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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 Jul 25. 2023

詩를 쓰는 방법으로 사랑을 한다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고

 아들만 셋을 둔 큰 이모는 우리 가족과 만날 때마다 아들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한두 번일 때에는 괜찮았지만 그것이 오래될수록 이모의 그 아들 자랑에 반감이 쌓여갔다. 그 때문일까? 정확한 경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래전 나는 가족이기주의에 상당한 저항을 하며, 급기야 내가 크면 ‘내 가족’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가족 때문에 신념을 굽혀야 하고 불의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실제 정치계에서 자식들 때문에 애써 쌓아 올린 신의를 잃고 수치스럽게 물러나는 인사들을 보면서, 나는 내 가족에게도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가족 감싸기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전엔 몰랐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내 마음을 온통 물컹거리게 했다. 가족들에게까지 냉정하게 들이대던 잣대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견고한 가족의 울타리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무조건 내편’이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도 아버지가 내게 준 무한한 사랑을 추억하며 이 세상에서 그 누군가는 ‘무조건 내편’이 되길 희망하는 ‘나’를 만났다. 이런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태생적으로 약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듯 결국 ‘내 사람’을 찾아다녔고, 끝내 찾아서 내 옆에 앉혔다. 결혼을 했단 말이다. 그리고는 자녀를 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동안 신혼의 달콤함에 방심한 나머지 계획적이지 않은 임신을 했다. 자식을 두면 애초의 ‘나’를 잃어갈까 두려웠던 것과 달리,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의 첫 느낌은 설렘이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아이가 팔다리를 꼼지락 거리는 초음파 영상을 볼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당혹스러웠다. 내 아이만 소중한 듯이 설레발을 치는 부모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던 내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다.


 ‘시’라는 영화를 남편과 함께 보면서 고민에 쌓였다. 우리 아이가 만약 저 소년과 같은 죄를 저지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절대 저렇게 키우지 않겠다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이란 걸아는 이상 우리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영화 속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 한다. 꽃을 좋아하는 미자는 여전히 소녀다. 병원을 나와 딸과 통화를 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다. 딸이 맡겨둔 손자의 밥을 차려주고 학교 준비물까지 챙기는 할머니다. 살랑대는 바람을 느끼며 땅에 떨어진 살구를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잊고 행복에 젖는 여자다.


그런 그녀가 불행할 이유는 전혀 없건만, 손자 때문에 괴롭다. 같은 학교 소녀를 겁탈하고도 이렇듯 태연했을 손자, 그 소녀가 자신의 여린 몸을 물에 던져 목숨을 잃었는데도 이렇게 태연한 손자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다른 소년의 아버지들처럼 담담하고 침착하게 해결책을 찾기보다 먼저 꽃의 위안이 더 필요한 그녀다. 방패라는 꽃말의 맨드라미를 들고 맨살로 부딪쳐야 할 날카로운 양심의 채찍을 피해 숨을 쉬어야 하는 그녀다. 하지만 자신이 돌보던 회장님, 자신이 키우던 손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소년의 아버지들에 둘러싸인 현실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를 쓰고자 하는 미자의 소망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머릿속에 자라고 있는 병의 실체를 알게 된 미자. 저런 그녀가 계속 버티며 살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약속했던 5백만 원을 건네고 자신의 피와 살 같은 손자를 형사에게 넘긴 그녀. 그녀는 그 순간이 손자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리고는 자살한 소녀의 마지막 길을 따라 다리 위 난간에서 흐르는 강을 보며 섰다. 소녀의 모습으로...


 미자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주변에 대한 사랑,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않았으므로 더욱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는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시를 쓰는 방법을 고심하던 미자는 사랑하는 방법을 찾던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뜻과 달리 흘러가는 상황들을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으면서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질문이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나요?”가 아니었을까?


 내 숙제도 풀려가는 듯하다. 그토록 경계하던 가족이기주의에 발목이 잡혀 사랑하는 방법을 잊을 뻔했다. 시를 쓰거나 글을 쓰는 것은 성찰을 의미한다. 부단한 자기 성찰이야말로 사랑을 이기적으로 흐르는 통로를 막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갈등으로 힘들어질 때 시를 생각해야겠다. 그리하여 훗날 내 아이에게 올바른 사랑을 줄 수 있기를, 가족을 보며 살아갈 힘을 얻는 만큼 주변을 사랑할 힘도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


아름다운 미자 또한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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