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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Mar 26. 2024

괜찮은 척이라도 잘하다 보면

전화를 잘 받는다고요? 제가요?

    업무 전화를 끊자마자 옆자리 선생님께서 칭찬을 해주셨다. 


    "혜은쌤은 어떻게 그렇게 전화를 잘 받아요? 그쪽에서 예상치 못한 걸 물으면 당황할 법도 한데, 정말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을 잘하네요. 대단해요. 선생님이 여기서 일하기 전에, 여기로 전화를 걸 때부터 생각했어요 선생님 목소리가 참 차분하고 말을 잘한다고요."


    전화를 잘 받는다고요? 난생처음 듣는 칭찬이라 기분 좋기도 했지만 의아한 마음이 더 컸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도 당황했고 전혀 침착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하는 게 너무 싫다. 문자나 메일에 비해 준비되지 않은 답변을 실시간으로 줘야 하는 점이 심히 부담스럽다. 아주 약간은 콜 포비아가 있는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이다. 전화를, 특히 업무 상 전화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본을 쓰는 것이다. 상대방의 대답에 따른 경우의 수 각각에 대해 대본을 쓰고 이 대본으로 커버되지 않는 상황은 없을지 몇 번을 검토한다. 그러고서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다른 일을 괜히 먼저 처리하고 한참을 미루다가 심호흡을 세 번은 하고 드디어 전화를 건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안도한다. 최악의 상황은 그렇게 안도하는 와중에 상대방이 부재중 알람을 보고 바로 전화를 거는 것이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그럴 때는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전화를 받는다. 그나마 학교 위클래스에서 근무할 때는 나의 이 바보 같은 전화 절차와 통화들을 혼자서만 보고 들었는데, 교육지원청에서 근무하게 되니 옆 자리의 다른 선생님들께도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 꽤나 부끄럽고 곤욕스러웠다.


    칭찬을 듣기 직전의 전화도 다르지 않았다. 대본에 따라 내 용건을 전달하고 끊으려던 찰나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해서 굉장히 당황한 상태로 어찌어찌 답변을 한 후 '아 방금 완전 말하는 감자였다. 이런 내가 정말 싫다.' 생각하던 시점에 전화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은 것이다. 


    "아니에요 선생님.... 저 진짜 많이 떨어요. 대본 다 써놓고 전화해도 떨려요. 방금도 완전 이상하게 말한 것 같아서 부끄러워요."


    "어머 정말요? 하나도 안 그래 보여요. 전혀 몰랐어요."

    잠깐 생각하더니 덧붙이신다.

    "그렇네요 겉으로 괜찮다고 속도 언제나 괜찮은 건 아니죠. 그래도 티가 안 나는 것만으로도 대단해요."


    괜찮은 척을 잘하는 것도 어쩌면 능력인 걸까. 티가 안 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말이 생각보다 따스했다. 괜찮은 척하다 보면 괜찮아지는 것도 을까. 내 눈에 대단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는 나처럼 떨고 있을 수도 있으려나. 그랬으면 좋겠기도 하고 안 그랬으면 좋겠기도 하다. 나만 이렇게 바보 같은 감자는 아니라며 위안 삼고 싶기도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진짜로 담대한 멋진 사람들이 많은 편이 세상을 위해 더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멋지게 전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 괜찮은 척이라도 조금 더 열심히, 잘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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