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에서 22살로 넘어가던 겨울, 유럽에 갔다. 엄마는 ‘혼자는 위험하다’며 사촌동생과 함께 가라고 했다. 혼자 가려고 계획했던 여행에 일 년에 두 번 보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친하다기에도 어정쩡한 동생이 끼는 것이 영 달갑지 않았지만 엄마도 이모도, 사촌동생도 언니랑 같이 가면 걱정이 없겠다며 좋아하니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내가 먼저 여행을 하다가 동생이 합류하고 같이 귀국하는 일정이 정해졌다. 여행 내내 안 맞고 답답한 점들이 있었지만 그건 묻어두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 되었다. 체크인을 늦게 해서인지 좌석이 서로 떨어져서 배정됐다. 몇 시간쯤 날았을까. 건너편 복도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기내의 의사를 찾는 방송이 나오고, 달려온 의사 승객분이 딱딱한 볼펜 없냐며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발작을 일으켰고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입에 물릴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슨 난리지? 하며 돌아본 자리에는 사촌동생이 뒤집힌 눈으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상황을 확인한 순간 눈물이 나고 손이 떨려왔다. 승무원들 사이를 헤치고 동생 옆자리로 가니 누구냐고 물었다. 일행이에요. 사촌언니예요. 환자 기저질환이 있어요? 평소에 먹는 약이 있어요? 몰라요. 그것도 몰라요? 다행히 동생의 발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물을 따라주고 괜찮은지를 살폈다. 괜찮다고, 언니 원래 자리로 가라고, 피곤하니 좀 자겠다고 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긴장 속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동생 자리 쪽을 돌아보니 동생은 일어나서 천장 캐비닛의 짐을 꺼내고 있었다. 내 자리 쪽 복도에 사람이 밀리고 있었고, 동생이 무사히 일어나는 것도 확인했기에 먼저 비행기를 빠져나가서 동생을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동생이 나오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다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승무원들에게 제지당했다. 내린 비행기에 다시 탈 수는 없다고, 그냥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동생은 인천공항 구급대의 들것에 실려 나왔다. 동생 옆에는 아까도 뵈었던 의사 승객분이 계셨다. 의사 승객분은 나를 보자마자 ‘환자가 이 상태인데 보호자가 어떻게 혼자 먼저 나가냐, 정신이 있냐 없냐. 발작 후에 근육이 놀라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하며 화를 내고 가셨다. 동생은 자기가 발작을 일으켰던 걸 기억하지 못했고, 온몸에 힘이 빠져 가방을 내리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고 한다.
억울했다. 나는 얘를 일 년에 두 번 겨우 보는데. 기저질환이 있는지, 평소에 먹는 약이 있는지, 발작을 하면 근육이 놀라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왜 이렇게 혼이 나야 해? 그렇지만 나의 억울함을 호소할 상황이 아니었다. 동생은 그대로 인천공항 응급실로 이송되어 간단한 검사를 하고 수액을 맞으며 안정을 취했다. 응급실 의사 선생님은 ‘보호자 이쪽으로 와보세요’라며 나를 불러서, 뇌전증일 가능성이 있으니 꼭 대학병원에서 뇌파검사를 받아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고 기차를 탔다. 나는 원래 서울의 기숙사로 바로 들어갈 계획이었는데, 당시에 서울로 동생을 데리러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집으로 같이 내려가기로 했다. 동생은 여전히 몸에 힘이 없다며 터덜터덜 걸었다.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이고 지고, 가는 동안 동생이 또 발작을 일으키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몸도 마음도 잔뜩 긴장한 상태로 4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기차에서 내리자 마중 나와있는 이모와 엄마가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동생에게 가서 동생의 상태를 살폈다. 그 순간이 너무 서운했다면 오히려 괜찮았을 것 같다. 그건 그냥, 익숙했다. 아. 내가 서울에 혼자 지내다가 멀리 유럽까지 다녀와서 깜박했었네. 원래 이런 거지. 나한테는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거지. 대놓고 아픈 사람만 아픈 거지. 원래 이랬지 참. 지적장애인 언니와 함께한 21년 간, 발작을 일으킨 사촌동생을 보살핀 하루 동안, 나를 먼저 신경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나를 살펴주는 건 언제나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내가 혼자 울다가 털고 일어난 다음, 혹은 그마저도 없었다.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의 달인 4,5월을 지나면서 너무 지쳐 상담을 받기 시작했었다. 학교가 안 맞는 건지 상담이 안 맞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 상태를 보면 부모랑 이야기해야 한다는 건 명확한데, 학교에서 부모랑 상담을 하려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책임만 내가 다 져야 한다. 부모를 불러서도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다. 애를 키워 보지도 않은 사람이 '애를 행복하게 키우시려면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는 말이 과연 어떻게 들릴지. 그냥 비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지. 그래서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지. 나는 누구를 공격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을 바꾸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 인생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상담을 하면 계속 그렇게 해야 해서 너무 힘들다. 내 잘못도 아닌 일에 끼여 있는 느낌이 든다. 줄줄이 하소연을 하자 상담선생님께서는 끼여 있는 게 왜 싫은지. 다른 사람 일에 개입하는 게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힘들지 물으셨다.
