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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등급 인간(1)

by 전창훈

2023년 겨울, 그 지독하게 외롭고 추운 침묵의 계절에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시작하여 [기사단장 죽이기]를 거치고 [언더그라운드]를 들렀다가 [노르웨이의 숲]까지 나아갔다. 다른 책도 읽었지만, 유독 그의 작품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빚은 인물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긍정하는 치열함과 고뇌가 좁은 방에 박혀 써지지 않는 글을 붙들고 씨름하는 나의 삶을 이해하는 느낌이 들어서가 아닐까.


잠시 읽던 책을 덮어두고 전자담배를 입에 물어본다. 15층짜리 낡은 아파트의 14층에 살기에 담배를 피우러 내려가는 것이 수고로워 구매했던 녀석이다. 액상의 인공적인 달콤함이 혀 끝을 스치고, 멘솔의 머리가 아려오는 시원함이 목젖을 사정없이 두드린다. 이후 뇌가 뭉개지는 듯한 멍한 감각이 찾아온다. 감각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나를 더 깊고 어두운 기억으로 끌고 내려간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즐거웠던 유년기를 지나 반항심을 똘똘 뭉친 중학생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퇴직을 알고, 나름 부유했음에도 세상의 절망을 홀로 끌어안은 듯한 아이다. 그 아이는 교대에 들어간다. 스스로의 의지는 아니다. 사실 아직도 내가 왜 교대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만큼 자신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사람인 것이다.


약간의, 아니 수많은 민망하고 철없는 순간을 지나 아이는 청소년이 되고 곧 어른이 된다. 어른, 나는 어른이라고 부를만한 인간인가. 마냥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을 넘어 대한민국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의 자격'을 겉으로나마 갖추니 스스로 어른이라 부를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재고하게 된다. 분명, 나는 어른이다. 성년의 설렘과 불안을 겪어 이제는 더 이상 '어리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나이가 되었고, 대학 졸업, 군대 전역, 취업까지 이루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조건에 불과하다. 교사가 되어 현직에 나가보니 알겠더라. 학교는 굉장히 이질적인 공간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잘난 듯 어른인 척을 하고 고결한 척을 하지만 나는 사실 그리 성숙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이러한 불순의 인간이 순수를 가르치다니, 어쩌면 순수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른'이란 때 묻고 고결하지 않은 자를 지칭하는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순수를 지나 불결의 땅을 밟고 다시 그것을 걷어내는 일종의 순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연초와는 다른 질감의 연기가 공기에 섞여 자취를 감춘다. 옅은 레몬 향기가 잔향처럼 코 끝에 남는다. 그러면 문득 과거의 기억이 다시 고개를 든다. 몸은 컸지만 정신적으로 하나 성숙하지 않았던 순간의 기억이. 그 기억들은 겨울잠을 자던 뱀처럼 서로 몸을 뒤섞어 공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어떠한 계기로 잠에서 깨어 굴 밖으로 슬며시 기어 나오는 것이다. 계기란 그리 대단치 않다. 노래를 듣다가, 밥을 먹다가, 담배를 피우다가... 제멋대로 핑계를 잡아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한참을 몸부림치며 감정을 이리저리 뒤섞은 후 만족한 듯 유유히 떠나간다. 뱀이 떠나가면 상실감과 허탈함, 그리고 약간의 창피함이 남아있다.


내 경우는 유독 향기에 반응한다. 길을 걷다 코 끝을 스치며 지나가는 향수 냄새에 반응하여 그녀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단 멈출 수 없다. 후유증이 두려워 코를 틀어막고, 주의를 돌리려 재빨리 관심을 끌만한 것을 찾아도 결국 그녀와 연결된다. 신기하게도 그러한 상태에서 찾은 것들은 전부 그녀와 관련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춤을 추기 시작한 기억은 전신을 난도질하며 나를 어두운 우물로 끌고 간다.


