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자주 기숙사 생활에 대해 물었다. 엄격한 집안의 귀한 외동딸인 탓에 매일 두 시간 거리를 통학해야 했고, 그런 이유로 간섭받지 않고 사는 삶을 동경했다. 그럴 때면 난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그냥 불편하지 뭐."하고 넘겼다. 그럼 그녀는 동그랗고 순한 눈매를 샐쭉하게 늘이며 성의 있게 대답하라 말했다. 나는 그 얼굴이 너무나 귀엽고 소중해서 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움켜쥐며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건넸다.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서로 마주 보며 웃기를 즐겼다.
그녀는 첫 만남에도, 마지막 순간에도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대학교를 다니는 4년 동안 집을 떠나 지냈다. 종강한 후나 도저히 기숙사에서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이 혼란해지면 집에 돌아가거나 자취방을 빌려 살았지만 학기 중에는 여지없이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다. 자취를 하고 싶었지만 자취 비용을 감당할 형편이 되지 못했고, 평생 누군가의 밑에서 도움받으며 살다가 혼자 사는 것은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던 부모님이 반강제로 집어넣은 이유도 있었다. 거기라면 사감도 있고,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있으니 여로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두 살 위의 형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수재라고 소문난 형은 첫 수능을 기점으로 몰락했다. 분명 머리는 좋았건만, 시험 운이 없었던 탓인지 번번이 미끄러져 결국 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수험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재수 비용이 평균적으로 2000만 원 정도 든다 하니, 우리 가족은 나를 포함하여 입시에만 8000만 원가량을 쏟아부은 것이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공황장애가 심해지며 퇴직한 후로 수입이 반으로 줄었으니 내 자취비용까지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마 교대에 진학시킨 이유 중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도 저렴한 학비 때문이리라. 기숙사가 싫다면 통학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등교에 2시간 이상이 걸렸고, 거듭되는 형의 낙방으로 침울해진 집안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기숙사에 들어가, 사는데야 어디든 어떠냐, 가까우면 그만이지 하며 자포자기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학년별로 캠퍼스가 달랐다. 1, 2학년은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있는 캠퍼스에 다녀야 했고 3, 4학년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캠퍼스로 옮겨야 했다. 기숙사도 마찬가지여서 3학년이 되면 2년간 묵은 짐을 싸들고 안양으로 넘어가야 했다. 경기도에 있는 캠퍼스나 인천에 있는 캠퍼스나 기숙사는 꽤 좋은 편이었다. 특히 학생수에 비해 기숙사 정원이 여유로웠기 때문에 성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여학생 기숙사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여하튼 깔끔한 시설에 1층에는 체력단련실도 있어서 생활하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인천 캠퍼스의 기숙사는 산 중턱에 있어서 오르내리기 힘들었다. 도서관이나 예지관 사잇길을 지나 과학관을 지나고 나면 올라갈 엄두도 나지 않는 경사가 펼쳐진다. 차가 있는 학생들은 같은 과 학생들을 모아 한번에 올라가고는 했지만 매일 걸어 다녀야 하는 입장에서 그 경사란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지독했다. 그래서 나는 기숙사에 들어간 후 한 달간은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밖을 전전했다.
처음 며칠간은 동기들의 자취방에서 잠을 청했다. 아직도 내가 동기들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는 않지만, 대학 새내기라는 말은 이전까지 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을 가능케 하는 설렘이 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 서먹했지만 오히려 그 불편함이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기엔 유리하게 작용했다. 피차 어색한 사이에서 서로 일상에 큰 간섭을 하지 않았고 동기들도 첫인상을 매정한 사람으로 남기기 싫었는지 떨떠름하게 나를 반겼다. 그러다 체류가 하루, 이틀, 일주일이 되자 동기들은 나를 내쫓았다.
마음이 여렸던 친구는 "미안해, 주말에 부모님이 오신다고 하셔서..."라 말하며 배웅했고, 조금 강단이 있는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내가 강의를 듣고 있는 틈을 타 짐은 밖에 내놓았다. 막무가내로 그들의 선의를 이용한 것은 나이기에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찜질방, 피시방을 전전하며 보냈지만, 도저히 들어오지 않는 나를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던 사감이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며 때늦은 가출을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기숙사 생활에 대해 듣는 것을 좋아했다. 연애를 하기 전 미묘한 친구 관계로 지낼 때도, 연인이 되어서도 항상 기숙사 생활을 물었고 즐거워했다. 룸메이트가 에어컨을 틀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면 자애롭게 웃으며 "많이 덥겠다. 선풍기라도 사줄까?"라고 말했다. 화장실에 갔더니 술에 취해 널브러진 학생이 있어서 끌어내어 옷을 갈아입혀주고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하니 기특하다며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 때면 그녀의 손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부드럽고 달콤한 우유 같기도 했고, 은은한 라벤더 같기도 했다. 그럼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연인 같기도, 때로는 부모 자식 같기도 했다. 서툰 손길로 그녀의 셔츠를 벗길 때면 금기를 범하는 듯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나눌 때 언제나 불을 끄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맞닿은 허벅지에 부드럽고 축축한, 그리고 기분 좋은 습기가 감돌았고 매끈한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입을 맞출 때도 여러 번 시도해야 했다. 하지만 삽입은 항상 한 번에 성공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몰랐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들뜨지 않는다거나 억지로 참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했다. 관계를 할 때마다 몸이 가볍게 떨리며, 뜨겁고 얕은 숨을 뱉어냈기에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나는 이런 여자도 있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는 나의 두 번째 여자였으며, 그녀는 첫 번째였다. 그녀는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에 조금 실망했지만, 둘 다 처음인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그녀를 존경했고 사랑했다. 그리고 그만큼 불안했다.
