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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옵니언 Dec 26. 2023

죽음 앞에 탄생하기도 하는 삶

구로사와 아키라, 〈이키루〉 리뷰

    2023년 12월 13일에 〈리빙 : 어떤 인생〉이 개봉했다. 〈러브액츄얼리〉나 〈어바웃타임〉으로 유명한 배우 빌 나이가 열연한 작품이기도 하며, 일본계 영국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색에 참여해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2년 작 〈이키루〉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리메이크 작품과 원작을 비교해서 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같은 작품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제작한다면 더욱 그렇다. 간단한 예시로 유위강, 맥조위 감독의〈무간도〉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디파티드〉로 리메이크되었을 때, 원작의 경우 인물 간의 감정 속 뜨거움이 잘 드러나지만, 후자의 경우 인물 간의 감정은 느낄 수 없이 사건과 사건 간의 빠른 호흡 속에 냉정함만이 남아있다.

    〈리빙 : 어떤 인생〉에서 어떻게 각색되었는지는 매우 궁금하지만, 아직 관람하지 않아 알 수 없으니 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그 전에 원작 〈이키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영화는 와타나베(시무라 다케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아들 부부와 한집에서 거주 중이다. 또 한 시청의 시민과장으로 일하는 중이다. 그는 시민과장이라는 직책은 있지만 하는 일 없이 바쁘다는 상념에 빠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월급을 모아 저축을 하기도 했고 좋은 집을 가지고 있으며 곧 퇴직하게 된다면 꽤 큰 목돈도 받게 될 예정이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위암이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

    이후 그의 삶은 소용돌이에 빠진다. 아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아들은 유산과 퇴직금에 관해 이야기한다. 덕분에 와타나베는 영화의 후반부에 그가 죽을 때까지 아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한 번도 말하지 못한다. 집에서는 자신의 위로가 되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와타나베는 결국 밖으로 나간다.

    와타나베는 난생처음으로 무단결근까지 하며 죽음 앞에 놓인 자신의 감정을 떨쳐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한 주점에서 소설가를 만난다. 그에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으며 현재 자신에게 목돈이 있으니, 돈을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한 번도 돈을 써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그의 눈은 참 처량하게만 보인다. 소설가는 그에게 돈을 쓸 방법을 알려준다. 그날 밤 와타나베는 소설가를 따라 도박하고, 술을 마시며, 여자와 유흥을 즐긴다. 전부 쾌락과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의 표정은 여전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하룻밤의 쾌락이 끝나고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와타나베의 앞에 사카이(다나카 하루오)가 나타난다. 그녀는 와타나베와 같은 시민과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이다. 그녀가 와타나베를 찾아온 이유는 일을 그만두기 위함이었다. 사카이도 와타나베와 마찬가지로 시청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삶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는 모습을 본 와타나베는 그녀의 태도에서 그는 삶의 변곡점을 만난다. 와타나베는 지난 수십 년간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집착적으로 사카이를 찾아가 남은 인생을 너처럼 힘이 넘치게 살고 싶다고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사카이의 대답은 ‘일하고 먹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와타나베는 자기 삶에서 이것이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일을 하지만 목적이 없고, 밥을 먹지만 살기 위한 수단이다. 와타나베는 다시 시민과장으로 돌아온다. 이후에 그는 달라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선다. 자신이 관리하는 동네에 물웅덩이를 매립하고 공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다섯 달 후 완성된 공원에서 그네를 타다 최후를 맞는다. 그의 장례식에 모인 시청 공무원들은 새로 생긴 공원이 누구의 공인지에 대해 한참을 논한다. 서로의 공이라고 하지만 아부에 불과하다. 영화는 아부와 플래시백 형식을 빌려 과거를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게 각 부서의 핍박과 공무원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일하는 것이라는 집단의 관례를 이겨낸 와타나베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은 자신들도 와타나베의 뜻을 받들어 적극적으로 일해보겠다고 하지만 다음날 그 말이 무색하게 책상에 무능하게 앉아 자기 일을 다른 부서로 넘기기 바쁘다. 와타나베의 장례식에서 유독 슬퍼하던 한 남자가 이 상황을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질러보지만 새로 부임한 시민과장에 눈치에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게 된다. 영화는 공무원이 와타나베가 만든 공원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와타나베의 죽음을 기준으로 초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진다. 초반부는 와타나베가 직접적으로 삶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을 내러티브 형식으로 보여준다. 소설가를 만나고 사카이를 만난다. 반면 아들의 시선으로 와타나베와 사카이를 보여줄 땐 둘의 사이를 멜로처럼 보이게도 한다. 와타나베가 사카이를 만났을 때는 사건이 중심으로 작동하는 장르물처럼 변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와타나베가 사키이에게 어떻게 하면 너처럼 살 수 있냐고 묻는 장면에서는 간절함에서 비롯된 외침이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보이고 그에 걸맞게 사카이는 겁에 질린 표정을 보여준다. 감독은 그러한 분위기를 시퀀스 내내 유지한다. 덕분에 둘 사이에는 긴장감이 유지되고 스릴러적 공포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로 이어진다면 와타나베의 다음 행동이 무엇이 될지 예측하기 어려워질 때쯤 감독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풀어낸다. 감독은 한 영화 안에서 장르를 기술적으로 바꾸어내고 있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후반부에 진입하는 과정도 재미있다. 와타나베가 사카이를 만나고 바로 다섯 달의 시간이 흐른 채 영화의 후반부에 진입힌다. 그리고 비어있는 다섯 달의 시간은 공무원들의 대화마다 플래시백을 통해 그의 행적을 되짚는다. 후반부의 특징이 있다면 전반부와 다르게 폐쇄적인 공간에서 영화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장례식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격정적인 움직임 또한 발생하기 어렵다. 이를 생각해 본다면 공간에 따른 영화의 구조의 차별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영화와 시작과 동시에 내레이션이 나오며 와타나베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영화가 삼인칭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화자와 인칭이 분리되면서 영화의 초반부는 와타나베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후반부는 인물이 아닌 공간과 시간을 통해 사건을 회상시켜도 어색함 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관료제 사회의 부조리함도 눈에 들어온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일본 관료제 사회의 문제를 아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마을의 웅덩이를 덮어달라는 아주 사소한 민원을 시청에서는 자신의 담당이 아니라고 타 부서로 이임하기를 반복한다. ‘시민들의 고통과 민원은 언제든지 상담’하라는 시민과에서조차 말이다. 결국 갈 곳을 잃은 시민들은 냄새나는 웅덩이를 덮어달라는 사소한 민원도 해결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사회에서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힘없는 시민들이다.

