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주류이길 원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는데, 나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초대장을 만들어서 “오늘 내 생일이야. 놀러 와.”라며 반 아이들 모두를 초대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0명이 넘는 친구들이 축하하러 집에 왔고, 엄마가 엄청 푸짐한 생일상을 차려놓아 준 덕분에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친구들을 모아서 당시 유행하던 가수의 춤을 연습하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 교실 앞에 나가서 멋들어지게 춤을 추기도 했다. 나름 센터였던 나는 주류가 된 줄 알았다.
사춘기가 온 후로는 나만의 세계 안에서 살았다. 얼굴과 이름을 알면 다 친구라고 생각하던 때와 달리 먼저 다가와서 마음을 여는 사람들만 친구라고 생각했어도,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것조차 힘들어했어도, 사람이 많은 공간보다는 도서관이 편해졌어도 여전히 스스로 주류라는 생각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더불어 나의 취향까지도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류니까. 그런데.
내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적잖이 충격을 주었다. 주류에 속하는 것을 특별히 A급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B급이 비주류에 속한다는 것쯤은 알기 때문이다. 한참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어느 날. 스스로의 취향이 비주류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원래도 인기가 많은 연예인이었지만, 어떤 작품이 유독 잘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배우를 추앙한다고 느껴질 만큼 예찬하면 나는 되려 마음이 끌리지 않는 거였다. 후에 당시 유행하던 작품을 보게 되긴 했지만, 그때는 그 배우를 향한 추앙이 조금 사그라든 때였다. 물론 아무리 유명했어도 아직까지 보지 않은 작품도 있다. '아, 나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구나. 나는 나만의 취향이 있구나'
내 취향이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그게 살아가는 데에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저 나의 취향일 뿐이니까. 나를 만족시키는 데는 문제없으니까. 그런데 편집자가 된 후, 나의 취향이 상당히 걸림돌이 될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해 여러 채널에서 다양한 글을 읽어본다. 글은 너무 마음에 드는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받은 수가 너무 적거나, 반대로 나는 좋은지 도통 모르겠는데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의 반응을 얻어낸 글을 마주하면 '아, 모르겠다' 싶어 진다.
같은 맥락에서 원고를 검토하고 방향을 조정하는 과정에서도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작가마다의 글톤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글을 교정교열해야 하는데,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어렵다고 느끼진 않을까?’ 혹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써도 되는 건가?’라는 질문이 생기는 거다. 그래서 이런 고민을 대표님과 공유하며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대표님은 “네 취향에 맞고 안 맞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작가의 문장에서 차별점을 느꼈다면 그걸 잘 살려낼 수 있도록 네가 독려하고 도와줘야지. 작가의 글톤을 평범하게 만들려고 하면 안 돼.”라고 했다.
그때부터 일을 시작할 때 다짐하듯 되뇐다. '대중적이지만 차별성 있자'라고. 그 감각이 더 자연스러워지기 위해 사람들의 선택이 모이는 것들이 갖는 매력을 읽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어렵다. 요즘은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시대라던데, 나의 취향이 주류가 되기엔 아직 먼 걸까. 내게도 재밌고 흥미로움을 주는 글들이 주류가 돼서 더 많은 사랑을 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주류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