그녀는 나보다 한 학번 선배였다. 나는 16학번이었고 그녀는 15학번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녀를 만날 일이 없어야 했다. 다른 대학교의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교대는 학번과 학과의 구분이 명확했다. 각 학년별로 이수해야 하는 커리큘럼이 있었고, 학과마다 들어야 하는 학과별 필수 과목이 달랐기에 다른 학번이자 다른 학과인 그녀를 만날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더군다나 동아리에 들어 타 학과나 선후배와 활발히 교류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MT나 해오름제, 대동제 같은 행사에는 얼굴도 비추지 않아 오다가다 만났을 가능성을 제외하면 사실상 접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운명이란 게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인간사에 그런 신비하고 주술적인 외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믿기에 나는 너무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그녀와 나의 만남을 생각하면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녀를 처음 본 곳은 체육실기 강의를 수강하기 위해 체육관 뒤에 있는 창고 같은 체조실이었다. 정문 바로 왼쪽에 있는 높다란 계단을 올라가 쭉 직진을 하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나는 기숙사생이었으므로 긴 내리막길을 걸어 수학과학관, 예지관, 도서관, 인문관을 지나 운동장과 체육관도 통과해야 했다. 작은 학교지만 캠퍼스의 끝과 끝을 횡단하는 여정이었기에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전날 술을 많이 마셨거나 밤에 책을 읽느라 피곤하면 핑계김에 강의를 빠지고 잠을 잤다. 어차피 졸업 후에 교사를 할 생각도 없었고, 당시에는 졸업만 하자는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기에 F를 받지 않는 선에서 결석을 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랬다. 그래서 강의계획서에 적인 '4회 결석 시 F학점'이라는 말은 흔히 3번의 결석까지는 허용한다는 뜻으로 통했다.
그즈음, 주머니가 가벼워졌다. 등록금은 아버지가 회사를 퇴직하며 퇴직 조건으로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달고 나왔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기숙사 비용이며, 식비, 교재비 등은 생각보다 큰 부담이었다. 부모님이 내주신다 했지만 형의 일로, 그리고 아버지의 퇴직으로 허리띠를 잔뜩 졸라맨 어머니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었다. 기회가 닿는 대로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해 생활비를 충당했지만 당시 최저 시급은 6000원 정도였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곳이 허다했기에 생활은 언제나 각박했다. 심지어 부족한 사회성으로 접객도 제대로 못해 페이가 괜찮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담배를 끊었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끼니는 언제나 학생 식당에서 제일 저렴한 라면으로 해결했다. 그러다 결국 생활비와 다음 학기 기숙사 비용을 낼 요량으로 부평역 인근에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2학기에 자퇴를 결심한 동기가 물려주고 간 자리였다.
원래 하던 일은 학교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보습 학원에서 채점과 자습 감독을 하는 조교였는데 시급이 아주 짰고, 학원 원장이 돼먹지 못한 사람이라 금방 관뒀다. 본인은 열정적으로 가르친다고 했지만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학벌의식에 가득 차 아이들을 닦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학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여대에 다니는 여학생을 비교하기를 즐겼다. 일례로 내가 더 늦게 들어왔고 하는 일도 적었지만 내 시급이 천 원 더 높았다. 나는 최저시급, 그 여학생은 최저시급보다 천 원 더 적은 금액을 받았다. 그의 생각에 학창 시절 공부를 하지 않아 서울 소재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패배자였다. 나 또한 그의 기준에서 보면 패배자였지만 면접에 들고 간 수능 성적표로 인해 보류대상이 되었다. 수능 성적이 자랑스럽지도,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것을 요구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물었다.
"야, 네 성적으로 왜 교대 같은데 들어갔냐? 거기는 가난한 애들이나 가는 데야. 등록금 낼 돈 없어?"
그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나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 실제로 부모님은 넉넉하지 않았고 원장이 좋아하는 '서울 소재 명문대'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담할 형편이 안되었다. 게다가 입시 따위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했던 것이기에 기분이 나쁠 일도 없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물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같은 핑계를 댔다.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리고 교대 가기도 힘들더라고요. 게다가 제 형편으로는 서울 소재의 명문대학은 꿈도 못 꾸죠."
