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원래라면 강의를 빠졌어야 했다. 야간 아르바이트로 인해 몸이 너무나 피로해 10시부터 있는 오전 수업은 빠지고 오후에만 강의를 들을 셈이었다. 하지만 지하철 보수 공사를 하느라 기숙사에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졌고, 그로 인해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으며, 지금 가면 오후 강의도 빼먹은 채 잠에 들 것이 뻔했다. 오후 강의는 이미 3번 결석한 상태라 이제 빠질 수 없는 강의였다. 오후 강의는 [철학 이야기]라는 서양 철학에 입문하는 윤리교육과 학생들을 위한 강의였는데 교수가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반강제로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에 취한 3학년 선배는 그를 두고 독일에 미친 사대주의자라고 평했다. 과한 호칭이라 생각했지만 교수는 실제로 독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수업 내용의 절반은 '독일 빵이 맛있는 이유'와 '독일 교육의 훌륭함에 대한 예찬'이었고 외고를 졸업한 학생들을 눈에 띄게 편애했다.
나처럼 평범한 학교에 외국어도 못하는 학생들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오리엔테이션 이후 교수의 강의에는 2주마다 한 번씩만 얼굴을 비췄다. 교수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출석만큼은 언제나 철저하게 불렀기에 오늘은 빠질 수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체육관 뒤편 체조실로 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중을 위해 오전 수업에 얼굴을 비추자 라는 생각에서였다.
커다란 컨테이너처럼 생긴 체조실은 가파른 경사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아 노랫소리와 기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동기들은 한창 뜀틀을 넘고 있었다. 여자 동기들은 뜀틀이 무섭기도 하고 땀 흘리는 것이 싫어 미적대고 있었기에 교수는 그쪽에서 목소리를 높여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 무리에 스며들었다. 남자 동기들은 누가 더 잘 뛰는지 겨루며 낄낄대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몇몇이 아는 체를 했다. 그중 한 명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정교였다.
"야, 오늘 출석 안 불렀어. 괜히 왔네?"
그는 몸을 좌우로 비틀고 스트레칭을 하며 여학생들을 가리켰다.
"진짜 대충 하네. 교수님이 불쌍해지려 그래."
나는 그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도 다른 강의 때 마찬가지잖아."
"그것도 맞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뜀틀로 뛰어갔다. 빠르게 달려간 그는 자기 키만큼 높이 쌓인 뜀틀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남학생 무리에서 작은 환호와 박수가 나왔다. 여학생 중 일부가 그를 힐끗거리는 게 보였다. 정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익숙하게 손을 흔들며 여유로운 태도로 화답했다. 그의 하얗고 갸름한 얼굴이 빛났다.
그는 나와 다르게 남녀를 막론하고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1학년임에도 농구 동아리에서 주전을 맡고 있던 그는 그 잘생긴 얼굴과 큰 키에 어울리는 길쭉한 팔다리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웃을 때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고 눈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눈이 나쁘지 않음에도 얇은 철테 안경을 쓴 정교는, 눈도 좋으면서 안경을 쓴다고 타박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매력적이잖아."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몇몇은 진심으로 흠모했다.
나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내 비틀린 인격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고 학교에서 유일하게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정교는 밝은 세상의 사람이었고 그 빛은 거리낌 없이 나눌 줄 알았다.
"아르바이트하다 온 거야? 그 부평 술집거리 한가운데 있는 거?"
정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뜀틀 순서가 곧이다.
"나는 그거 안 했으면 좋겠어. 너 매번 힘들어하잖아. 수업도 자주 빠지고, 과 행사는 나오지도 않고.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좀 더 대학생다운 생활을 즐겨보는 거 어때? 미팅도 나가보고 연애도 해보고, 아니면 술이라도 마시던가."
"미안, 바빠서 그럴 틈이 없다."
그렇게 웅얼거린 나는 뜀틀로 달려갔다. 주변의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뜀틀에 가까워질수록 키만큼, 혹은 그보다 높이 쌓인 벽이 보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벽은 서서히 존재감을 키웠다. 심장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두개골이 안쪽부터 터져나갈 것 같았다. 뜀틀은 이제 나를 집어삼키려 했다.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뜀틀에 가만히 몸을 기댔다. 결국 나는 벽을 넘지 못했다. 나무로 된 사다리꼴의 거대한 벽이 나를 비웃었다. 힐끗 주변을 돌아보니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을 끊고 저마다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정교만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줄 뿐이었다. 그 뒤로 강의가 끝날 때까지 나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수치심과 자괴감에 등줄기가 후끈해지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것은 익숙했다. 강의가 마무리되고 짐을 챙겨 나갈 때였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작고 부드러웠지만 그 목소리에는 나를 강제할 힘이 있었다.
"저기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그냥 가려했지만 약간의 기대감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작은 체구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딱 붙는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헐렁한 반팔을 걸친 그녀는 옷 때문인지 더욱 자그마해 보였다. 작은 발과 마른 두 다리는 애처롭게, 그러나 가볍게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가느다란 팔에서 곧게 뻗은 손은 아기의 그것처럼 하얗고 작았다. 얼굴은 또 어찌나 작은지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며 연분홍색 입술을 움직여 다시금 불렀다.