    공무원들이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권력이 시민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급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민원을 잘 처리하는 일보다 상급자에게 잘 보이는 일이 중요하다. 이러한 모습은 와타나베의 장례식에서 다시금 잘 보인다. 공원을 완성한 것이 누구의 공적인지 이야기가 나오자, 시청 각 부서의 과장들은 부시장을 칭찬하기 바쁘다. 하지만 혜택을 받은 시민들은 공원이 완공될 수 있었던 것이 누구 덕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시민들은 와타나베의 장례식에 와서 누구보다 자신들을 위해 힘써준 공무원에게 눈물로 명복을 빈다. 시민들이 떠난 이후에도 시청 사람들은 와타나베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성과를 높이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와타나베를 깎아내리기 위해 꺼내는 이야기는 결국 와타나베가 공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대답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와타나베의 장례식장에서 와타나베와 같이 시민을 생각하는 공무원이 되길 약속하지만, 다음날 바뀐 것 없이 돌아가는 시청을 모습을 보여주며 보수적인 관료제 사회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영화 내내 시민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매워 달라고 했던 고여버린 물웅덩이는 관료제라는 집단 자체를 비유적으로 보인다. 와타나베는 고여버린 관료제 사회에서 그것을 극복해 낸 유일한 인물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영화는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를 마치니 사람은 스물다섯 살에 죽지만 일흔다섯 살이 되어서야 장례식을 치른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와타나베가 그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낸 다섯 달을 제외한다면 위의 격언에 정확하게 해당하는 인물일 것이다. 사카이의 입을 빌리자면 와타나베는 미라 같은 인물이다. 삶에 대한 의욕 없이 주어진 것만 해결하는 것이 마치 정신은 없고 육체만 남은 것 같아서 지어진 별명이다. 영화에서 사카이가 중심적인 역할로 발돋움했을 때, 마음 한편에서 나이 들고 병든 남자가 젊고 예쁜 여자에게 구원받는 형식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와타나베의 삶을 구원해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죽게 만드는 위암이다. 위암 이전의 와타나베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죽음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위암 이후에는 자기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카이는 일상을 고백함으로써 와타나베가 이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카이는 와타나베 삶의 변곡점에서 99도의 물이 끓기 위한 1도의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와타나베에게 영화 초반부의 시청 일이 ‘하고 싶음’보다는 ‘할 수밖에 없음’에 가까웠다면 후반부에서는 같은 일임에도 의미가 역전되는 것도 그가 삶은 유한하기에 의미가 있고 의미는 거창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훌륭한 연출로 보여주는 장면은 사카이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카페 계단을 내려가는 와타나베 뒤로 생일 축하 노래가 흘러나오는 장면이다. 카페에 있던 모든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을 축하해주고 있지만 카메라는 생일자의 뒷모습만 잡을 수 있다. 반면 와타나베는 축하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정면으로 잡힌다. 덕분에 생일 축하 노래가 와타나베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그를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 시점이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기에 와타나베가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하여 의미적으로도 훌륭하게 부합한다.

    그의 변화된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은유적 소재는 모자라고 할 수 있다. 모자는 와타나베가 항상 착용하는 액세서리다. 즉 그를 상징하는 소재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와 하룻밤의 쾌락을 즐긴 날 길거리에서 모르는 여자에게 빼앗기고 만다. 와타나베가 모자를 찾기 위해 여자를 쫓아가려 하지만 소설가는 그를 막으며 새로운 모자를 사는 것보다 훨씬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그를 만류한다. 그리고 그는 화려한 색감의 모자를 새로 구매한다. 새로 산 모자는 그가 능동적으로 행하여 얻어낸 결과물이다. 또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와타나베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원을 완성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감독은 대사를 통해 되묻는다. 우리도 언제인지 모를 뿐 죽음을 앞두고 있지 않느냐고.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다. 죽음은 삶은 잠식해 가지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와타나베는 모자를 새로 구매하고 빳빳한 모자에 살짝 주름을 준다. 그것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영화가 끝날 때는 모자가 피로 뒤덮여있기도 한다. 삶의 마지막은 피로 뒤덮인 것처럼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또 너무 새로 구매한 것처럼 너무 깨끗해도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구겨진 모자처럼 구겨져서 멋진 삶을 살길 바랄 뿐. 




by 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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