그녀를 만난 것은 어른이 되었을 때, 정확히는 스물한 살의 6월이었다. 그날은 오늘처럼 지독하게 춥고 날카로운 날이 아니었다. 이제 막 시작된 여름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그런 날이었다. 그때의 나는 나이만 어른이었고 정신도, 육체도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더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많은 처음을 함께했다. 심지어 이별의 순간도, 우리가 함께 한 '처음'이었다. 그렇게 지독한 상실에서도 그녀를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나에게 어른이 되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무지각한 순수의 폭력을 오롯이 받아준 고마운 사람이고 불결의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이며 그러면서도 이를 넘어 '어른'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1)

그 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잔인한 겨울의 날카로움을 대비하듯 무서울 정도로 습하고 더웠다. 연일 비가 내렸고 모기와 매미 때문에 잠을 설쳤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습한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와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짐승들이 소리가 잠을 방해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방에는 물론 에어컨이 있었다. 작은 방에 어울리는 벽걸이형 에어컨. 하지만 남자들의 기숙사가 으레 그렇듯 리모컨이 없어 매번 에어컨 케이스를 열어야 했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케이스를 열고 생활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숙사는 2인 1실이었고, 에어컨은 룸메이트 쪽 침대에 설치되어 있었다. 룸메이트는 아주 깔끔한 성격이었기에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침대가 더러워지는 것이 싫으니 자기가 없더라도 함부로 밟고 올라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당시 나는 재수를 하고 대학에 들어간 입장이라 룸메이트보다 한 살 위였다. 연공서열을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이제 갓 성년이 된 아이들에게 한 살은 꽤나 큰 차이였기에 나이로 찍어 누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다툼이 싫기도 했고, 적어도 한 학기는 함께 살아야 하는데 얼굴 붉혀봤자 나만 불편하겠다는 심사에서였다.


그렇지만 룸메이트가 마냥 까탈스러운 녀석인 것은 아니었다. 유독 자기 자리에 대한 결벽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정한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경모였다. 그는 아직 청소년기의 앳됨과 성인 남성의 굵은 선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키는 나보다 10cm가량 컸고, 항상 구레나룻을 바짝 올려 깎은 짧은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는데, 그게 참 잘 어울렸다. 경모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였다. 본인 말로는 음대를 지망했지만 가정 형편상 비싼 레슨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차선책으로 음악교육과에 지망했다고 했다. 그래도 본인은 자신의 전공에 꽤나 만족했는지 언제나 유광 야구점퍼 스타일의 과 점퍼를 입고 다녔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까지도 반바지를 입으며 위에는 과 점퍼를 걸쳤으니 그의 자부심을 알만했다.


아무튼 그와 생활하는 것은 나름 즐거웠다. 필요 이상으로 짐을 꺼내놓기는 하지만 나도 어지러운 방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금요일마다 함께 청소를 했고, 가끔 몰래 술을 들여와 교대에 온 이유나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지 등에 대한 꽤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일탈을 해본 적이 없는 모범생이라 술을 들여온 것도, 사감에게 둘러댄 것도 나였다.


"형은 어렸을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어요?"


그의 주사는 기억을 잃고 쓰러지듯 잠에 드는 것이었으므로 술에 취하면 항상 같은 질문을 했다. 경모는 늘 내 꿈에 대해 물었다. 내 꿈이 왜 그리도 궁금한지, 대답하기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저 질문을 받을 즈음이면 이미 나도 술을 적잖이 들이켠지라 깊이 생각하는 척을 했다.


"그렇긴 한데, 사실 나도 내가 왜 교대에 왔는지 모르겠어."


그렇다. 술김에 한 말이기는 하지만 한 학기를 지날 즈음, 아니 어쩌면 입학식에서부터 나는 스스로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교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20대가 되면서 등급을 부여받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각기 속한 계층으로 흩어졌다. 머리 좋고 우수한 친구들은 1등급 시민이 되었다. 그들은 최소한 4년간은 서울에 거주할 자격을 보장받았으며, 만약 그들의 부모까지 1등급 시민이라면 서울에 영구히 거주할 수 있었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살만한 집안에 공부도 그럭저럭 잘하는 아이들은 최소한 수도권이나 광역시에 거주할 자격을 얻었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그보다 못한 친구들은 논외였다. 그 친구들의 소식은 우리 곁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라는 말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하지만 최소한, 나를 포함한 주변의 또래는 명징하게 인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지독하게 수직적이고 단단하게 굳어버린 사회를 느끼고 있었다. 불합리에 대한 첫 인식은 중학교 졸업식에서였다. 친구들의 부모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아이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며 자식들의 귓가에 저 아이와 어울리지 말으라 속삭였다.