그 질문을 받는데 문득 위의 인천공항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당연히 모르는 건 데, 나도 알 수가 없는 부분인데 왜 모르냐고 문책을 당하면서 너무 억울했다고. 캐리어와 불안감을 가득 끌고 동생을 집에 데려가는 길이 나도 정말 힘들었는데 도착한 곳에서 모두가 동생만 챙기는 게, 그 광경이 익숙한 게 너무 아팠다고. 아무 데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 "그게 선생님의 트라우마인 거예요. 내가 봉변을 당했는데, 내가 밖에서 내 잘못도 아닌 일로 다른 사람한테 혼이 났는데.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기차 타고 가는 그 시간이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근데 그건 아무도 몰라주고. 당장 옆에 아픈 애만 봐주고. 근데 심지어 그게 그거 한 번도 아니야. 내 평생에 이랬어."
"그런데 학교에 있으면 계속 그런 상황이 벌어지잖아요. 애는 울고 학부모도 울고. 나는 이 상황을 중재해야 하고. 선생님들한테 아쉬운 소리 해가며 얘가 왜 이러는지 대신 설명해줘야 하고. 생 난리를 쳐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못 듣고. 물론 고맙다고 해야 할 상황에 고맙다고 하는 고차원적인 대인관계 기술을 갖춘 아이라면 이런 사단을 만들지도 않았겠죠.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한 거겠죠. 저도 아는데. 근데 그냥.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가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내가 상담을 못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대학원에 갈까 하는 생각도 한 건데, 이게 이론을 더 배운다고 메꿔지는 구멍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 "혜은 씨는 그동안 혼자서 잘 해왔겠죠. 그런데 상담을 잘하는 건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 하고, 조율하고, 각자 이렇게 좀 해달라고 끌어 모으는 게 상담을 잘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내가 깨져야 하고. 힘든 과정이긴 하죠."
"저는 깨지기 싫어요. 이걸, 극복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요. 그냥 도망치고 싶어요. 이렇게 끼여서 치이는 거 그만하고 싶어요."
- "그래요. 더는 거기에 있지 맙시다. 도망쳐도 돼요. 꼭 거기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내 잘못도 아닌데 책임지고 신경 쓰고 사이에 끼여있는 거. 아무도 나한테는 괜찮냐고 안 물어봐 주는 거. 평생 해 온 그 포지션 지긋지긋하니까 그만합시다. 그만해도 돼요. 언니와의 관계, 집에서의 자리는 내가 선택하지 못했지만 내 삶에서의 자리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죠."
나를 거기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그만해도 된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상담소를 나와 합정 길거리에서도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학교라서 좋은 점도, 아이들이 주는 보람과 기쁨도 분명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건강서비스를 처음 접하게 되는 공립학교 상담실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건강서비스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필요할 때 더 편하게 상담이나 정신과를 찾을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임용 시절의 내가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의 상담으로 확실해진 것 같다. 학교를 떠나야겠다. 당장 관두겠다는 건 아니고… 공부를 더 해서 성인상담으로 가볼지, 아예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할지, 다음 단계를 또 한참 고민 해봐야겠지만 그래도 하나의 선택지를 걷어낸 것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