"저기요!"
아까보다는 크지만 여전히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와 처음 만난 이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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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글이 잘 읽히지 않는 순간이 있다. 분명 눈으로는 읽고 있지만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튕겨 나온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가족이 밥을 먹는 장면이었는데 '먹는'이 자꾸만 '먹기는'으로 읽히는 것이다. 한번, 두 번 수도 없이 읽었지만 끝내 내가 읽은 것은 '먹기는'이었다. 그럴 때면 자신의 부족한 집중력과 미약한 두뇌를 탓하며 책을 덮고 침대에 나자빠진다. 그녀를 만난 후 그런 일이 잦아졌다.
일요일 아침 8시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급히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후 짐을 챙겼다. 면도를 하지 않아 턱과 코 밑에 빳빳한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었지만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라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경모는 이틀 전, 그러니까 금요일 점심에 먼저 짐을 뺐다. 나보다 종강이 빨랐고 본가에 서둘러 가야 하는 상황이라 인사를 나눌 틈도 없었다. 금요일 저녁에 방으로 돌아가니 먼저 간다는 내용의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짐을 들고 나서기 전 바라본 방은 조금 허전했다.
나는 널널한 아침 전철을 타고 부평구청 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본가까지 가기 위해서는 강남구청 역에서 한번 더 갈아타야 했다. 부평구청 역에서 강남구청 역까지는 거진 종점과 종점이었기에 자리에 앉아 삼십 분가량 꾸벅꾸벅 졸았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푹 잘 수는 없었다. 지하철로 학교에서 집까지는 거의 초행길이나 다름없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몸을 울리는 일정한 진동과 스쳐 지나가는 옅은 형광색 불빛은 나를 상념으로 인도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기를 예지라 소개했다. 흔한 이름이었다. 동시에 그만큼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말을 건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들은 순간,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아지 다가오지 않은 청년의, 중년의, 그리고 노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매 시점마다 곁에는 내가 서있었다. 나이가 든 내 얼굴을 떠올리기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고, 나는 그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상상을 하자 얼굴이 화끈거려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네?"
살짝 고개를 돌려 바닥을 보며 대답하자 그녀는 살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뜀틀에 부딪힌 데는 괜찮아요?"
그녀도 봤구나.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달아올랐다. 그녀가 보지 않지를 바랐다. 그녀의 존재를 몰랐을 때는 약간의 부끄러움 말고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못 봤기를 바랐다. 기억에서 잊어주기를 빌었다. 대답이 없자 그녀는 예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도 잘 못하는걸요. 그냥 동지를 만난 것 같아서 반가워서 말 걸어본 거예요. 남자애들은 전부 잘하던데 못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안심이 되더라고요. 아, 이렇게 말하면 실례일까요? 그저 반가워서 그랬다고 생각해 주세요.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정말로."
동기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한 번씩 힐끗 쳐다보았다. 문 앞에는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근대고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겨우 목을 쥐어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김예지예요. 국어교육과고, 15학번이에요. 후배님이시죠?"
"네."
"다음에 만나면 인사해요."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다가올 때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하게. 이름을 말했어야 하는데, 후배는 맞지만 재수를 해서 나이는 당신과 같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적어도 다음에 만나면 인사하자는 말에 알겠다고 했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작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저는 이현수라고 해요......"
그 뒤에 정교가 달려들어 어깨동무를 하고 무어라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하철은 이제 가산디지털 단지에 접어들어 점차 많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드문드문 비어있던 자리가 가득 차고 어느새 내 앞에도 사람이 섰다.
나는 가방을 품속으로 더욱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지하철에 타면서부터 책을 꺼내 들었지만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기억과 음침한 상상이 들킬 것만 같았다. 책은 더 이상 책이 아니었다. 활자와 공백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고속터미널에 도착하며 승객 수는 절정에 달했다. 인파를 헤치고 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소심하고, 걱정 많고, 그러면서도 아닌 척하는, 이 나약하고 모자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조차 없다. 그래서 그녀가 말을 걸었을 때도 겁에 질려 얼버무렸다. 내 앞에 있던 여름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떠나고 할머니가 섰다. 노인은 허리와 다리를 연신 주무르며 은근히 눈치를 준다. 슬쩍 전광판을 보니 학동역이다. 다음에 내려야 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났다. 노인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먼저 몸을 밀어 넣는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노인 덕분에 나는 불쾌한 상상을 하는 음침한 인간에서 양심적인 청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지하철 유리에 비친 나는 여전히 교활하고 영악한, 하지만 그만큼 똑똑하지는 못한 인간이었다.
그래, 나는 어차피 그런 인간이다. 그녀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사람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 내가 한심하고 작아 보였다. 고개를 돌려 유리에서 시선을 뗐다. 유리 속 남자도 질렸다는 듯 함께 고개를 돌리고 빛무리 사이로 멀어졌다. 왕십리 역이었다. 분당선으로 환승을 해야 했다.