선생님이 꿈이었다는 핑계는 언제나 통했다. 원장은 나를 약간 의식하는 듯했다. 그가 원장실 벽면에 자랑스럽게 걸어둔 수능 성적보다 내 성적이 높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틈만 나면 내 수능 성적을 언급했고 아깝다 말하며 자신이 졸업한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 했다. 나야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냐 싶어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갈수록 원장이 그에 대해 짜증이 늘고 내 근무 태도에 트집을 잡기 시작하여 버티기 어려워졌다. 40대인 원장은 아직 수능이 전부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세 달 정도 일했을 때,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은근한 승리감이 감도는 원장의 표정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같이 일하던 여학생의 부러움과 안도감 섞인 표정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튼 일을 관두자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원체 나가는 돈이 적어 당장의 생활비 걱정은 없었지만 지독한 무료함이 문제였다. 강의를 끝마치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뒤적이다 와도 아직 해가 넘어가지 않았다. 공허함을 채우고 싶어 친분도 없는 동기들에게 연락해 볼까 했지만 매번 행사도 빠지고 술자리에 나오지도 않는 녀석을 돌봐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나마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경모였다.
하지만 남자다운 생김새에 젠틀하고 착실한 태도를 가진 경모는 금세 여자친구를 만들었고 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오후 11시 통금 시간 이후가 유일했기에 그마저도 힘들었다. 어쩌다 시간이 맞아 술 한잔 하려하면 데이트를 하고 와서 피곤하다며 나를 피했기에 어쩔 수 없이 혼자 술잔을 기울여야 했다. 유튜브도 활성화가 더뎠고, 넷플릭스도 없는 시절이었기에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잠을 재촉했다.
하지만 불규칙한 생활 습관으로 잠도 찾아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멀뚱멀뚱 어두운 천장만 바라보며 밤을 새워야 했다. 그럴 때면 벽이 나를 옥죄어 오는 것만 같다. 넘실거리며 춤을 추는 벽들은 적막을 틈타 나에게 돌진한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기숙사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어 그럴 수도 없다. 그 공포는 내가 가장 취약한 시간에 찾아온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숫자를 센다. 100까지 세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러 간다. 그리고 무기력하고 멍청한 거울 속 나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야간 시간대 편의점은 일종의 피난처였다. 몸은 정말 힘들었다. 이러다 사람이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역시나 사람 대하는 일이었다. 번화가의 술집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편의점에는 온갖 인간 군상이 들끓었다. 술에 덜 취한 남자들은 풀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보로 하이브리드 5mg."나 "프렌치 블랙 하나."를 한 글자씩 끊어 말했다. 화장을 짙게 하고 옷을 짧게 입은 여자들은 연신 거울과 휴대폰을 번갈아 보며 "말보로 아이스 블라스트", "프렌치 블랙."을 흘러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여자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편의점에 술 취한 사람들만 왔던 것은 아니다. 포장마차에서 닭꼬치를 파는 박 씨 아저씨는 천 원짜리와 오천 원짜리를 수북이 들고 와 만 원짜리로 바꿔달라 요구했다. 그는 언제나 장사를 마무리하기 전에 팔다 남은 닭꼬치와 만원 한 장을 검은 봉투에 넣어 주었다.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가 적었지만 나는 그가 좋았다. 박 씨 아저씨 말고도 노래방 도우미를 나간다는 현지 누나도 편의점을 자주 찾았다. 누나는 실제로 입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화려한 레오파드 무늬의 상의와 딱 붙는 가죽 치마를 입었고, 신고 걸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하이힐을 신었다. 짙은 화장 속에는 피곤이 가득한 얼굴이 있었고, 목소리는 걸게 갈라졌다. 나는 그녀가 박 씨 아저씨만큼이나 좋았다. 누나는 나를 보면 동생이 생각난다며 웃었다. 고향인 마산에서 동생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며 누나는 약간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싸게 해 줄 테니 노래방에 갈 일이 있으면 자기를 불러달라 장난을 쳤다. 그녀가 올 즈음이면 손님이 드문 시간대였기에 나와 누나는 캔커피를 마시거나 컵라면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누나는 돌아가기 전, 항상 내 머리에 손을 살짝 얹고 미소를 지었다.
아침 4시 30분이 되면 물건을 잔뜩 싫은 트럭이 온다. 그럼 나는 기사님과 물건을 안으로 옮기고 물건을 선입선출했다. 근무는 8시까지였다. 7시 50분에 뚱뚱한 여자 사장은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 폐기를 몇 개 찍고 건네주며 집에 가라 했다. 삼각 김밥과 도시락을 챙기고 꾸벅 인사를 건네면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아직 햇빛이 들지 않은 상점가는 어둑했고 전날의 열기가 식어 습기만이 남아 있었다. 빈말로도 상쾌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 공기가 내심 마음에 들어 편의점을 나서면 항상 숨을 두어 번 깊게 마셨다.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 일이 좋았다. 몸은 힘들고, 위험한 상황도 많았지만 박 씨 아저씨와 현지 누나가 좋았다. 친절하지는 않지만 간섭도 없고, 돈에 인색하지 않은 사장이 좋았고 젊은 열기를 뿜어내는, 약간 퇴폐적인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가 좋았다. 사람들이 떠나 쓸쓸해진 거리도 좋았다. 무엇보다 무료할 틈이 없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