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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Mar 14. 2024

Day8 : '그래도 이 날 보다는 낫지'의 '이 날'

Day8

    어제 렌 시내는 대충 다 봤고 내일부터는 또 열심히 여행해야 하니 오늘은 푹 쉬기로 했다. 에어비앤비의 좋은 점은 부엌을 쓸 수 있다는 거니까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서 직접 해 먹어보려고 했다. 와인까지 한 병 사서 기분 좋게 장을 보고 왔다. 파스타를 삶아 먹은 후에 노트북에 담아 온 영화를 보고, 몽생미셸에 가는 루트를 자세히 알아볼 계획이었다. 생각만 해도 행복했는데...


    파스타를 삶으려고 물을 올렸는데 아무리 지나도 끓지가 않고 인덕션이 딱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전원이 자꾸 꺼지는 느낌이라 계속 껐다 다시 켜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간 지나면 끓겠지 하며 레시피를 검색하려고 식탁에 놔둔 휴대폰으로 향한 순간, 등 뒤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냄비는 그대로 내려앉아있고, 바닥과 싱크대 위에는 검은 유리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정말. 너무. 놀랐다. 한참 멍하니 사고(?)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일단 이 미친 유리조각들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움직이자 바닥에 있는 유리조각들이 밟혔고 슬리퍼 바닥에 박힌 조각을 빼내다가 손끝을 베였다. 놀란 마음에 눈물이 쏟아지려 했지만 혼자 사고 치고서는 울고만 있는 건 너무 답이 없는 것 같고, 이럴 때일수록 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문제의 부엌. 오른쪽의 검은 판(?)을 보라. 누가 봐도 인덕션이 아닌지.......

    창고에서 빗자루를 찾아 천천히 유리조각을 쓸어 담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게 정말 다행이야. 정말 알 수 없는, 생각조차 안 했던 일이 일어나는구나. 여행자 보험을 다음부터는 꼭 들어야겠다. 아니 내가 뭘 부술 줄 알았나... 변상해야겠지.. 얼마일까... 30만 원 안쪽이면 좋겠다... 별 생각이 다 들다가 그래도 지금이 캐리어가 없어졌을 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자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인간이 한번 ㅈ될 뻔하고 나면 무서울 게 없구나!)


    정리를 대강 마치고,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는 않아서 아까 사 온 와인을 따서 한잔 마셨다. 달달한 알코올이 들어가니 한결 나았다. 집에 연락하고 호스트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너의 가스레인지 덮개를 터뜨렸어.. 미안해.... 집에서 보이스톡이 왔는데 아빠엄마 목소리를 들으니까 아까 참았던 눈물이 조금 나려고 했다. 크리스틴은 내가 뭐라는 지 못 알아듣겠으니 집에 가서 확인해보자고 한다. 그녀가 집에 오기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가 남았고 그전에는 완벽히 진정돼서 상황을 잘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도 놀란 게 남아있고 무섭다. 놀라서 배도 안 고파졌다. 이따 와인이나 한잔 더 마셔야겠다. 일단은 좀 진정하고 원래 하려던 대로 몽생미셸 가는 루트를 알아봐야지.


    다행히 크리스틴은 당신의 가스레인지 덮개가 인덕션인 줄 알았다는 내 말을 이해해 주었다. 유리조각에 베인 상처에 연고를 뿌리고 밴드를 붙여주며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해주고, 내가 계속 미안하다고 하자 네가 미안해하는 거 안다고 하던 그녀는 정말 따스했다. 수리비는 15만 원 정도.. 나올 것 같다. 정확한 견적이 나오면 알려줄 테니 한국에 돌아가서 송금해 주기로 했다. 크게 다치려면 얼마든지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멀쩡하게 일기를 쓰고 있는 게 정말 너무 감사하고 다행스럽다. 로제 와인 한 병을 혼자 다 마시고 알딸딸하게 잠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한다. 펑! 하는 소리와 그 뒤의 적막감..... 여행을 하다가 어떤 난관에 봉착하면 이 날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도 이 날 보다는 낫지. 그런데 이 날의 일기에서도 다른 어떤 날을 떠올리며 '그 날 보다는 낫지' 하고 있다니 웃기다. 일단 뭔가를 마시며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사람이 참 한결같구나 싶어서 실소가 나온다. 지금 말하자니 순서가 너무 뒤죽박죽이라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최근의 여행에서도 숙소의 무언가를 파손(..^^)해서 순간 멘붕에 빠졌었다. 하지만 곧 그간의 다양한 배상 경험을 떠올리고 '지금이 그래도 그때보다는 낫지..' 하며 침착하게 커피를 마시고 샤워를 했다. 과거의 어느 날 보다 오늘이 비교우위에 있으니 인생이 점점 나아지고 있는 거라고 멋대로 생각해도 될까. 


    사실 인생이 나아지고 있다기보다는 내가 조금이나마 성장한 것일 테다. 여러 여행들에 걸쳐 배상과 보험청구를 반복하며(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배운 것은, 20만 원 이하의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살면서 마주할 수 있는 문제들 중 가장 쉬운 문제다. 정말 어려운 문제는 건강 및 부상과, 나의 짧은 언어능력이나, 예상치 못한 타인의 존재 같은 것에서 발생한다. 행사 기간을 놓쳐 만 원 만 손해 보며 뭔가를 구매해도 입이 떫고 속이 쓰린 내가 여행만 가면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실수로 15만 원을 배상하고도 기분을 관리하며 하루를 계속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사주에서 해외가 잘 맞다던데, 그것 때문인가요....(겠냐고)



어쨌건 저녁에 파스타랑 와인을 해 먹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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