사실,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우리는 학원에 시간제한도 없었던 터라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 공기를 맡는 것이 익숙한 아이들이다. 피아노 학원이니, 복싱 체육관이니, 태권도장이니 하는 것들은 어린아이들이나 다니는 것으로 치부되어 중학생만 되어도 그런 곳에 다니는 것은 철부지 취급을 받을 일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좁은 시야를 강요받았다. 우리의 시야는 항상 높은 곳을 향해야 했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곧 착하고 멋진 아이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쁜 아이였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공부 머리라고 불리는, 그러니까 부모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서 한 번쯤 발견한다는 그 흔한 재능이 없었다. 물론 누군가 나를 두고 참 영민한 아이라고 말한 적은 더러 있었다. 아마 교실에서 책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억지로 쥐어짠 선생님의 칭찬일 것이다. 그게 억지라고 확신한 이유는 단지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선생님이 항상 꺼내시던 '다만...' 때문은 아니었다.


책은 좋아했다. 정확히는 책을 읽는 척을 함으로써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이 싫었기에 책에 더욱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배려 없이 떠드는 아이들 무리에 끼는 것도 싫었고 선생님이 중간고사, 기말고사마다 성적을 두고 회초리를 드는 것도 싫었다. 책이라도 읽으면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이나 나를 건들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공부는 못하지만 열심히 하는 아이라고 생각했지 싶다. 과거의 나는 꽤나 용의주도했는데, 책을 읽지 않고 '척'만 한다는 것이 들킬까 봐 일부러 두꺼운 책을 한 달에 한 번씩 바꿔 들고 갔다. [코스모스]라든가 [셜록홈스 전집]이라든가 하는 책들은 800쪽을 훌쩍 넘어갔기에 아주 좋았다. 그런 두꺼운 책을 읽냐며 학기 초에 선생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곤란하기는 했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행히 부모님은 나에게 학업적으로 큰 압박을 가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그런 부분으로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 살 터울의 형이 꽤 똑똑했기에 가능성 없는 나를 내버려 두고 형의 교육에 온 신경을 쏟느라 나에게까지 그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의 학창 시절은 꽤 자유로웠다. 친구가 많지 않아 화려한 캐릭터가 반짝이는 카드라든가, 유행하는 게임이라든가 하는 또래들이 공유한 문화에 대해 공감대는 적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언제나 한 발 물러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경쟁적이고 압박이 가득한 사회에서 나 혼자 관찰자 입장이 된다는 것은 꽤 기묘한 일이다. 내 눈에는 수업종이 울린 후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늦게 들어간 친구를 부도덕하고 게으른 학생으로 몰아가는 선생님도 이상했지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시험에서 하나 틀렸다며 커터칼로 제 팔을 그어버리는 친구들도 이상했다. 친구들끼리 다툼이 일어나면 선생님은 생활태도에 반영하겠다며 내신 점수로 협박했고, 친구들은 예체능 계열을 포함해 공부에 뜻이 없는 학생들을 패배자로 취급했다. 나는 그 언저리에 떠돌며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누구와도 깊게 어울리지 못했기에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며.


학교에는 불량한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공부를 하겠다고 들어온 인문계 고등학교에서조차 그런 학생들이 있는 걸 보면서 경멸보다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굳이 누군가를 겁박하거나 돈을 뜯어내지 않았다. 그저 화장실에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교사용 화장실에서 성교하다 걸려 퇴학당하기 일쑤였다. 퇴학이나 내신을 이용한 협박은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둡고 음습하게, 그리고 무기력하게 사라질 날만 기다리는 곰팡이 같았다.


내 눈에는 이 모든 일이 기형적으로 비춰졌다. 학생 인권 조례인가 하는 게 발표된 이후에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학교는 경쟁과 압박이 가득한 이상하고 두려운 장소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온 내가 교대에 들어가 교사가 된다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나는 여전히 그 음침한 구석에서 일그러진 교실을 바라보던 관찰자인데 말이다.


