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취미생활, 영화, 한 몸 누일 집, 늦은 여름, 또다시 병원
여름휴가다. 별 건 안 한다. 매년 휴가는 그렇다. 사람 많은 것도 싫고, 더운 것도 싫다. 작년에는 할머니 보러 갔었는데 올해는 너무 더워서 못 움직이겠다. 좀 시원해지면 한 번 다녀와야지. 꽃도 바꾸고 사진도 새로 가져다 두고.
그럼 휴가 때 뭐 했느냐. 늦잠 자고 큰 짐 쇼핑하고, 청소하고 집 정리하고 그랬다. 기사님이 오셔야 하는 가구는 집에 있을 때 받아야 하니 아무래도 시간적 여유가 있는 휴가 때 많이 들이게 된다. 이케아 사다리 선반을 썼는데 반지가 그 위를 타고 다니다 몇 번 책을 쏟았다. 쏟은 책이야 다시 올리면 되는데 그러다가 관절 다칠까 봐 겁나서 큰맘 먹고 튼튼한 책장을 구매했다. 이제는 허리 아파서 조립할 자신도 없고 기사님이 조립해 주시는 걸로 했더니 돈은 들어도 몸은 편하고 좋더라. 빈 박스까지 싹 다 수거해 가시니 세상 편하다. 겹겹이 쌓여 있던 책들도 착착 정리해 놓으니 오랜만에 독서 욕구가 솟는다.
반지는 내가 출근 안 하면 엄청 좋아한다. 뭐 대단한 티를 내는 건 아닌데 그냥 애가 끝도 없이 옆에 붙어 있는다. 노는 날에는 밥 달라고 울지도 않는다. 달력을 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날이면 귀신같이 옆구리에 붙어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목욕을 시킬까 하다가 별로 안 더러워서 그냥 발바닥이랑 발톱 사이사이만 꼼꼼히 닦았다. 애가 나이 드니까 스트레스받을까 봐 목욕 한 번 시키기도 망설이게 된다. 전체 빗질 한 번 하고 심장사상충 발라줬더니 오만상을 쓰면서도 옆을 떠나지 않는다.
간만에 취미 생활로 재봉틀도 돌렸다. 복조리 가방 가지고 싶었는데 맘에 든다. 사람들이 보고 예쁘다고 팔라는데 세상에 이런 거 할 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듣기 좋은 소리려니 하고 기분 좋게 넘겼다.
휴가 동안 영화를 많이 봤자. 그래봤자 두 편이긴 한 게 최근 극장을 워낙 안 가니 일주일 사이 두 편이면 많이 본 거지 뭐. 늙을수록 사람 싫어병이 깊어져서 주말이나 저녁 시간 극장은 아예 시도도 안 한다. 요즘엔 매 너 없고 몰상식한 걸 지 자유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 일일이 그런 거에 분노하기도 싫고. 점심도 저녁도 아닌 평일 애매한 시간대에 갔더니 사람 없고 좋더라. 밀수랑 콘크리트 유토피아 봤는데 둘 다 오랜만에 괜찮은 한국영화였던 거 같다. 한동안 한국 상업 영화 수준이 너무 엉망이었던 데다가 외국 영화는 자막 보기 피곤해서 극장 자체를 안 갔는데 (+쓸데없이 비싼 티켓값도 이유 중 하나다. 예전에 티켓 많이 안 비쌀 때는 하루에 세 편씩도 몰아 보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통신사 할인 아니고서는 그 돈 주고 극장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크다.)간만에 본 영화가 다 좋아서 다행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와 생각을 해야만 하는 영화의 조합도 적절했다.
슬슬 불안한 주거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밀어닥친다. 물론 아주 오래전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정신을 차렸어야 하지만 나란 인간이 어리석었던 걸 후회해 봤자 뭐 하겠나. 평생 월세살이를 할 수도 없고 심지어 더 나이 들면 고독사 걱정에 월세 안 준다는 건물주님들도 계시다니 이제는 정말 정신 차려서 어디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돈은 당연히 없다. 대출도 100프로 나오는 게 아니니까 일단 쥐고 있는 현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출을 받는다 해도 대출은 결국 갚아야 한다. 대충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20년은 꼼짝없이 빚만 갚아야 하는 거다. 빚을 갚기 위해 사는 삶이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하다.
그런데 대체 집은 왜 이렇게 비싼 걸까? 미분양이 넘쳐난다는데 사방 천지 아파트 공사 안 하는 데가 없다. 공실로 비워두더라도 가격을 낮추느니 안 파는 게 낫다는 건가? 매번 내 집마련 정책 어쩌고는 나오는데 그마저도 나 같은 비혼인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한강뷰 집은 바라지도 않으니 내 한 몸 누일 작고 깨끗한 집 하나를 언제쯤이면 구할 수 있을까.
선풍기 틀고 누워 매미 소리 들리는 진짜 여름이 이제야 왔다. (그전까지는 여름 아님. 그건 그냥 고통스러운 시련의 나날일 뿐이었음. 물론 지금도 덥지 않은 건 아님.) 내가 좋아하는 여름은 이런 거였다고. 시원하게 샤워하고 까실한 이불로 배만 덮은 채 선풍기 바람을 만끽하는, 그러다 끈끈하게 땀이 오른다 싶으면 또 찬 물 한 번 뒤집어쓰고 누우면 또 참을만한 그런 여름.
도시 생활 싫다고 무작정 시골로 들어간 부보님 덕에 어린 시절을 지금 생각하면 깡시골에서 살았다. 여름이면 시꺼먼 모기가 날아다니고 개구리며 두꺼비가 사방에 돌아다니는 그런 동네. 그때는 낮에 정규 방송이 나오던 시절이 아니라 하루 종일 할 게 참 많았다. 마루에 엎드려 책을 읽기도 하고 마당에서 참새 구경하면서 풀 뜯고 흙 만지고. 논 사이로 흐르는 도랑에서 발 담그고 놀다가 개구리도 잡고. 그러다 사방이 푸르스름해지는 저녁이 되면 별 거 아닌 저녁밥을 먹고 드라이브를 가거나 평상에 누워서 모깃불 태우는 거 구경을 하던 여름. 그때가 정말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인지 그저 그리워지기만 하는 그런 날들이었다.
결국은 mri 검사를 받기로 했다. 허리가 아파서 찾아간 네 번째 병원이다. 영상 보는 게 제일 정확하니 실비 있으면 촬영해 보라길래 네 했다. 폐쇄공포증은 없는데 가만히 누워 있는 게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유일한 소망인 늙어서 내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 다니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