 뭐, 거실이랑 부엌이고, 저기 베란다에 화분 진짜 많지 않아? 누가 자꾸 사는 건지 모르겠다니깐. 청소해주는 아줌만가? 여튼 이쪽 문이 동생 방, 화장실은 저거고, 내 방은……바로 여기!”

엄마 서재? 아버지가 안 계시나? 그러면 안 되겠지만, 정윤은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구나. 그런데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시기에 서울에서 이렇게 큰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거지? 게다가 청소해주는 아줌마?

정윤의 엄마는 동틀녘부터 한밤까지 항상 일만 했다. 그는 형제도 없어서 엄마와 둘뿐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렇게 일하고도 엄마는 천 원 한 장 마음 놓고 쓰는 적이 없었다. 정윤이 입시미술학원을 다니고 미대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어릴 적 급사한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 덕분이었고, 엄마가 결코 그 돈을 쓰지 않은 덕이었다. 그것으로도 학비를 전부 충당할 수는 없어서 일부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다. 넉넉한 집안의 남자를 만나야 한다며,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정윤은 엄마에게 남자를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윤정은 한참을 조잘조잘 떠들며 캡슐 커피를 내려주었다. 정윤은 캡슐 커피라는 것도 처음 보았다. 집에 이런 기계가 있다니. 엄마 생각에 조금 가라앉았던 기분은 커피 냄새를 맡으니 금세 나아졌다. 두 사람은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윤정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정윤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밝고 화사하고 예쁜 물건이 많았으며, 책은 거의 없었고 화장품과 옷이 많았다. 기다란 천으로 가려진 커다란 전신 거울이 두 개 있었고 화장대에도 거울이 있었으며 책상 위에도 탁상 거울이 두어 개 있었으나 탁상 거울은 대부분 눕혀져 있었다. 화장대 옆에 놓인 쇼핑백 안에는 손거울이 잔뜩 들어있었다. 전체적으로 정윤의 생각보다 조금 더 지저분했고 비싸 보이는 물건은 더 많았다. 옷장 문고리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쇼핑백에 그려진 것이 명품 브랜드의 로고일 것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윤정은 방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정윤의 얼굴을 잡고는 입을 맞춰왔다. 정윤은 커피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키스를 했다.

“내가 이게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알아?”

윤정의 목소리와 숨에 실린 열이 너무 뜨거워 눈가와 이마가 델 것 같았다. 가슴 아래 어딘가가 녹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정윤은 서둘러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윤정을 끌어안고 목에, 귀에, 코에, 눈에 키스했다.     




이 침대에서 매일 잠들고 일어나고, 누워 있겠구나. 정윤은 등에 닿는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생각했다. 옆에 누운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비스듬히 누워 살짝 풀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한쪽으로 쏠린 유방 아래로 진 음영이 둥글었다. 달의 그림자가 이럴까?

“가슴도 예쁘네.”

윤정은 애교스럽게 눈웃음을 짓더니 정윤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니 꺼야.”

“정말?”

“나 죽으면 떼어가도 돼.”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안 돼.”

단호하게 대답하는 모양이 귀여워서 정윤은 윤정을 꼭 끌어안았다.

“있잖아.”

“응?”

“이 침대에서 자위도 해?”

정윤은 자신의 대담함에 놀랐다. 그러나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 정말 변태구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걸 궁금해 한다는 것보다도 계속해서 그 생각만 든다는 점이 진짜 변태 같잖아. 하는 수 없었다. 순순히 받아들이고 변태처럼 물어보는 수밖에.

윤정은 눈을 깜박였다. 얼떨떨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이 애가 말을 할 때 이렇게 뜸을 들인 적이 있기는 했던가? 정윤은 괜한 걸 물어봤나 싶어 조바심이 나면서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묵묵히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눈 감았다 뜨는 것도 어쩜 저렇게 귀염성 있게 하는 거지, 새삼 신기했다. 자신의 얼굴이라 똑바로 보기 힘들다는 점만 빼면 무척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줘? 엄청 많이 했어…너 사진 보면서.”

“내 사진?”

정윤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내 사진을 찍었단 말인가? 그 못생긴 얼굴을? 그러나 이내 그녀가 지금 정윤의 얼굴, 한때 그녀 자신의 것이었던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정윤을 보고 윤정이 씩 웃더니 볼에 뽀뽀를 했다. 그녀의 입맞춤 소리가 정윤의 드러난 쇄골 위로 떨어졌다. 


둘은 삼십 분 가량을 더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다 배가 고파 겨우 일어났다. 정윤은 맨몸으로 있고 싶었지만 윤정이 홈웨어를 걸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옷을 입었다. 그는 외출복을 입었고 그녀는 실내복을 입은 것인데도 어째 자신의 차림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윤정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로 스마트폰을 켜 배달 앱을 보여주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야, 정윤정!”

민정이었다. 두 사람은 순간 얼어붙어 멍하니 민정을 쳐다보았다. 찰나의 순간 적막이 흘렀지만 윤정은 금세 사납게 외쳤다.

“아, 방문을 왤케 막 열어 재껴대! 손님 온 거 안 보여?”

“내 알 바? 성우 오빠 왔거든?”

“뭐?”

윤정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고는 문가에 선 민정을 팍 밀쳐내고 방을 나갔다. 민정은 입을 삐죽이며 정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떴다. 옷을 입어 천만다행이었다는 안도와 동시에 불안이 엄습했다. 성우가 누구지? 설마 윤정의 남자친구인가? 정윤은 몸의 열기가 식으며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반쯤 열린 문 바깥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윤정의 목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옥신각신하는 두 목소리가 문틈으로 기어들어오는 것이 불쾌했다.

“아, 그니깐 누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래?”