언젠가, 나도 술에 취해 경모에게 나의 과거와 생각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다. 타인과 엮이기 두려워하면서 기숙사에 들어가고, 사회 부적응자인 주제에 룸메이트와도 큰 문제없이 잘 지내는 것을 넘어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대화를 나누다니. 물론 절대로 들려줄 수 없는 깊고 어두운 것들은 꺼내지 않았다. 그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그야말로 교대에 어울리는 사람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얼토당토않은 내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는 항상 내 말을 다 듣고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반문했다.


"그런데 용케 교대 들어왔네요? 여기 등급 꽤 높은데."


등급, 이제야 그 기이한 학교에서 벗어났음에도 그 말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몇 등급 인간인가. 스스로에게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최하 등급을 주어야 한다. 한국 학생이었던 자로서 말하자면 9등급. 나는 단언컨대 최악의 인간이다. 이 세상의 온갖 비열한 협잡꾼, 살인마, 강간범, 폭력배를 비교대상으로 들이밀어도 나보다 최악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악덕을 보고도 침묵하는 사람이고 모든 선의를 받고도 의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비겁함보다 더욱 저열하고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상적인 사람들의 삶에 섞여있다.


언젠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은 적이 있다. 별생각 없이 집어 들었지만 1 수기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흘렀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처럼 섬세한 감성을 가지지도, 처절한 인생을 보내지도 않았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에 낱낱이 파헤쳐졌다. 나는 살아오면서 인간다운 삶은 산 적이 없다. 인간의 조건이란 녀석을 이해하기에는 내 머리가 당최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내 삶이 보편적 인간의 삶에서 많이 어긋나 있다는 것은 직감으로 알 수 있다.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든가, 도구화된 타자, 자아의 파멸 같은 어려운 이야기는 모르겠다. 오바 요조는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 하지만, 그는 누가 봐도 순수한 인격체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떠한가. 비겁자에 영악한 속물이다.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한 척을 하고 살아간다. 여태까지 잘 숨기며 살아왔지만, 숨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가진 영악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경모의 질문으로 기억 한구석 미뤄둔 추악함이 고개를 든다. 깊게 묻어두었지만 불쾌한 것들이 으레 그렇듯 숨겨둔 곳에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나는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재수했어. 그냥 어릴 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거든. 선생님들이 잘 대해주시기도 했고."


교대를 다니는 학생이 꺼낼법한 정형화된 답변이다. 경모도 이에 큰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갑자기 절실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어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피했다. 기숙사의 어두운 구석 흡연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교대에 입학한 2016년도는 교대의 입시 결과가 꽤 높은 해였다. 동기 중 한 명은, 고질적인 남자 교사 가뭄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교대의 방침으로 자기보다 성적인 높은 여학생 6명을 떨어뜨리고 합격한 양성평등 정책의 수혜자였는데, 그 친구조차 정시 모집 가군에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합격할 정도였으니 당시 교대의 인기를 가늠할만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수험생이 현역만 50만 명 가까이 되던 시절이라 청년 실업난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에 바로 취직할 수 있는 교대가 인기이지 않았나 싶다. 사회 현상 같은 것은 잘 알지도 못하고, 솔직히 관심도 없지만 당시 내가 느끼기로는 교대는 일종의 피난처였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약간이나마 덜 수 있는 그런 곳.


내가 교대에 들어가게 된 것은 다른 학생들처럼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꿈을 이루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재수한 2016 수능에서 찍은 문제를 모두 맞히는 기적으로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받았고, 그에 들뜬 부모님이 제멋대로 내린 결정이었다. 사실,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사'가 싫었다. 그토록 이상하게 바라보던 기형적인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요행으로 받은 성적이 내년에도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흘러가게 두었다.


대학 동기들은 나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동기들 중에는 이상하리만큼 바른 사람들이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교대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다른 대학교에서는 가장 착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알 만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흡연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려움과 경멸 섞인 표정으로 흘깃대며 숙덕거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성별 간 갈등을 조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분위기에는 여학생이 많았던 것도 한몫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바로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그러한 일탈행위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심지어 평생 나쁜 말도 해본 적 없이 바르게 자라온 예비 선생님들의 집단이었으니 자기 규율이 더욱 엄격했다. 본인을 아니라고 생각하는 예비 선생님들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선생님들은 이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수도원에서 제 발로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만족하거나, 나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자들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그때를 생각하면 역시나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녀는 세상에 녹아들지 못한 채 표면을 부유하던 나를 깊숙한 현실로 이끌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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