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성우는 윤정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런 남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윤정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윤에게 얼마나 실망할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실망이라도 하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린애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내버리듯 아무렇지 않게 정윤을 버릴 수도 있었다. 그녀의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차라리 알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얼마나 애태우면서 예뻐해 주었는데. 그 추악한 얼굴을 달고 있는데도 말이야. 내가 그 얼굴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나만큼 소중하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쿡 찌르면 훌러덩 바지를 벗어재끼는 저딴 새낄 왜 아직까지 옆에 끼고 있는 거야? 내 귀에 대고 불러대던 사랑 노래는 다 뭐야. 원래 먹던 것도 손에 쥔 채로 새로운 걸 맛보고 싶은 거야? 욕심도 많지. 씨발년.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 마음도 모르고.
감정이 격앙되어 주체하기 어려울 때는 사진첩에 가득한 셀카를 보았다. 이제 그의 스마트폰 사진첩에는 아름다운 얼굴이 가득했다. 이 얼굴을 얻은 것도, 윤정을 만난 것도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 이따금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도 나한테.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여태껏 이십 몇 년이 넘는 세월, 낳아준 부모부터 사는 동네, 외모, 지능(깡통은 아니었지만 아주 명석하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운동신경, 심지어 성격까지 운이 따라줬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 그랬건만 느닷없이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아니, 기적 같은 일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적이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나라고? 정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들어온 모든 칭찬을 다 합쳐도 최근 얼마간 들은 칭찬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예쁜 애가 성격도 좋은 법이라는 명제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몸소 깨달은 시간이었다.
그런 것치고 윤정은 결코 착한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의 남자친구와 정윤이 몸을 섞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조용히 지나갈 리가 없었다.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거나 코웃음치며 지나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기엔 윤정의 자아가 너무 비대했다. 아마 한바탕 난리를 피우겠지,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고 나면 정윤은 두 번 다시 윤정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니다. 정윤은 생각을 고쳤다. 먼저 사랑에 빠진 것은 자신이었지만 원래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해도 상관없는 것도 그였다. 그놈의 못생긴 얼굴은 오히려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윤정과 몸을 겹칠 때조차 가끔 그 얼굴을 보면 비닐 봉투를 씌워 저 세상으로 보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자기애로 똘똘 뭉친 윤정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터였다. 그녀는 분명히 정윤의 얼굴에 집착했다. 이 얼굴을 보지 않고 살기는 힘들겠지. 그러나……날 곁에 두고 지금처럼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면 이제 선택을 해야 할 거야. 정윤은 마음을 정했다. 모든 걸 손에 쥐려는 윤정의 욕심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기로.
“정윤 쌤.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그는 지훈의 눈을 피했다. 도저히 마주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학원도 빠지고 도망쳐 버리고 싶었지만 월급을 받아가는 입장에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이 아르바이트가 밥줄이었다.
정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바람맞혀본 적이 없었고, 약속에 늦어본 일도 손에 꼽았다. 늦는다고 해 봐야 십 분에서 십오 분 내외였다. 더군다나 따지고 보면 지훈과 만난 것이 남자와 한 첫 데이트였다. 그런 자리에서 그렇게 사라지다니. 정윤은 민망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면서도 요사이 들어 난생 처음 해본 게 엄청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진짜.”
“좀 죄송하셔야 될 것 같네요. 그때 그 사람, 설마 남자친군 아니죠? 전 남친?”
“네에? 아, 아니에요! 둘 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펄쩍 뛰며 부인했지만 상대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
“절대 아니에요. 만나는 사람도 있고요, 그 사람.”
“정말이에요? 저 속은 거 아니죠?”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정윤과 지훈은 단지 낯만 좀 익었다 뿐이지 사실상 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속일 것도 없었고, 속이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었다. 애초에 정윤이 그럴 만한 말을 한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 부분을 지적해 주고 싶었으나 일단 잘못을 저지른 입장인지라 억지로 웃었다.
“그럼요.”
“정윤 쌤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용서해 드릴게요.”
“아…네에. 감사해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지훈이 다시 그를 붙잡았다.
“그럼 이번엔 정윤 쌤이 쏘세요. 괜찮죠?”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혀끝에서 간질거리는 말을 겨우 삼키고 정윤은 하하, 그래요, 대꾸하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번에야말로 연락이 와도 무시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면전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며 거절하는 건 성격상 시켜도 못 할 거였다. 생업인 학원을 관둘 수 없어 이런 상황을 피할 수조차 없는 가난이 정말 싫었다.
그 충남 산골에 처박혀 사는 엄마의 느릿한 목소리가 문득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언제나 돈 얘기, 또 돈 얘기, 그리고 돈 많은 남자 만나야 한다는 얘기만 늘어놓던 목소리. 나도 제몫 하는 부모가 가지고 싶다.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한숨을 참으며 정윤은 화장실로 향했다. 잠깐이라도 숨 돌릴 구멍이 필요했다.
근무를 마치고 화구와 작품 정리까지 마무리한 그는 헐레벌떡 학원에서 빠져나왔다. 지훈과 마주칠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숨 돌린 정윤은 윤정에게 연락해 볼 것인가에 대한 갈등과, 윤정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점에 대한 고민을 번갈아 하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느끼던 바람 소리, 승용차의 바퀴가 시멘트 바닥에 구르는 소리,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그 많은 소리들이 더는 자신에게 와 닿지 않는 것만 같았다. 모두 튕겨져 나가는 기분. 이 소리들마저 나를 따돌리는가, 하는 기분.
빌라의 계단을 올라서자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윤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끌어안고, 뺨을 때리고, 가슴에 키스를 하고, 욕설을 퍼붓고, 허벅지를 물고, 목을 조르고, 발에 입을 맞추었던 그녀. 잠들면 그의 꿈을 비집고 나와 세상을 흔드는 목소리로 웃던 사람. 그녀의 인영이었다. 겁이 나 결국 메시지 하나 보낼 수 없었던 그 사람이 정윤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몸을 돌려 이쪽을 보았다.
정윤은 숨을 참고 침을 삼켰다. 윤정은 정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입은 꼭 다물렸고, 눈물은 이미 아랫눈꺼풀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생경했다. 정말 나빴다. 왜 그런 얼굴로 쳐다보는 거야. 정윤은 입을 떼었다가 다시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멈칫거리다 어색하게 걸어가 현관문의 잠금을 풀었다. 몇 초 걸리지도 않는 이 간단한 동작이 이토록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들어가자, 일단.”
겨우 입이 떨어져 그 한 마디만 간신히 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무심코 윤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망연한 얼굴로 정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우는 것도 저렇게 드라마 주인공처럼 울까.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밀어 윤정의 어깨를 잡았다. 가느다란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순간 그녀가 반쯤 고의로 몸을 떤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때 정윤은 윤정을 후려치고픈 강렬한 증오와, 그러한 연기조차도 귀엽게 보이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뒤섞여 갈비뼈 아래에서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윤정을 잡아끌다시피 현관문 안으로 들였고, 그녀의 몸이 문 안쪽으로 들어오자마자 목을 움켜잡고 잡아먹을 듯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