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걷기를 진지하게 시작했던 건, '15분 산책하기'라는 과제를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몇 시에 걸어야 하는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어디를 걸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는 하나 알려주지 않은 채 매일 15분을 걸으라 했다. 당시엔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면서 일을 하고 있을 때라 자연스레 5시 이전에 기상을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5시쯤 나가서 15분을 걸었다. 아직은 어둑한 거리를 혼자 걷자니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며 걸었다. 어떤 날은 조금 일찍 출근해서 일터 근처를 걸어보기도 하고, 저녁에 일과를 마무리하면서 걸어보기도 했다.
처음엔 15분으로 시작했는데, 어떤 날은 30분을 걷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1시간 조금 넘는 거리를 걷고 오기도 했다. 걷는다는 것 하나를 그대로 둔 채 방법을 다양하게 바꿔보니 그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자존감이 낮고, 감정이 불안정해서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시간에 걷는 것이 가장 좋았다. 차라리 조금 무서운 게 낫다고까지 생각하게 되니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나 걸으러 나가게 됐다. 그렇게 해서 찾은 가장 좋았던 시간은 새벽 4시. 살고 있던 아파트 단지를 크게 둘러 빠른 걸음으로 두 바퀴쯤 걷고 나면 30분이 흘러 있었다. 다른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부정적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없는 시간에 길에서 혼자 말하며 걷곤 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감정을 다 털어내고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비 오는 날이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커다란 우산을 손에 쥐고 나가면 우산 위로 타닥타닥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빗소리가 안정감이 들게도 했고, 빗소리에 나의 울음소리가 묻히는 것 같아 평소보다 더 원 없이 소리 내 털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책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하는 일이 바뀌고 일상이 바뀌면서 나의 우선순위에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근 1~2년은 굳이 의도적으로 걸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100보도 채 걷지 않는 날이 쌓이곤 했다. 보다 못한 대표님이 업무 전에 5천 보를 걷고 인증하라는 특명을 내렸고, 덕분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산책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뭘 준비해서 나가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처음 2주는 무선 이어폰과 휴대전화를 꼭 챙겼다. 5천 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걸어야 했고,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니 다소 지겹기도 했다. 걷고 나서 업무를 시작해야 하니 멀리 나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는 곳 주변으로 큰길을 따라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전보다 좀 더 크게 동네를 걷고서, 커피 한 잔을 사 오면 5천 보가 조금 넘는 걸음 수가 됐다.
매일 같은 경로를 따라 걸었다. 하루는 이어폰을 챙기지 못해 그냥 나왔는데, 의외로 더 좋았다. 일상의 소음이 적당하게 들려오면서 내가 걷는 길 위에서 마주하는 것들을 여러 날 반복해서 보다 보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계절의 변화가 보이기도 했고, 비슷한 시간대에만 볼 수 있는 익숙한 얼굴들도 보게 됐다. 디자인의 아이데이션이 잘되지 않아서 골치가 아플 때면, 자연스럽게 길 위의 디자인 작업물들(ex. 간판, 현수막, 배너 등)을 보며 걷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하던 일에 작은 힌트를 얻어가는 날도 있었고 오히려 복잡한 마음이 편안해지는 날도 있었다. 한두 번 걸었던 게 아닌데도 여전히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다른 것보다 걷는 동안엔 오로지 내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다. 전보다 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추게 됐고, '오늘'에 집중하는 나를 보게 된다. 선택하지 못한 것에 미련을 두기보다 오늘 해야 하는 것들을 더 잘 해내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걷기만으로 - 지금 이 정도의 걷는 수준으로는 - 더 건강해지기 어렵겠지만 걷기를 다시 시작하기 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나를 발견한다. 눈을 뜨면 걸으러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지 어느덧 9개월에 달했다. 무언가를 꾸준하게 해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 다음엔 무엇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