“연락이 안 되니까 그렇지.”

“연락을 못 하는 상황이니까 연락이 안 되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방문이 활짝 열렸다. 윤정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음식 메뉴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던 그는 날개뼈를 때리는 발걸음 소리에 흠칫 놀랐다. 윤정만이 아니라 덩치 커다란 남자가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피부가 희고 시원스럽게 생긴 남자였다. 정윤은 원래 얼굴을 가진 윤정과 그가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이쪽을 보고 붙임성 좋게 웃어 보이더니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하세요, 저 윤정이 남자친구 강성우라고 합니다. 어휴, 저 귀에 피나도록 누나 얘기 들었거든요. 정윤 누나 맞으시죠?”

“아, 네에.”

정윤은 침대에 앉은 채로 엉거주춤 인사했다. 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건가? 혼란스러워 머뭇거리다 어색하게 그 손을 잡았다. 미묘한 죄책감과 연민, 승리감이 뒤섞여 심장 근처를 뱅뱅 맴돌며 핏속에 휘몰아쳤다. 윤정이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공중에 흩날렸다. 아니, 그냥 숨소리였나? 정윤의 착각인지, 그런 소리를 정말 들은 건지 헷갈렸다. 성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잡은 손을 한두 번 흔들더니 악수를 풀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꼬마 때를 제외하면 남성의 손을 잡은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남자의 손이 생각보다 크고 강해서 놀랐고, 또 따뜻해서 놀랐다. 윤정의 손보다 훨씬 따뜻했다.

“자, 이제 얼굴 봤고 인사했으니까 됐지? 얼른 쫌 가, 빨리.”

윤정이 남자의 등과 어깨를 잡고는 밀어냈다. 그 자연스러운 접촉에 순간적으로 뱃속이 확 달아올랐다.

“와, 진짜 인사했다고 바로 내쫓냐? 너무하다, 너무해. 정윤 누나, 얘 진짜 무자비하지 않아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은 아옹다옹하며 다시 방을 나갔다. 정윤은 손에 쥐고 있던 윤정의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화면을 들여다 볼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윤정이 혼자 돌아와 방문을 닫았다. 그녀는 후우, 한숨을 내쉬더니 울상이 되어서는 정윤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자기이, 나 너무 힘들었어! 갑자기 말도 없이 쳐들어와선 뭐냐구 그 새끼이…. 진짜 속상해애…….”

정윤은 당황했지만 잠자코 그녀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뭘 얘기하든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정이 본인의 이전 사진들을 보내주었다. 총 열세 장이었다. 이걸 다 그려달라는 건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구태여 물어서 확인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진은 하나같이 연예인처럼 화려하고 분위기 있었다. 어떤 것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찍을 수도 있구나. 같은 얼굴인데도 본인이 어설프게 찍은 셀카와는 몹시 달랐다. 

그는 사진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앉은뱅이책상을 펴고 종이와 연필을 꺼내 왔다.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해 봤지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 장을 그려 봤지만 다 엉망진창이었다. 그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정윤은 포기하고 그림도구를 치운 뒤 책상을 접어서 넣어버렸다.

맨몸으로 매트리스 위에 눕자 밤이 깊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된 가로등이 깜박이는 소리. 잠에서 깬 길고양이들이 담을 오르는 소리. 달이 검은 하늘을 걷는 소리. 그런 것들. 

학부 시절에는 추상화를 그렸다. 소리를 형상화한 그림. 과 동기들과 교수님들은 감정의 움직임을 표현했다고들 생각했다. 감정이 아니었다. 소리였다. 음악을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정윤은 항상 소리를 느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에게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였다. 많은 소리가. 그래서 눈이 멀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건 다 소리였으니까.

어쩌면 윤정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의 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높고 명랑한 목소리와 약간 큰 숨소리, 경쾌한 구둣발 소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 그녀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소리들. 자신의 어둡고 거슬리는 소리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정윤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언제나 옷을 벗고 자는 이유를.

정윤은 눈을 감고 윤정의 소리를 떠올렸다. 이불 속에 손을 넣어 벗은 몸의 아래를 만졌다. 그날 밤에는 윤정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난 정윤은 약속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는 지훈을 거절하지 못했다. 꼭 윤정에게 되갚음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맹세코 이러려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일이 어쩌다 이렇게 돌아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사람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웃으면서 말을 거는 사람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이런 말을 스스로 한다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게 누가 됐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그랬다. 더군다나 남자에게는 더 심했다. 낯설어서인지, 무서워서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누가 나한테 다가와 준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는 그렇게 믿었다. 따지고 보면 윤정과의 만남도 그런 식이 아니었던가? 윤정은 웃으면서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오히려 공격에 가까웠지.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을 생각하니 왠지 웃겨서,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지훈과의 약속 장소로 버스를 타러 나가는 길에 간밤에 꾼 꿈이 떠올랐다. 간조가 되어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바위가 모습을 드러내듯이. 문득.

피가 많이 나오는 꿈을 꿨다. 그랬던 것 같다. 정윤은 물에 젖어 번진 펜글씨를 읽듯 흐린 기억을 막연하게 더듬으며, 생각했다. 누구의 피였을까? 자신의 피였는지도 몰랐다. 꿈에서 배가 갈려 내장이 드러나고 온몸과 바닥이 피범벅이 되는 장면을 보았던 것이 설핏 떠올랐다. 아니, 꿈이 아니라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장면이었는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그게 꿈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 피가 자신의 피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꿈에서 다른 누군가를 본 기억은 나지 않았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그 꿈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 같아. 마치 무성 영화처럼. 꿈속에서 나는 결국 죽었던 걸까. 소리 없는 죽음. 죽음 후의 소리 없음. 


매거진의 이전글 (8) 마주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